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떼 - 기록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떼

- 기록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흔히 다큐멘터리를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인 기록일까. 그보다 ‘객관’의 의미는 무엇일까, 차라리 ‘객관’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현상은 인식의 주체에 따라 다르게 보이며 그만큼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 코끼리의 다리와 귀를 각각 만진 맹인들의 우화는 어쩌면 현상의 인식과 실체적 진실의 결코 좁힐 수 없는 괴리를 나타내는 건 아닐까.



# 다이렉트 시네마


다이렉트 시네마는 미국의 프레드릭 와이즈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와이즈먼은 생생한 사건이 최대한 방해받지 않고 흘러가도록, 사건의 직접성을 포착할 수 있게 카메라 앞의 대상을 내버려두는 관찰자적 접근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카메라 앞의 모든 인공적인 요소들을 제거했다. 조명과 촬영장비, 스태프까지. 인위적인 모든 요소를 거부한 채 눈앞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기다리는 작업방식이다.

에릭 바누는 <다큐멘터리Documentary: A History the Non-Fiction Film>라는 저서에서 다이렉트 시네마에 대해


“다이렉트 시네마의 감독은 카메라를 상황 속에 던져놓고 위기의 순간이 오기를 바라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다이렉트 시네마를 옹호하는 예술가는 자신이 투명인간이 되길 꿈꾼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카메라가 접근할 수 있는 사건들 속에서 진실을 구축한다.” 고 설명한다.



프레드릭 와이즈먼, <티티컷 풍자극 Titicut Follies>, 1967



와이즈먼의 데뷔작인 ‘티티컷 풍자극’은 매사추세츠 주립병원의 간수와 치료사, 사회사업가 등이 재소자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84분간의 흑백 필름에 자세히 기록한다. 와이즈먼은 인터뷰와 내레이션, 자막 같은 ‘다큐멘터리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 채 병원의 인권유린과 권력을 비판한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주장이다.


다이렉트 시네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관찰자적 순수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카메라가 존재하는 한 대상은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꽁꽁 숨겨놓은 카메라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앵글 밖으로 나가버리는 야생의 맹수들을 보라. 몰래 카메라를 귀신같이 알아채는 눈치 빠른 연예인들도 사실 야생의 맹수와 같은 후각이 있겠다.)


영화는 편집의 과정을 거쳐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전해진다는 점에서 이미 순수한 관찰자의 시점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보다는 관찰 대상을 선정하고 관객에게 이를 소개하겠다는 생각부터 ‘객관’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대상의 선정이란 오롯이 감독의 ‘의중’과 ‘의도’아닌가.

다이렉트 시네마의 대표 작품 격인 ‘티티컷 풍자극’ 역시 매사추세츠 병원의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하겠다는 와이즈먼의 의중과 의도가 반영된다.


결국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영화의 맹아인 것. 다이렉트 시네마가 주장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은 어떤 불순물도 첨가되지 않은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 ‘주장’하는 ‘진실’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영화가 제작방식에서 ‘사실의 적시’만을 견지한다하더라도, 이미 ‘순수’와는 멀어진다. 사실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다큐멘터리에 애초에 순수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 시네마 베리떼


시네마 베리떼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민속지학자인 장 루슈에 의해 시작된 다큐멘터리 제작 이론이다. 그는 플레허티가 ‘북극의 나누크’를 찍으면서 에스키모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연출자와 등장 인물간 상호작용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실천했던 것처럼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자 곧 사람과의 관계를 기록하는 것임을 경험에 의해 인식한다.



로버트 J 플레허티,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 1922



시네마 베리떼는 주제와 연출자의 상호작용을 허용하고 심지어는 촉발시키기도 한다. 이 방법론은 카메라의 존재를 합법화시켰으며 감독에게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책임지는 촉매자의 역할을 부여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감독이 특정한 순간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대신 그 순간을 예상하고 자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시네마 베리떼 형식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장 루슈의 ‘어느 여름의 연대기’다. 영화는 감독인 장 루슈가 파리의 시민들에게 던지는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만으로 진행된다. 이 질문은 출연하는 시민들은 물론 감독인 루슈까지, 근원적 행복에 대해 자신을 점검하게 한다. 때로 감독은 촬영한 장면을 해당 인물에게 보여주면서 그 인물이 말했던 내용들을 수정하거나 더욱 깊이 생각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장 루슈, <어느 여름날의 연대기 Chronique d'un été Chronicle of a Summer>, 1961



시네마 베리떼 형식은 우리가 익숙하게 ‘다큐멘터리’로 인식하고 있는 작품들에도 차용된다. 소개했던 ‘웰랑 뜨레이’에서 감독의 가족들이 내적과 학살의 기억을 가진 캄보디아의 마을공동체에 녹아들어가던 모습, ‘할매꽃’에서 감독이 외할머니의 사연을 받아들여가는 과정, 그리고 어머니에게 ‘용서’를 묻던 모습이 모두 시네마 베리떼의 제작이론에 기반을 두었다 할 수 있겠다. (그들이 제작이론에 의거해 부러 그 같은 대화를 시작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취할 수밖에 없는 그 방식들을 루슈가 이론으로 정립한 것에 더 가깝겠다.)



#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떼


1930년대 이후로 다큐멘터리 제작방식은 격렬한 논쟁을 거치게 된다. 대상에 대한 서정적 관찰과 기록에 집중한 플래허티와 철저한 장인정신의 제작기술과 철저한 주관의식이 개입되는 지가 베르토프의 그것이다. 플래허티의 서정성도, 베르토프의 과장된 예술의식도 마뜩치 않았던 젊은 예술가들은 ‘프리 시네마 운동’이라는 새로운 문화 사조를 창출해낸다. 거기서 탄생하는 것이 시네마 베리떼와 다이렉트 시네마다. TV의 보급, 촬영과 음향장비의 발전 등의 변화에 맞춰 ‘기록’과 ‘현장성’에 방점을 찍은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와 대상과의 관계에 작가의 미학적 관점을 반영하도록 노력한 프랑스 중심의 시네마 베리떼로 분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서로 다른 극단에 있는 제작 기풍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제작이론의 뿌리가 사실은 같다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추구하던 것은 대상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결국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기반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예술이라는 정의가 확립돼 온 과정이다.



# 역사란 대화, 그리고 현실을 다듬는 망치


기록의 의미란 ‘사실의 축적’에 있다. 그리고 축적된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찾는 탐구의 과정이다. 진실이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으며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바라보는 사람의 세계관에 따라, 바라보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고 또 새롭게 기록된다. 그렇게 다르게 해석된 또 다른 기록들의 계속된 축적. 그것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진실, 그리고 ‘역사’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첫 장에서는 역사의 정의에 대해 배운다.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가 객관적 의미의 역사라면 후자는 기록한 역사가의 세계관에 의해 해석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가 우직하게 사실을 기록함으로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이렉트 시네마와 같은 것이라면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사관의 세계에 따라 사실의 이면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통해 진실을 탐구하려는 시네마 베리떼와도 같겠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진실의 의미를 사실의 나열로 좁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구도자적 끈기가 오히려 더 그 실체에 가깝다. 와이즈먼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벨파스트, 메인’은 뉴잉글랜드 지역의 지역공동체를 끈질기게 담아낸 그 구도의 산물이다.


시네마 베리떼는 진리에 닿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다. 제멋대로 사실을 왜곡하고 변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면의 진실을 캐내기 위한 노력이다. 감독들의 다양한 세계관과 의도는 왜곡과 편향이 아니다.


청와대 탱크 진격의 사실을 두고 쿠데타로 규정할지 혁명으로 규정할지는, 그 공과 과는 무엇인지 두고 다투는 건 현재의,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대의 몫이다. 그 치열한 쟁명과 토론의 축적이 빚어내는 것이 역사다. 역사란 단면이 아니고, 알량한 단편의 사실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진실의 무게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역사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행하는 것이다.


E. H 카의 말을 굳이 인용하자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여기에 브레히트의 한마디 조언을 덧붙이자면,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다듬는 망치다.” 지금도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은 현실을 다듬는 망치가 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