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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 그 벽에는 작은 문을 내고자

"왜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영화 잘만들기로 유명한 어느 감독의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였다. 영화적 만듦새, 형식미, 유려함. 완성도라고 부르는 그것들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는 중이었지만 내 관심은 그보단 '이유'였다.


우리는 왜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까. 영화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우리는 왜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일까. 목적이 없는 이야기. 그저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그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 유려함을 뽐내는 것이라면 도대체 왜 우리는 그 고통을 견뎌가면서 이야기를 짓고 읽는 것일까. 


# 김혜진


문학이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다. 얼음을 깨는 것. 얼음을 깨고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변화하는 것.  더 나아짐을 상상하는 것. 더 나아지기 위해 자기와 세계를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둡고 캄캄하고 아무 것도 없어서 그저 빠져 죽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우물 속에서 단 한모금이라도 물을 길어올리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문학과 이야기의 본령이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다. 분명히 그것이다. 희망과 변화, 상상과 운동이 없는 문학이나 영화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김혜진의 소설을 읽고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중앙역>을 읽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단어를 갖다붙여도 사치스러울 것 같은 삶. 우리는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사실 구원따위가 다 뭐람. 그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음으로 지금의 다음 순간 정도를 살아낼 수 있는 그런 역동. 


삶을 살아가는 것, 나아가게 하는 힘을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면 그것이 오직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중앙역>에서 읽어내는 것은 희망이어야 옳다. 


아주 오랜만에 집어든 소설이 <중앙역>이어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부여잡고 앉아 밤새도록 꾸역꾸역 읽었다. 김혜진의 소설은 '진짜'라는 생각이 든다. 리얼함이나 깊은 취재를 말한다기 보다는 '진심'이라는 느낌에 가깝다. 고통을 전시하는 것으로 연민하거나 과장과 과잉으로 꾸미지도 않는다. 솔직한 문장, 정직한 마음.  


# 딸에 대하여


어쩌면 이해는 '문을 내는 것' 정도일지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타자라는 것은 곧 벽이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 언젠가 엄마에게 "우린 남이니까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벽을 확인했지만 문을 낼 생각 따위는 해보지도 않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말이었다. 


사실 엄마는 '벽의 존재'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타자성이니 어쩌니. 하지만 엄마는 계속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저 노력하는 것만으로,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서로에게 다가가고 더 가까워지고 조금이라도 더 알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겪고 견뎌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런 기적이 오기도 전에 내가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지 않니. 그건 거짓말이니까. 내 딸을 포기하는 거니까 떳떳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내 딸의 삶을 내가 놓아 버리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하여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 나는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인지, 너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희망인지. 그 벽에는 작은 문을 내고자.


# 여성의 노동


소설 속의 여성들은 모두 '누군가를 위한' 노동을 한다. 레인은 '가끔 죽을 것만큼 힘든' 자기의 노동으로 그린의 생활비를 충당한다. 젠은 젊은 날에는 외국에서 해외 입양된 이들을 위해, 나이들어서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돈과 힘을 썼다. 그린은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한 동료들을 위해 돈벌이를 포기했다. 그리고 화자는, 젊어서는 초등학교의 교사로, 학원버스 운전기사로, 구내식당의 노동자로, 지금은 요양병원의 돌봄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여성들의 노동은 자기의 것을 향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한 것으로 존재하며 그래서 '주변부'의 노동으로 치부된다. 여성들의 노동을 주변의 노동으로 취급하며 그를 딛고서 사회는 성장했다.   


그래서 나는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이 그동안 '남성들이 해오던 노동의 인식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길 바란다. 누군가의 희생을 양분삼는 노동. 내 아이를 누군가는 돌봐주어야 하고 내가 일하기 위해 누군가는 밥을, 빨래를, 청소를 해줘야 하는 노동. 주변의 노동으로 취급되는 이 돌봄노동을 딛고서야 '공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이 존재할 수 있었다면 그 역할을 맞바꾸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인식 지평을 넓히고 모두가 서로를 돌보고 모두가 서로에게 복무하며 모두가 공적인 영역에서 일하고 모두가 사적인 책임을 지는 새로운 노동모델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면 '꿈 같은 소리'라는 핀잔을 듣곤 했다. 하지만 소설의 화자가 딸을 이야기를 포기 하지 않는 것처럼, 젠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주었던 것처럼, 레인의 손에 난 상처에 눈길을 주고 따듯했던 말과 위로를 마음에 담아둔 것처럼. 꾸준히 꾸준히. 삶은 그렇게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며 나아가는 것이겠고, 우리의 삶과 투쟁, 운동도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과 세계와 나를 가로막는 벽에 아주 작은 문을 내고 싶다는 마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사소한 노력.


이 포스팅을 쓰고 있는 날은 여성의 날이었고, 백년보다 더 오래 전부터 여성노동자들이 쌓아 올려온 것들은 그렇게 사소하고 작고 하지만 끈질겨서 위대한 것들이었음을 믿고 있다. 



덧,

광화문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 사거리에서 어떤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에게 작은 메모와 노란 장미를 나눠주고 있다. 모처럼 햇빛이 좋은 날 꽃을 들고, 거리를 걸으며, 세상에 주눅들지 않는 여성들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