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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걸 우짜노 - 부르지 않으면 <아스라이> 사라질 것들

좋은 걸 우짜노

부르지 않으면 <아스라이> 사라질 것들

 

누구의 인생에나 몇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데 내게만은 도무지 오지 않는다. 난 언제든 기회가 오면 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 모양인 건 도통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태어나면서부터 기회를 잡은 사람들을 본다. 흔히 금수저라고 부르는 사람들. 별다른 노력 없이 나보다 훨씬 앞에서 출발하는 사람들. 태어나기도 전에 기회를 잡은 사람들도 있다. ‘재능’.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이미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금수저에겐 불공정하다며, 사회가 잘못됐다며 욕이라도 한바가지 퍼부어주겠지만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이들에겐 뭐라고 욕도 할 수 없다. 어떤 이들에겐 우연찮은 기회도 오는 것 같다. 인맥, 학연, 혈연.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기회는 나에게만은 오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월급쟁이고, 난 지방의 삼류대학을 나왔다. 그렇게 욕만 하거나 욕도 하지 못하다 어느새 삶은 아스라이 지나간다. 기회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 좋은 걸 우짜노

 

<아스라이>는 대구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청춘의 이야기다. 주인공 상호는 우연히 고등학교 후배의 부탁으로 영화의 제작 프로듀서를 맡은 뒤 영화에 빠져들었다. 고교졸업 직전 무작정 만든 영화가 우연치 않게 그럭저럭 인정받은 후, 서른이 다 되도록 안팔리는영화를 만들고 있다. 뒷걸음질에 쥐를 잡아 주인에게 칭찬을 들은 소는 아마 평생 뒷걸음질만 치게 될테다. 갈으라는 밭은 갈지 않고. 그러나 쥐를 잡는 재능은 소가 아니라 고양이에게 내리는 법이다. 다시는 칭찬을 받지 못한 상호도 영화판을 전전한다. 돈도 벌지 못하고 제 앞길도 찾지 못하면서, 계속 뒷걸음질치는 소처럼 미련하게. 그런 미련한 인생이 십여 년, 어느 날 술자리에서 영화를 함께 만들던 후배는 얄미운 충고를 던진다. “형은 영화 그만 만들어, 잘 찍지도 못하면서”. 상호는 여전히 미련스럽게 대답한다. “좋은 걸 우짜노, 그냥 해야지.”

 

상호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다. 기다리는데서 멈추지 않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지 못해 영화를 못만드는 것일까 자문하다 대학의 영화 동아리를 찾아갔지만 콤플렉스만 더 심해질 뿐이다. “타르코프스키 작품 중엔 어떤 걸 좋아해요?”. 도대체 타르코프스키는 어느 나라에서 뭐하는 사람인 걸까. 도무지 되는 일이 없는 상호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고 지방에 살기때문에 서울에 집중된 문화적 수혜도 먼 얘기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재능이 없다. 그런 주제에 영화를 찍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만큼 영화를 좋아한다. 좀 덜 좋아하면 그만두기도 쉬울텐데.

 

총체적 난국을 미련하게 버텨내는 상호의 삶을 안쓰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보자면 문득 떠오른다. ‘나도 무엇을 저렇게 좋아했는데’. 돈이 없거나 재능이 없어서, 여건이 좋지 않아서,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어느새 사라지고 잊힌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시를 쓰고 싶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축구를 하고 싶었고, 매일매일 치킨을 한마리씩 먹을 수 있는 치킨집을 운영하고 싶었는데. 그 때로 다시 돌아갈 기회만 있다면 다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이 있는데. 이제는 입 밖으로 발음하는 것조차 민망해진 이라는 단어가 내 생활의 한구석에 생생히 꿈틀거리던 때. 어쩌면 여전히, 아직도.

 

상호에게도,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금수저가 아니었고 이렇다 할 재능도 없었다. 재능있는 이들을 일발에 역전할 찬스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상호는 아직 거기에 남았고 돌아보니 당신과 나는 떠났다. 상호는 좋은 걸 우짜노라고 말했고 우리는 좋지만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했다. 그뿐이다.

 

# 부르지 않으면 아스라이 사라진다

 

유행처럼 번지는 청년 세대라는 말은 얼마나 허망한가. 이 도시에선 서른 아홉 살까지 청춘이라는데, 저 도시에선 서른 살이면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고 한다. 알량한 숫자놀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청춘의 기준이라는 것은 사실 기회. 청춘은 꿈을 유예할 기회가 사라지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어느 날 이라는 단어가 생경하게 들리고 입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워진 날,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무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날, ‘좋은 걸 우짜노라고 말하기 보다 좋지만 어쩔 수 없잖아를 말하게 된 날 청춘은 끝난다. 삶과 꿈을 유예할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봄. 아직 뜨거운 성장의 여름도, 풍요로운 수확의 가을도 오지 않은 시작의 봄. 청춘이 시작의 의미라면 청춘의 시간엔 다음을 기대할 수 있다. 아직 꿈을 품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은 시절. 봄에 시들어버린 꽃들이 썩어 여름의 열매에게 양분이 돼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시절. 돈도 없고 재능도 없으면서 여전히 꿈을 유예하는 상호는 그래서 청춘의 한복판을 살고 있다. 상호가 청춘을 살고 있는 것은 그가 아직 미련스럽게 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상호도 나이를 좀 더 먹으면 결국엔 영화 만들기를 포기할지 모른다. 재능없음에 절망하고, 가난에 무릎꿇고. 결국 어느 회사의 영업사원이 돼 넥타이로 목을 옥죄고 사장님들의 비위를 맞춘 대가로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혹은 갑자기 터진 대박에 유명한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겠다. 상호가 붙잡고 앉았던 청춘의 시절이 그를 어디로 데려갈 줄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꽃이 피었다고 봄이 아니듯, 꽃이 졌다고 봄이 아닌 것도 아니다. 봄은 봄이라고 부를 때야 비로소 봄이다. 청춘을 청춘이라고 부를 기회, 꿈을 부둥켜잡고 지질거리며 매달리다 꺽꺽 소리내 울 수 있는 그 기회의 시절만은 당신과 나와 상호에게 모두 있었다. 재능이나 재력따위로도 살 수 없던 그 기회의 시절. 우리가 흔히 기회라고 부르는 것들은 우리에게 영 오지 않지만, 우리가 기회인줄도 모르는 순간을 우리는 직접 만들 수 있다. 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아스라이 사라지듯 그 기회의 순간들도 우리 삶에서 아스라이 사라진다. 청춘은 청춘이라 부를 때야 비로소 청춘이다. 기회는 당신이 기회라고 불러야 비로소 기회다.

 

# 청춘의 클리셰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타르코프스키를 모르던 대구의 영화소년, 공모전에서 300번이나 탈락한 재능없는 영화감독, 안될 걸 알면서도 오기로 꿈을 부여잡고 청춘을 유예한 미련퉁이. 그리고 마침내 <아스라이>가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길고 짧은 30편의 영화를 만든 후 첫 개봉작이었다. 감독의 나이 서른 살이 되는 해였다.

 

김삼력 감독은 청춘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했다. 푸르지도 않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는 내도록 흑백이다. 거무튀튀한 화면에서 상호는 내도록 울고 다치고 좌절한다. 푸른 빛, 쏟아지는 햇살, 활기차고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죄다 청춘의 클리셰라고 주장하는 감독의 투박한 말이 영화에서 고스란히 들린다. 그 투박함은 영화의 만듦새도 다소 투박하게 만드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 투박함의 열정이 김삼력과 상호를 여전히 대구의 독립영화 바닥에 놔두고 있는 것일테니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