여기 사람이 있었다



2년 반만에 다시 붙은 촛불...용산참사 현장 촛불문화제 - 참세상 기사링크








1.

어제 2년 반만에 용산참사 촛불집회가 열렸다.

남일당은 폐허로 변했고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서울시 주차난 해소를 위해 주차장이 그토록 급히 필요해서 6명이나 사람을 죽였나보다.


2.

두개의 문은 5만 관객을 넘겼다.

개봉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하던 영화에 5만의 관객이 몰린건 무엇보다 영화가 갖는 힘이겠지만 타이밍의 적절함과 배급위원회의 노력도 빼 놓을 수 없겠다.

정동영에 문성근 같은 정치인들이 대선정국에 맞물려 영화관을 찾아주고

현병철같은 인사도 비록 쫓겨나긴 했지만 영화관을 찾았다. 심지어는 경찰들도 단체관람을 했다고. 영화가 가진 힘이다.


이 관객 증가추세라면 10만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거기에 공동체 상영이나 상영관 추가확보가 더 진행된다면 어쩌면 더. 더 많은 사람들이 '돈내고' '시간들여' '마음아파'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이건 용산참사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보다 '좋은영화'를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건 정말 잘 만든 웰메이드 필름이다.


3. 

어제 촛불문화제에 강허달림 언니님이 왔다.

(팬심돋게) 내가 제일 먼저 알아보고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가수가 아니라 개인 참가한 시민으로 온 그녀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팬심을 제거해서 봐도 그 태도는 정중했다. 인터뷰 신청한 내가 무례해보일만큼)


그녀 2집의 '멈춰버린 세상'은 용산참사를 위무하는 노래다.


++

가느다란 길 같이 걸었던 길
그 길에 내몰린 사람들
벌겋게 달아오른 불꽃에 멈춰버린 세상

내 모든 걸 주고도 남아 바뀔 수 만 있다면
나 아닌 누구의 삶이 유지될 수 있다면야
같은 공간, 같은 눈빛, 같은 웃음소리 나누던
촉촉이 젖은 길 흘린 눈물만큼 비린세상



기자들이며 팬들을 우르르 몰고와서 사진 한 방 찍고 떠나는 유명한 사람들에 비하면 

그녀는 확실히 덜 유명하지만 집회의 맨 뒷자리에서 끝까지 집회를 바라보던 그 마음만은 진짜인게 보인다.

늘 얘기하지만 노래는 딱 그만큼만이다. 살아가는만큼 살아본만큼 바라보는만큼. 

그녀의 노래가 사랑스러운 이유. 라고하면 너무 팬심돋는 맨트인걸까.ㅋ


4.

강허달림 얘기가 나와서.

그녀는 내가 아직도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는 '레드마리아'의 OST도 불렀다. 

(본인은 페미니스트 가수라고 불리거나 규정되는 것을 마뜩치 않아하는 것 같아 그렇게 부를 수는 없지만)

그녀는 경직된 규정, 소외, 허한 마음에 대한 위로.(를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텐데)를 노래한다. 


언제가도 얘기했지만 그녀가 부른 '독백'을 듣고서 엉엉 울어버리기도 했었다. 엉엉엉


여하튼 인터뷰를 거절하고 거절받은 그녀와 나는 잠시잠깐의 어색함을 겪어야 했는데 

내가 바로 팬심돋게 싸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일전에 그녀가 내 블로그에 방문해서 내 앨범평을 보고선 내가 보러간 공연에서 앨범평을 얘기했던 에피소드도. 그렇게 팬 인증을 하고서야 명함을 받아주셨. 다음에 또 어딘가에서 만나면 기어이 인터뷰 해주셨으면. 이번에도 자기이름 검색하다 또 이 글을 봐주셨으면.ㅋ 


5.

이것도 언젠가 얘기했던 것 같은에 난 모든 예술가는 좌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좌파를 있는 그대로만을 긍정하지 않고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상상하고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예술가는 가장 근원적인 좌파일 수밖에 없다.


사실 모든 삶이 늘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일이라면 살아가는 모든 이가. 

그래서 모든 삶이 곧 예술이라는 거잖아.


7.

김석기를 비롯한 이들에게 고발운동이 시작됐다. 이른바 '나는 고발한다' 에밀졸라의 유명한 경구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역사의 공범과 역사의 목격자. 두 개의 문이 다시 앞에 있다. 

경찰특공대에게 두 개의 문은 혼란이었지만 우리에게 두 개의 문은 용기다. 진실이고 선언이고 다짐이다. 


8.

남일당이 있던 곳은 공터로 변해 주차장으로 쓰인다. 

그리고 그 흉물스러운 주차장 바리케이트 한 귀퉁이에도 꽃이 피었더라.

밟아도 밟아도 살아나 다시 피는 꽃.









강허달림 - 멈춰버린 세상



영화 <두 개의 문>, 용산참사의 소환장 - 무엇이 '용산'을 소환했나


영화 <두 개의 문>, 용산참사의 소환장
무엇이 '용산'을 소환했나



제작단체 - 연분홍치마
감독 - 김일란, 홍지유




# 서스펜스(Suspense)와 스릴러(Thriller)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차이는 ‘관객이 범인을 알고 있는지 여부’라고 하면 간단하겠다. 주인공이 범인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긴박감을 느끼는 것이 서스펜스라면, 관객과 주인공이 모두 미지의 대상에게 공포를 느끼는 장르가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야마’(글의 얼개)를 잘 잡으라고 했던가, <두개의 문>을 보고 리뷰를 쓰라는 말을 듣자마자 떠올렸던 야마는 ‘서스펜스’였다. 심지어 영화관에 앉기도 전에.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국가의 학살극에 관객들의 공분을 일으키고, 범인은 정권이요 주인공은 ‘진실을 잊지 않는 여러분’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서스펜스. <두개의 문>이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라 기에 관객 모두 화내고 슬퍼하다 영화의 말미에는 “진실을 규명하고 정권에 책임을 묻겠다”는 결기어린 다짐이 샘솟는 그런 프로파간다를 지레 짐작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범인을 알고 있다’ 영화 시작 전에 노트에 써 놓은 이 리뷰의 제목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글의 방향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서스펜스가 아니었다. 영화를 볼수록 ‘범인’을 알 수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법정은 범죄를 증명하기보다는 범인을 찾는 과정에 가까웠다. 폭력과 야만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경찰특공대들은 차라리 그것들에 몸을 내어준 숙주에 가까워보였다. 그들 역시 야만의 현장에 내던져졌다. 어떤 생명줄도 부여받지 못한 채. 스릴러다. 목숨을 노리는 살인마의 정체를 영화 속의 인물들도 영화 밖의 우리들도 모르고 있다. 스릴러 영화는 관객들에게 정체모를 살인마와 잔혹한 주검만을 쥐어준다. 구타가 있었는지 여부도, 시너가 얼마나 쌓여있었는지에 대한 판단도 본질이 아니다. 스릴러 영화의 본질은 오직 ‘누가’, ‘왜’

#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 울고 있는 내 친구여 /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 루시드 폴, 평범한 사람 中

그는 경동시장에서 장을 보고,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가고, 가게를 청소하던 레아 호프집의 사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철거민이었고, 대책위원회의 고문이었고, 지금은 열사라고 불린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빚을 내 가게를 열었고, 하나하나 손때 묻혀 물건을 구입하고, 타일 한 장까지 직접 발라서 빚에도 불구하고 가게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평범한 사람이다.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덟 살 딸을 둔 아버지였고, 서른 한 살의 청년이었다. 무서워도 겁에 질린 티를 내서는 안 되는 경찰특공대였고, 망루까지 가는 길도 모른 채 등 떠밀려진 공무원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대척점에 놓고 대비시켜왔지만 사실 그들은 어떤 면에선 같은 편이다. 야만의 땅에 내몰려졌다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상황은 달랐지만 그들에게 역할과 상황을 준 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아마 이 스릴러의 살인마, 끝판 왕.





# 무엇을 보고 있었나

영화에 사용된 화면은 두 가지다. (영화 중간에 삽입되는 인터뷰 영상들은 제외하고) 하나는 칼라TV를 비롯한 진보언론들의 영상이고 또 하나는 경찰의 채증 영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쉽게 보지 못했던 채증영상을 통해 보이는 현장이다. 두 영상을 각각 씨줄과 날줄이라고 한다면, 두 실이 엮어내는 천이 성기거나 어색하지 않다. 그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까닭이다.

경찰의 채증영상은 매우 흔들리고 혼란스럽다.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몰랐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염병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망루안의 사람들이 위대한 혁명을 바라는 투사나 사회의 전복을 바라는 폭도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잔인한 살인마도, 피도 눈물도 없는 전투기계도 아니었다. 그 순간 그 곳에서 철거민들과 경찰특공대 양쪽 모두는 겁에 질렸고, 상황을 강요받았다. 그 곳은 마치 서로 죽일 것만을 강요받던 콜로세움.

앵글 한 번 변하지 않는 인터뷰와 흔들리는 채증영상. 영화는 집요할 정도로 그 혼란과 공포, 잔인함에 관객을 반복해서 끌어들인다. 경찰특공대의 그 그악스러운 잔인함은 어쩌면 공포심의 발로였을까.

# 여러분 부~자 되세요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은 대부분 노예였다. 그들은 싸울 것을 강요받았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권력은 그 열광을 지배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럼 콜로세움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살인자는 상대 검투사인가, 아니면 콜로세움 경기를 조장한 권력인가. 혹은 열광을 보내던 관객들인가.

2000년대 초반 한 신용카드 광고의 카피였던 “부~자 되세요”는 모델 김정은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카피는 온 나라의 주문이 됐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서로 부자가 되라고 말했다. IMF를 지나면서 신용카드를 비롯한 금융 자본의 비대화가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 목표가 된 시점이다. 인생의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될 뿐이고, 인격은 그저 '돈'으로 추정됐다. 돈이 곧 삶의 유일한 목표이고, 종교가 되어버린 것.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6명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 ‘책임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고 외면했다. 철거민들의 죽음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었고, 경찰의 죽음은 전문시위꾼 폭도들의 폭력 때문이 됐다. 이 외면과 전가의 무책임함에서 ‘대중’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로마의 권력자들은 콜로세움으로 대중들을 통제했다. 그러나 그 살인 유희에 열광을 보낸 것은 대중이다. 열광이 호출한 잔인함.

“부~자 되세요”라는 주문이 호출 한 것은 무엇일까.





# 두 개의 문 - 선택

영화에서 ‘두 개의 문’은 얼마나 성급하게 경찰이 투입됐고, 이들의 안전조차 보장되지 못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하지만, 관객들에겐 또 다른 메타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하는 질문.

감독들은 기획의도에서 “관객대중 스스로 어떤 위치에서 이 사건을 경험하고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는 것, 스스로 용산참사의 진상규명과정에 동참시키는 것”을 이야기한다.

진상규명과정이란 경찰이 망루를 때렸는지, 시너가 얼마나 쌓여있었는지, 경찰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를 판가름 하는 일이 아니다.(사건의 정황과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엇보다, 용산으로 대변되는 이 풍경의 호출에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 그건 가치의 전환이다. 인간적 삶에 대한 복원.

수전손택은 “꼭 강해지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소환장

‘스릴러’말고 다른 것으로 다시 야마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다. <두 개의 문>은 결국 주인공의 활약으로 살인마를 잡고 모두 안도의 한 숨을 내쉬는 도식적인 스릴러가 아니다. 이건 스크린 안에만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차라리 ‘소환장’에 가깝다. 관객을 배심원이 아니라 공범자, 혹은 주범으로 법정에 소환하는 듯했다. 그건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알약과도 같다. 영화는 현상을 전달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빨간약을 집어 드는 순간, 네오는 해방군이 됐지만 우리는 피고가 될테다. 그러나 반성의 기회는 주어질 것 같다.

아직 용산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MB정권이 건재해서도, 당시 경찰청장이 총선에 출마해서도 아니다. 아직 우리가 미처 반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은 거기부터다.


# 덧

1. 조금 더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싶다면 <두 개의 문> 배급위원이 되는 방법이 있다. 독립다큐멘터리의 제작환경에선 극장 개봉을 위한 최소한의 재정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다. 제작단체 ‘연분홍치마’에 메일(ypinks@gmail.com)을 보내 후원금 3만원을 약정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과 영화를 볼 수 있다.

2. 아직 개봉하지 못한 <두 개의 문>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기회는 ‘인디다큐페스티벌’이다. 3월 24일과 27일 인디다큐페스티벌 용산특별전에서 상영된다.(http://www.sido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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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5508&page=1

평범한 사람 - 루시드폴, 눈물자국 닦지말고 꼬질꼬질하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루시드폴의 평범한 사람은 용산참사를 노래한 곡이다.
살고싶어 올랐다 죽어서 내려온 이들에 대한 노래.

언젠가의 디렉터스 컷에 호란과 루시드폴이 나왔는데 호란이 앨범중에 '평범한 사람'이 제일 좋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전업가수 선언을 한 루시드폴의 마음을 노래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해석이야 본래 전적으로 해석자의 몫이니 호란의 발언을 탓할건 없지만 어쨌든 작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노선을 탄건 틀림없다.
폴은 그자리에선 부정도 수긍도 없이 웃더라만.

그런거다.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하거나 상상하지 않는다.

도심 한복판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불타죽은 사람들이 존재할거라는 상상.
재개발이란 미명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나고 폭도로 매도되고 감옥에 가는 일이 있을거라는 상상.
그저 대한민국은 하늘엔 조각구름이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며칠 후면 용산참사 3주기다. 다시 벌써 잊어가고있다.
어제 그 자리를 지나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곳을 지나다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잊고살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눈물자국 같은거 닦지않고 꼬질꼬질 남겨두며 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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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여기 사람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 여기 사람이 있다.

구토, 나를 위해 노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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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노조 간부의 아내가 자살했다. 이로서 쌍용차 사태로 생을 빼앗긴 사람만 벌써 4명째.
정부는 공권력 투입을 결정했고 노동자들은 페인트가 가득한 공장안에서 다시 제 목숨을 내놓으려 하고 있다.
빼앗고 빼앗다 이젠 빼앗을게 목숨밖에 남지 않아 목숨마저 빼앗는가,
빼앗기고 빼앗기다가 이젠 남은게 목숨밖에 없어서 그마저도 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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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이 거리로 나섰다. 6개월이 넘도록 장례도 치르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떠나지 못했을테다.
사실 더욱 서러운건 테러분자니 폭도니 하는 모함보다 이젠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 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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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반가운일이다. 소녀시대를 못보고 선덕여왕을 못보더라도 반가운일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한다. 언론을 빼앗기면 모두 뺏기는 것이다. 유래없는 민간독재는 더욱 공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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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팍팍하다. 현실은 언제나 시궁창. 쿨하게 외면할 깜냥도 안되는 겁쟁이로선 매일매일이 구토와 같다.
이 역겹고 답답한 삶을 위로받을 수 있을까. 나를 위해 노래 불러주세요.




Alexi Murdoch - Song Fo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