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에 해당되는 글 1건

뿌리깊은 나무


간만의 흥미로운 드라마다. 애초부터 고백하자면 신세경과 송중기의 자태가 이 드라마를 시청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으나, 지금에서 이 드라마에 대한 흥미의 토대는 그것이 아니다.(송중기는 이제 출연하지도 않을 뿐더러, 신세경은 주연이라는 이름과는 사뭇 동떨어진 분량을 보이지 않는가)

드라마의 축을 이루는건 두 부자지간이다.
이도와 이방원, 똘복과 이름도 명확치 않았던 그의 아버지.
주인공인 이도와 똘복의 행동의 근원은 결국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다. 서로 다른 형태로. 그러니까 이도의 경우는 아버지를 부정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군주상, 통치론을 관철함으로 아버지를 극복하려한다. 똘복의 경우는 그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인듯 보이지만 그것 역시 결국 아버지로 대변되는 신분질서, 혹은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지켜내지 못한 책임감과 죄의식(그의 삶이 오직 아버지로 귀결되는 개연성, 아버지에 대한 책임을 마치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인양 과잉하는 개연성은 극 초반부에 장황하다 싶을정도로 나타난다) 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의 그리움이다. 그 역시 오이디푸스.

결국 이 드라마는 주인공들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일종의 성장드라마인걸까.
라캉의 말마따나 이도의 상징계는 아버지 이방원의 권위에 굴복하는 언어들로 가득하다. 그에게는 이방원과 같은 폭력성도, 권력에 대한 집착도 강렬한 카리스마도 없다. 즉 그는 팔루스가 결여된 전형적인 오이디푸스다. 이도의 실재계는 이방원의 정치를 극복한, "모두가 권력을 나눠갖고, 권력의 독은 오직 왕만이 참고 견디어내며, 서로가 서로를 이야기하고 칭찬하거나 꾸짖는" 그런 사회겠지만, 이 역시 라캉의 말마따나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욕망은 상징계의 질서에 따라 만들어진다. 말인즉슨 욕망은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도는 "모두가 권력을 나눠갖고, 권력의 독은 오직 왕만이 참고 견디어내며, 서로가 서로를 이야기하고 칭찬하거나 꾸짖는"세상을 꿈꾸고 상상할 수는 있으며, 또한 그 실재계의 환상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상징계의 무엇을 바꾸어내는 예술(그에겐 훈민정음이나 조세개혁같은 것)의 자극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실재계에 닿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어서 이방원의 무덤에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라'는 자아를 만나지 않았나.

반면 똘복이의 오이디푸스는 더 정직해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억울하게 죽은 노비라기보다는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조차 거세해버리는 사회의 질서, 즉 왕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질서에 가까워보인다. 그가 거세의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 즉 신분질서, 그리고 그 정점인 왕인 것이다. 어쩌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친부가 그에겐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존재. 그래서 그는 저항하고 죽이려고 하겠지만 우리는 뻔히 알고 있다. 세종은 장수하고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훌륭한 업적도 남기고 '대왕'이라는 칭호도 얻는다. 똘복이 역시 실패하고 굴복할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나 권력의 분산같은 것들은 사실 이도와 똘복의 욕망에서 파생되는 잔여물 같은 것이다. 문자와 정보가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그것을 이양함으로서 모든 정보, 즉 권력을 자신에게로 회귀시키고 싶었던 이방원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의지를 표현 하는 것. 이도가 상스런 소리를 입에 담는 것도 마찬가지.

드라마는 세 권력의 투쟁이다. 왕과 신하와 천민.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자기의 싸움은 없다. 결국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싸움. 그러니까 이도와 똘복과 정기준의 싸움이 아니라 이방원의 아들과 노비의 아들과 정도전의 아들의 싸움이다. 그것은 개인의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다만,
그들의 드라마가 닿을 수 없는 그 욕망의 근원에 닿음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오래된 학자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종은 마침내 권력의 독도 권력의 달콤함도 지식도 정보도 부도 모두와 공유함으로 마방진을 완성해냈으면 좋겠다.
똘복이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삶의 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나 더 나은 삶에 대한 그리움으로 삶의 길을 개척하고 살아가는 평범함을 가졌으면 좋겠다.

결여된 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곳이지만, 그 드라마에서만은 그들이 어머니의 자궁안으로, 그들의 욕망이 시작된 곳으로, 그들이 마침내는 닿고싶은 그곳에 닿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세경의 출연 분량이 대폭 늘어났으면, 송중기가 종종 회상신으로 나타나줬으면, 김기범의 쌍커플이 좀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다.


▲신세경 사진이나. 
  아직 뿌리깊은 나무엔 이 때보다 예쁜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고 자시고 좀 출연을 하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