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스_추가기고] 그 세계 바깥의 페미니즘

[워커스_추가기고] 그 세계 바깥의 페미니즘



‘쇼타로 컴플렉스’와 ‘로리타 콤플렉스’는 다른 것이냐는 주제를 두고 한동안 온라인이 시끄러웠다. 어느 방송에서 한 여성철학자가 쇼타콤과 로리콤을 동일 선상에서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젠더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대상이 되는 여성과 남성의 권력 차이를 기반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로리콤이나 아동성애 같은 심각한 주제는 물론 데이트 비용 부담, 여성 전용 주차장, 여성부의 존재 같은 이제 꺼내기도 지겨운 케케묵은 이야기들까지. 젠더 권력에 대해, 사회적 맥락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지 않으면 어정쩡한 ‘이퀄리즘’따위에 빠지기 십상이다. “밥값 더치페이도 안하는 메갈들” 같은 빻은 소리나 하게 되겠지.


# 바야흐로 ‘페미니즘 리부트’


근래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바야흐로 갈등의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말까지 나올 만큼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는 비약적인 양적 확장을 이뤘다. 이제 사회 곳곳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그 양적확장이 곧 질적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적어도 ‘온라인 공간’에서만큼은 그렇게 보인다. (페미니즘 논의의 확장에 SNS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의 역할은 막중했다. 운동의 주요 전선은 여전히 라인 위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온라인상에서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 갈등과 대립이 불러온 폭력과 차별에 대한 논란은 페미니즘 운동 전체에서도 매우 높은 의미량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건 ‘권력’과 ‘젠더권력’을 혼동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성소수자에 대한 페미니즘 일각의 배척이다. ‘쓰까페미(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부르는 말)’와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의 대립. 


최근엔 한 학자가 학회에서 논문발표를 저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레디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주로 그 학자의 발표를 반대하며 학회를 ‘압박’했다. 그 학자가 ‘성소수자로서의 여성혐오’를 조장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들이 말하는 ‘성소수자로서의 여성혐오’란 게이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나 트랜스젠더들의 성별정체성을 옹호하는 일이었다. ‘압박’이 이뤄졌고 ‘권력’이 작동했다. 이것은 기울어진 ‘젠더권력’이라는 사회적 맥락 위에서 이해해야 할 일일까. 아니면 ‘권력’을 통한 억압이라는 기성의 구조가 외피를 바꿔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일일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연예인 지망생의 SNS도 최근의 화제였다. (그 연예인 지망생은 이런저런 사건들로 데뷔 전임에도 매우 유명하다.) 유명한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인권에 대한 게시물을 SNS에 종종 올리다보니, 그녀에겐 꽤 많은 메시지들이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의 SNS에 몇몇 트랜스젠더로부터 받았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내용인즉슨 “트랜스젠더도 여성이니 우리의 인권에 관한 게시물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것. 그녀는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 하는 이들에게 “넌 여성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발언이다. “나의 운동에서 당신들을 배제하겠다”는 발언이기도 하다. 존재를 단정하고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것을 어떤 이름이든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발화의 형태가 온건하든 급진적이든, 운동의 요체는 소외된 주체를 복원하는 일에 있다. 그것은 나의 운동이 다른 무엇을 소외하는 일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하다. ‘젠더권력’의 불공평함을 바로 잡기 위해 또 다른 ‘권력’으로 폭력과 차별, 착취와 억압을 허용하는 것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게 제대로 ‘젠더권력’의 불공평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나는 지정성별 남성의 이성애자이고 뚱뚱하고 지성 피부에 탈모가 온 남성이다. 난 남성으로서 젠더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학벌이 없는 흙수저 노동자로서 이 사회의 계급구성의 하단부에 놓여있다. 난 이성애자로서 주류에 있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로서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선 배제되고 있다. 내 다양한 정체성들은 서로 어떤 것들과 접속하고 교차하는지에 따라 소외를 이중으로 가속시키기도 하고 중화시키기도 한다. 교차성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킴벌리 크랜쇼는 ‘교차로에서의 교통사고’를 예로 들었다. 교통사고가 교차로에서 일어날 경우, 사고는 오직 한 방향에서 온 차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 때로는 모든 방향에서 오는 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 사고는 더욱 커진다. 사고의 수습방법도 다양해지고 책임추궁의 방식도 달라진다. 페미니즘 운동뿐이 아니라 모든 운동은 사실 서로의 관계, 그리고 주체들의 배치에 따라 생성될 수밖에 없다. 굳이 운동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존재하는 모든 일이란 타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억압된 여성이 착취당하는 노동자에서 자기의 억압을 인식하듯, 소외된 노동자가 배제된 장애인에게서 자기의 소외를 발견하듯. 이 모든 것들은 관계를 맺고 있고 어느 하나만이 자기의 정체성일 수는 없다.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이 어떤 배치를 이루고 어떤 기재와, 어떤 욕망과 접속하고 교차하는지에 따라 삶의 양식도, 그 삶의 양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도 발생한다. 


레디컬 페미니즘이 의미 있었던 지난 세기는 페미니즘이 ‘조개 줍는 소리’로 치부되던 당시의 운동에 저항하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8~90년대를 관통하며 레디컬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운동이 고유의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이 남성이 전유하던 운동의 부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대다. 노동이 해방되면 여성도 해방된다던 당시 꼰대 아재들의 주장과 ‘자궁달린 여자만 여자’라며 ‘당신이 아닌 자들’을 배제하는 지금의 주장은 얼마나 다른가. 세상을 단 하나의 책으로 이해하고 단 하나의 창으로 관찰할 순 없다. 한국사회, 아니 사실은 이 세계 전체가 기울어진 젠더권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오직 그것만이 문제고 나머지는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XX염색체와 자궁을 가진 존재들만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이고 나머지는 다 배부르고 편한 소리 늘어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니터 바깥으로 


고백하자면, 이건 다시 쓰는 원고다. 수정이 늦어 원래 썼던 원고가 이번호 <워커스>에 실렸다. 이 글은 아마 인터넷을 통해서만 유통될 테다. 난 수정되지 않은 지난 원고에서 “여성주의는 따듯한 마음과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여성주의만 진짜 여성주의라고 광광우럭 하는 꼴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으면 생존조차도 힘에 부쳐야했던 여성에 관해 사유해 본적도 없는 속편하고 배부른 한남충의 ‘진짜 페미’인정 운운. 뭐 그런 거. 진의가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 한계를 극복해 더 많은 이해와 연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그러면서 종종 칭찬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고. 


내가 하려는 노력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 바깥을 끊임없이 살피려는 노력이다. 젠더권력을 날 때부터 가져서 실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삶을 애써 보려하는 노력. 거기서 나의 폭력을 떠올리고 당신이 받았던 억압을 상기하려는 노력. 내 삶의 모순을 인식하는 계기로 삼고 당신의 싸움에 함께 연대하려는 노력. 그렇게 나와 당신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며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실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음을 깨닫는 노력. 그렇지만 당신의 존재와 나의 존재는 특수성을 지니며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노력. 내가 생각하는 노력은 그런 것이다. 그저 페미니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혹은 운동은 바깥을 향해야 한다. 당신이 보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든 그 바깥에도 고통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고통이 또 다른 폭력과 차별과 착취를 용인해주는 자유이용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창의 모양에 따라 세계는 달리 보이지만 진짜 세상은 창으로 보는 세상보다 훨씬 더 많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다못해 창문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했듯 '넷페미’는 지금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한 전선이다. 수없이 많은 주의와 주장, 말과 글, 이미지가 온라인을 떠돈다. 사회적 조류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실제 세계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넷페미의 운동과 투쟁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서 유통되는 모든 것들이 정말 모든 것은 아닐 수 있다. ‘온라인의 언니들’ 덕분에 코르셋을 벗었다지만, 하지만 정말 당신은 정말 코르셋을 벗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맘에 들고 편한 코르셋으로 갈아입은 것은 아닌지.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최근에 목격한 몇 가지 일로 혼란스러워졌다.

 

#1

그리 친하지 않은 지인 A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얼마 전 공중화장실에 적힌 낙서에서 어느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화장실 담벼락의 낙서가 가질법한 악덕에 매우 충실한 낙서다. 번호의 주인은 남성일 것으로 추정됐다. 그녀는 그 전화번호를 저장했고 저장된 전화번호는 번호 주인의 SNS계정으로 이어졌다. A는 그 SNS 계정의 화면을 갈무리해 자신의 SNS에 공개했다. 번호 주인의 SNS를 공개하면서 A는 그를 ‘몰카범’으로 지칭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가 몰카범이 아닐 가능성, 그 번호의 주인이 그의 신상을 파악한 이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피해자가 될 가능성에 대해 지적하자 그녀는 “그에게 해명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몰카 범죄는 나쁘다.

 

#2

한서희라는 연예인 지망생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 이런저런 사건들로 유명해졌다. 유명한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인권에 대한 게시물을 자신의 SNS에 종종 올리다보니, 그녀에겐 꽤 많은 메시지들이 도착했던 것 같다. 한 씨는 자신의 SNS에 몇몇 트랜스젠더로부터 “트랜스젠더도 여성이니 우리의 인권에 관한 게시물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트랜스남성(FTM)이 보낸 것도 아니었을 텐데, 왜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고 굳이 답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가끔 SNS는 인생의 낭비다.

 

#3

지인 B가 지하철 안에서 화장을 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SNS에 썼다.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 다른 여성이 ‘여자의 자존심’을 운운하며 지하철에서 화장을 해선 안 된다고 면박을 주었고 그 면박은 다른 승객들이 ‘남 이사 어디서 화장을 하든 무슨 상관이냐’며 제지하고 나서면서 멈췄다는 일화. 댓글에서 다른 지인 C는 화장을 할 때 나는 냄새가 불편하니 공중의 공간에서 화장을 하는 건 지양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내놨다. 여성에게 화장을 강요하는 구조적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있었다. “모두 화장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결론이 나려던 찰나, 새로운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남 아재들이 등산복 입고 막걸리 냄새를 피우는 건 어쩔 거냐”는 요지의. “화장에서 무슨 냄새가 나냐”고 묻는 댓글도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역시 SNS는 가끔보다 더 자주 인생의 낭비인 것 같다.

 

# 그게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여성주의를 ‘따듯한 마음’이나 ‘위로의 말’ 같은 걸로 정의했었다. 물론 학술적으로도, 또 운동적으로도 정확한 정의는 아니겠다. 다만 여성주의 텍스트들을 읽고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지위를 발견하고, 차별받는 장애인들로부터 배제된 여성의 존재를 인식하는. 그렇기 때문에 시혜나 연민이 아니라 손을 내고 연대함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여성주의의 본질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여 여성주의 운동은 모든 폭력과 차별과 배제에 저항하며 소수자에 연대하고 어떤 존재도 지워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 여러 논쟁들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틀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궁과 유방을 달고 태어난 여성만을 챙기는 것이 여성주의라는 주장,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때문이라는 단편적인 시선. 저항을 빙자한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생산해내는 지긋지긋한 악순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는 어떤 언어도 배우지 않은 상태고 가장 위험한 존재는 단 한권의 책만을 읽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내가 도무지 뭘 모르기 때문일까. 정말 그게 여성주의 인가요?

 

사실 ‘진짜 여성’을 운운하는 건 ‘진짜 남자’를 빙자하는 남근주의의 거울상에 불과하다.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남성에 의한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면 다른 이들의 ‘존재의 확인’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조롱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 아주 간단한 논리. 누구도 때릴 수는 없다는 주장을 하려면 당신도 누구를 때리면 안 된다. “쟤가 날 때리는 건 싫지만, 내가 널 때리는 건 상관없어. 넌 맞아도 싸니까.”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김치녀를 욕하면서 화장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한남충과 다를 건 뭔가. 피해는 다른 피해를 양산할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니다.

 

사실 이번 원고를 쓰기 시작할 때는 조금 화가 나 있어서 “페미니즘을 자처하기 위한 이들은 시험이라도 봐라”같은 뻘소리를 지껄여볼까 생각도 했다. 990점 만점의 페미니즘 시험에서 850점을 넘지 못하면 SNS에 관련 포스팅을 못하게 하는 법조항이라도 만들자는 아무말 큰잔치. 하지만 조건이 붙은 권리는 권리가 아니다. 아주 피곤하고 복잡한 일이지만 인권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속시원하자고, 불편하다고 멋대로 괴롭히고 죽이면 안 된다. 운동의 역사는 그 다짐을 공고히 해온 논의의 축적이다. 나도 그래서 시험보자는 얘기 결국 안했잖아.

 

당신들이 페이스북 안에서 그린 여성주의가 정말 여성주의인지 모니터 밖의 세상을 보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몇가지 단상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몇가지 단상
 
1.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 타결 이후 이에대한 비판과 비난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 모든 논의가 민족주의라는 다분히 감정적인 거대담론에 흡수되고 있다. 더구나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위 '진보' 내지 '개혁'진영에서는 반 박근혜 정서를 기반으로 민주대 반민주의 정치 구도까지 짜내고 있다. 표면으로만 보면 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시대 일본과의 문제고, 이를 졸속으로 합의해버린 현 정권에대한 당연한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정도의 단조로운 논의와 투쟁은 결국 본질이거나 외면해선 안되는 영역까지도 은폐해버리는 기능을 한다. 

2. 
'순결한 소녀'가 짐승같은 왜놈 군인들에게 짓밟힌 사실에 대한 분노.라는 이미지가 '자발적 성판매'와 '인신매매'라는 극단적인 대립 구도를 낳지만 이는 기실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시선이라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위안부 문제는 본질적으로 전시 성폭력의 문제다. '순결'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순결한 소녀의 삶을 짓밟았다는 또다른 가부장적 억압이다. 이같은 가부장적 억압의 시각은 한국 남성이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성폭력, 라이따이한과 코피노들에 대한 외면으로 귀결된다. 그 지긋지긋한 변명, "걔들은 원래 매춘부잖아"로. 

3. 
위안부 문제에 대한 편협한 시각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연구 자체를 호도할 우려도 있다. 실제로 위안부 모집통로는 다양했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일본군이 주도적이거나 밀접하게 관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 대한 면밀하고 구조적인 파악과 연구가 완료되기 전에 민족주의적 감정과 논리없는 일반화, 순결 이미지에 대한 추앙이 선행하면 일본군과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구조를 올바르게 규명할 수 없게된다. 이를테면 식민지배 시절 조선인 포주나 자본가에 대한. 악마화 할 대상을 일원화하고 그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기는 쉽다. 하지만 제대로된 분노를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잘잘못을 따지는 일부터 해야한다. 

4. 
여성의 성판매에 대한 입장도 분명해야 한다. 사회일반이 성노동을 인정하지 않고 여성 성노동자를 범죄자 내지는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가운데 위안부 피해 사례를 면밀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정확하지 않은 사례지만 콩고에서 전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식량조달을 위해 자발적 성판매를 하는 일.도 있다. 이를 '매춘'이라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로 규정하면 정작 피해자의 실상과 경험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피해여성 제각각의 사례와 위안부 피해 과정을 단순하게 일반화 하면 현재의 성노동자는 물론이고 당시의 피해여성들에 대한 이해도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4-1. 
전시 성폭력의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베트남에선 한국 남성들이 가해자다. 전시 성폭력의 문제는 국제적 연대를 통해 전지구적으로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문제로 확장돼야 함이 옳다. 한국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국제 사회의 압력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고. 그러나 편협한 민족주의 시각, 뒤떨어진 가부장적 시각으로는 국제연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이는 사실 독도와 야스쿠니 같은 일본과 얽혀있는 많은 문제들에서도 같은. 

5. 
현재 야권에서 만들고 있는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이라는 구도 역시 마뜩치 않다. 사실 이 모든 논의를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는 건 이 지점이다. 위에서 지적한 모든 복잡다난한 논의와 고민거리들을 다 재쳐두고, 분노와 당위가 수렴돼야하는 지점은 고작 박근혜나 정권 따위가 아니다. 이는 생존 피해자를 중심에 놓은 사고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도 아니다. 민족주의 담론은 결국 대중적 감정의 문제고, 사람들을 추동해내기에 가장 좋은 미끼다. 결국 물 만난 김에 노 젓는 금배지 장사들의 장삿 속. (그러고 이기기라도 하면 다행이게. 어차피 질 거면서.) 

6. 
일본에서 우익정권이 집권하며 민족주의 정서가 강해진 것에 대한 효과로 한국의 민족주의 정서 역시 강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쟤가 똥먹는다고 따라 똥먹지는 말자. 

7. 박유하 교수의 책을 읽고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선 우익적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이뤄져야 할 토론을 법정공방으로 옮겨가거나, 이론과 지성의 기반 없이 이뤄진 감정적 '비난', 그리고 마녀사냥. 이런 건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싶은.


비키니응원 논란에 대하여 - 뿌리 깊은 나무는 도대체 어디로 본거야


지난 주말 비키니응원 논란을 보다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생각났다. 좀 뜬금없이. 남한사회 똥멍충이 마초이즘의 여성에 대한 객체화에서 로자를 떠올리는 건 사실 그녀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ㅋ

맑스의 친구였고 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대장 격이던 베른쉬타인을 수정주의라 비판하고 그 레닌과도 맞짱을 뜨던 이 혁명가는 장애를 가진 유대인이다. 그리고 여성.

로자는 그랬다. 그녀는 여성이라서, 장애인이라서, 유대인이라서, 코뮤니스트라서 받아야 하는 온갖 모순을 직접 맞닥뜨려야 했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의 삶의, 세상의, 혁명의 온전한 주체에서 비껴 서지 않았다.

언젠가 로자가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끌던 혁명가, 레닌에게 거의 유일하게 대항 할 수 있었던 이론가로서의 평가보단 흔치않은 '여성 혁명가'로서만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끝까지 그녀는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보다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로 존재한다. 더욱 속상한 일은 그 객체화의 주범이 그녀를 동지라 말하던 이들이란 사실이다.

남한사회는 여러모로 많이 구리지만 그중에서도 젠더문제에 대한 인식은 구림오브 구림, 병신큰잔치. 여성의 성이 정치주체인 남성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성들에게 호출되는 것은 참여가 아니라 도구화다. 자발적인 참여니, 표현의 자유니를 운운해선 안 된다. 그 행위, 그러니까 여성의 특정 성징을 통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서로 말 안 해도 알고 있잖나. 그렇게 표현의 자유가 소중하다면 왜 성범죄는 여성들의 야한 옷차림 때문이고 여성들의 방탕한 생활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거냐. 여성이 성의 주체로서 나서는 일은 음란이고,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객체화 되는 일은 자유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오만하고 안하무인한 모순인가.

자신만은 그 유치한 마초이즘의 수혜자가 아니라는 알량한 자기위안 또한 역겹다. 이미 남한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것을 깨트리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이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공범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사회가 얼마나 남성 우월주의적 가부장제인지를 인식조차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지보다는 외면, 죄악에 가깝다. 그러면서 그것은 진보라는 가치로 에둘러 포장한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다.

누구더라, '춤 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저 즐거운 진보운동을 운운하는 꼼꼼한 분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기도하다. 난 그 유치한 장단에 춤 출 수가 없다. 그건 유쾌보단 유치에 그보단 폭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작 이런 사건 하나로 분열을 일으키면..' 운운할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젠더의 문제는 고작을 운운할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그건 이 사회의 인권과 민주를 가늠하는 바로미터. 그리고 무엇보다 주체의 확장만이 운동의 본질이라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런 여성의 성에 대한 도구화는 다신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정치주체의 확장을 그렇게 얘기하던 뿌리 깊은 나무는 도대체 어디로 본거야. 우라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