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아무말 아무말 아무말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아무말 아무말 아무말

“그래서 청년의 문제가 뭔데?” 물으면서 <아무말 큰잔치>를 시작했다. 청년 문제를 주제로 매달 15매의 원고를 써내라는 도무지 무리한 청탁을 받았고, 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는 말로 첫 회 원고를 때웠다. 써놓고 보니 너무 아무말이나 지껄인 것 같아 내친김에 코너 이름도 <아무말 큰잔치>로 지었다. 지난 29호에서 시작했고 이 원고는 아마 40호에 실리게 될 테니, 1년 동안 그렇게 아무말이나 막, 그리고 잘 떠들어댔다. 아무튼, 지나 생각해보니 (실은 구색을 끼워 맞춰 보니) 코너 이름을 잘 지었구나 싶다.

애초의 기획의도였던 청년의 문제란 어쩌면 우리가 언어를 상실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아닐까. 400자의 트위터, 사진과 해시태그의 인스타의 세계에는 담을 수 없는 긴 이야기. 진지충의 오글거리는 이야기. 설명충의 따분하고 재미없는 이야기.

얼마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자기의 ‘배우론’을 이야기하던 젊은 배우에게 면박을 주던 진행자들을 봤다. ‘오그라든’ 손발을 내밀면서 “혹시 아직 싸이월드 하세요?”라고 묻더라. 그러게, 싸이월드를 하던 때만 해도 우린 사이좋은 사람들과 함께 오글거리는 이야기를 지금보다는 많이 나눴다. 삶이 어쩌고, 세계가 저쩌고. 내가 처음으로 PC통신이라는 걸 시작했을 땐 더 했다. 그때 파란 바탕의 ‘BBS’에서 만난 누나와 형들은 짤방 한 장, 3분 순삭되는 요약으로는 차마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떠들고 욕하고 싸우고 그랬던 것 같다. 원고지에 눌러쓴 주의와 주장을 투고하고 연애편지에 마음을 담던 시대는 더 진지하고 오글거렸겠지. 시대는 변하고 기술은 발달하고 거기에 맞춰 사람도 취향도 트렌드도 변해가겠지만 그 흐름의 방향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언어를 잃어가는 과정’이겠다.

오글거린다는 말이 나온 게 언제더라. 그 말이 나온 후부터 우리는 진지한 이야기를 견딜 수 없게 된 것 같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인터넷이 가장 빠른 나라가 된 이후 텍스트의 자리를 이미지가 차지하게 된 것 같다. 긴 글을 올리고 삭제당하지 않기 위해 올리던 ‘짤림방지용 사진’이 이제 긴 글을 대신한다. 스마트폰과 트위터가 등장하자 400자가 넘는 글은 길다며 읽지 않는다. 조금 진지한 글이 올라오면 ‘진지충’, 조금 긴 글이 올라오면 ‘설명충’이라는 놀림이 따라붙는다. 쿨과 담백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사유의 언어는 유실됐고 비디오와 스킵과 유동성의 세계에서 텍스트에 정주하며 행간을 비집는 상상력의 언어는 도태됐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언어는 상실했다.

저마다 힙스터가 되겠다고 하지만 정작 몰개성화하는 일이란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의 언어로 자기를 피력하지 못 하는 일이다. 수십 명이 같은 장소에 모여 비슷한 옷을 입고 모두 똑같이 급식체로 말하는 게 무슨 힙스터야. 타자를 혐오하는 일은 타인과 주고받는 언어가 사라진 일이다. 타인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리 없다. 생리휴가를 말했더니 군대나 가라고 말하는 빈약한 언어 말이다. 세계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그 단순한 논리에 끼워 맞추지 못한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광기도 마찬가지. 그의 언어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선과 악만이 있고 우리 편이 무조건 좋은 편이라는 단순한 세계의 단순한 언어.
과거로 돌아가자, 스마트폰을 파괴해라, 옛날이 좋았어, 20대 이 ‘멍청한 개새끼’. 이런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러다이트 운동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쿨과 담백, 편의와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위해 무엇을 버렸는지 상기해 볼 일이라는 거다.

우리는 ‘아무말’을 떠들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말’을 떠들어야 한다. 나는 청년의 문제는커녕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심지어 내 문제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떠들어야 한다. 나는 아무말을 떠들고 그걸 들은 당신은 내게 욕을 한 바가지씩 던져야 하고, 난 발끈해서 또 아무말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호작용이 쌓이고 쌓여야 우리는 서로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될 거다. 세계에 대해 질문하고 주장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3분 순삭을 위해 편집하고 잘라내는 자투리들에 실은 진실이 담길 수 있고, 400자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더 진지하고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삶의 비밀 같은 게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진지하고 장황하고 느끼하고 오글거리는 아무말을 던져야 하고 그걸 견뎌내야 한다. 한없이 빈궁해지는 언어를 채우는 것만이 나와 당신과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 일이다.

예전에는 아무도 자기를 잉여라고 부르거나 바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자기를 땡중이라고 부르는 스님들을 보면 대단한 고승대덕처럼 보이기도 했다. 요즘은 다들 자기를 한없이 가벼이 여기고 잉여라고 여기니까,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만으로라도 아무말을 내뱉으며 조금 더 진지해지고 조금 더 허세를 부려보자. 진지충이라고 불리면 어떻고, 오그라든다고 놀림 받으면 또 어떤가. 사실 요즘 같을 때라면 그게 바로 힙스터다.

모쪼록 쓸데없이 진지하고 괜히 아무말이나 지껄이는 졸고에도 1년이나 지면을 내준 워커스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그 아무말을 읽으면서 작자에게 욕설 협박 메일 한 번 보내지 않은 선량한 독자 제현들껜 더 큰 감사의 말씀을. 우리 더 허세 부리고 더 진지하게 삽시다. 그럼 전 안티에이징과 보습에 바빠서 이만. 코 찡끗.




[워커스 40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죠?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죠?


박제. 철거되거나 주인이 이사 간 빈집 앞에 쌓인 쓰레기 무더기를 보면 가끔 박제들이 섞여 있다. 한때는 살아있었을, 그 이후에도 어느 부잣집 서재에서 자태를 뽐냈을. 하지만 버려진 박제는 흉물스럽다. 박제된 것들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이다. 썩어야 할 때 썩지 못한, 썩어서 새로운 것들의 시작으로 돌아가지 못한 흉물. 눈을 부릅뜨고 쓰레기더미 안에 처박힌 것들은 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나요. 방부제를 아무리 발라도 시간은 흐른답니다.

# 1987

<1987>이 개봉하기 몇 년쯤 전이었던 어느 술자리에서, 왕년에 짱돌깨나 던지고 소주병에 신나 좀 부어봤다는 아저씨들과 함께 있었다. “우리가 86학번이야. 이한열이랑 동기라고.” 운동권 사투리를 (일부러 더) 구사하는 그들 사이에 앉아서 맞장구를 열심히 쳤다. “우와, 역시 선배님들.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맞장구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난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그들에게 난 투표도 안 하고 데모도 똑바로 못하는 ‘개새끼 20대’였다가, 지금은 N가지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불쌍하고 방황하는 30대가 됐다. 치열하고 뜨거웠고 가슴 벅찼던 그 거리에 나는 없었다. 난 그들이 만들어놓은 역사의 자장 안에서 태어나 그 역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의무를 지닌 청년으로 존재하다, 의무를 망각한 ‘20대 개새끼’가 되어 소주잔을 들고 맞장구나 칠 수밖에 없었다.

난 <1987>이 사실 꽤 불편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운집에서 어떤 이는 여전히 기억이 생생한 그날을 떠올렸겠고, 어떤 이는 그를 계승한 2016년의 겨울을 떠올렸을 테다. 그 연상이 눈물로 이어졌겠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연관 지어지지도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미지였다. 민주주의를 열망한 대중들, 함께하는 대중들이 엮어낸 승리, 역사의 발전.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의 승리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민주주의의 사회에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박제’라는 말을 떠올렸다. 가슴 벅찬 영광의 시절이라는 이미지는 87년 이후의 불민한 민주화를 망각시킨다. 스크린은 단면이다. 관객은 감독이 전시하는 스크린 한 면만을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87년을 상찬하고 그 감격과 영광을 재현하는 서사를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시하는 감독의 세계는 어쩌면 너무 조악했다. 감독은 그날의 역사에서 스크린에 보여줄 만큼에만 방부제를 발라 관객들에게 배달했다. 역사를 박제시키는 일.

어쩌면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도 박제의 작업에 동참했다. 역사를 박제하는 일이란 과거의 축적이 주조한 현재를 함께 박제하는 일이다. 오늘과 어제를 분절하는 일. 나를 앞으로도 계속 ‘20대 개새끼’나 N포의 30대로 치하는 일. 나를 그 기분 더러웠던 술자리에 계속 남아있게 하는 일. 결국, 방부제를 치덕치덕 발라 어느 골방에 전시해 두었다가 귀찮아지면 버리고 떠나는. 박제된 과거는 내일을 빚지 못한다. 오늘을 살면서 과거에 붙잡힌 망령으로 살 수밖에.

# 2018

그 아재들을 가장 많이 만난 건 지난 겨울의 광화문이었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그들은 ‘씨XX’, ‘병XX’, ‘닭대가리’를 연신 외쳐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그들은 (혹은 그들 중 일부는)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지금은 대통령이 된) 유력한 대선후보를 향하는 모든 비판에 일일이 날을 세웠다. “이제 민주진보 정부가 탄생했으니 잠자코 기다리면 다 좋아질 거”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여성과 인권을 이야기하면 프로불편러가 됐고 노동을 이야기하면 노동적폐, 수구좌파가 됐다. 대의제 이후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 철모르는 ‘정알못’이라고 불렀다. 박제된 과거, 호헌을 철폐하고 직선제를 쟁취하던 시절에 방부제를 바른 채 그 다음의 것들은 모두 망각해버린 듯. 감격과 영광의 덧칠 앞에서 오늘의 비극은 중요하지 않다. 아직 감옥에 있는 한상균도, 굴뚝 위의 노동자들도 중요하지 않다. 그보단 영광의 시절을 재현하며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그 영광의 시절에 적이었던 이들을 굳이 끄집어내며 자기연민에 빠진다. 하지만 오늘은 2018년이다.

2018년은 1987년을 딛고 있다. 87년의 성과, 과오, 한계가 뒤섞여 자라다 시간이 지나 땅에 떨어지고 썩어서 2018년의 거름이 된다. 2018년도 또 썩어서 후일의 거름이 되겠지. 역사는 분절돼 있지 않고 흐르고 썩고 다시 태어나는 생태계 같은 거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에 방부제를 치덕치덕 발라 박제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만화 <슬램덩크>의 한 장면. 주인공 강백호는 감독에게 영광의 시절을 물으며 말했다. “내 영광의 시절은 바로 지금”이라고. 내 영광의 시절은 어쩌면 지금이거나 아니면 나중이거나. 어쨌든 1987년은 아니다. 당신들 영광의 시절을 전시하느라 나의 시간과 역사를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워커스 39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연애편지 잘 쓰는 법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연애편지 잘 쓰는 법



모든 말과 글은 사실 모종의 연애편지다. 내 마음을 너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또는 네 마음을 얻고 싶어서. 그래서 대부분의 글은 사랑을 과장하고 나를 부풀린다. 모든 연애편지가 그렇듯이. 어느 때는 위악을 떨기도 하고 저주와 증오의 말만 늘어놓기도 한다. 원래 연서라는 게 그렇지 않나. 한없이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오롯이 자기를 드높이고 싶은 허망 사이의 애절한 줄타기.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어요. 당신을 설득하고 싶어요.

근래에 쓴 글 중에 가장 많은 오해의 소지를 남겼던 건 지난 호 《워커스》의 아무말 큰잔치다. ‘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라는 제목이었다. 글을 쓴 애초의 목적은 어딘가 어긋나고 있는 것 같은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적이었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또 다른 혐오가 실행되는 일, 그 혐오가 폭력을 발생시키는 일, 그 혐오와 폭력에 대한 비판을 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일에 대한 지적. 그 글이 본래의 의도대로 여러 독자에게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글의 첫 독자로서 분명한 문제를 발견하고 반성해야 했다. 과한 감정, 비아냥, 충실하지 않았던 설명, 왜곡의 여지를 남겨둔 비유와 수사들. 무엇보다 진지하고 본격적이지 않았던 생각. 의도가 선했다고 변명할지언정, 몇 줄 되지 않는 글에서 내 ‘선한 의도’를 읽어달라고 (글쓴이가 직접) 사정하는 것은 얼마나 꼴사나운 일일까. (사실 지금의 이 비루한 고백도) 마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넌 왜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느냐고 징징거리던 스무 살 언저리의 연애편지처럼. 그때도 난 유려한 말로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데 집중하고 과잉된 감정의 언어로 내 사랑을 과시하려는 데 몰두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연서를 쓰면서도 난 그녀를 맨 먼저 생각하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말과 글이 범람하는 시대다. 하루에 인터넷에 유통되는 정보량이 제타바이트 단위를 가뿐히 넘어선다. 제타바이트라니. 그러나 이 수많은 말과 글은 발신자가 의도한 본래의 목적대로 수신자에게 가 닿았을까. 마음이 전달돼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충실한 설명으로 누구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었을까. 집회 현장에서의 그 수많은 발언은 그들이 말하는 ‘동지’들에게 가 닿았을까, 아니면 거리를 지나는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온라인에 범람하는 수많은 말의 편린은 또 어떤가. 누군가를 조롱하려는 목적, 아님 말고 식의 유언비어.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 제 눈에만 맞는 안경을 쓰고 보는 확증편향. 기사라고 해서 다를까. 오프라인에서 우리가 지금 서로 주고받는 말은 또 얼마나 다르겠나. 그저 모두 나를 과시하는 말, 너에 대한 감정이 과잉된 말, 조악한 은유와 비유, 애초의 목적을 망각한 비아냥. 이런 것들로 정말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을까.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말과 글은 무슨 의미일까. 그야말로 아무말 큰잔치.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중략)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독창적인 비유와 은유, 감정을 드러내는 언어는 사실 화자의 의도를 왜곡할 뿐이다. 사실에 충실한 묘사를 위해서 대상을 성실하고 솔직하게 관찰하는 것, 나의 감정을 강변하는 표현보다 대상을 올곧게 그려내는 표현을 찾는 것. 좋은 말과 글이란 그런 것일 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연애편지도 그렇게 쓰이겠지.

그럼에도 ‘사실’과 ‘진실’에 도달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말하고 쓰는 이의 생각과 감정을 읽고 듣는 이에게 온전히 전달하기도 어렵다. 사실 마음을 전달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서로 다른 사람인걸. 지젝은 그래서 “수신자에게 온전히 도달하는 편지는 차라리 부치지 않은 편지”라고도 했다. 쓴 사람 본인이 아니고서는 편지의 내용이 타인에게 어차피 제대로 전달될 리 없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싶다. 당신에게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고, 당신이 내 생각에 동조해주길 원한다. 설득하려 하고 설명하려 한다. 그렇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설명충.

다시, 모든 말과 글은 모종의 연애편지다.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고 내 마음을 당신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하는 일.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는 안간힘. 소통의 노력. 나를 부풀리지 않고 솔직하게 내보이는 일, 대상을 가감 없이 관찰하는 일, 그리고 사실에 충실한 묘사. 어차피 안될 것을 알지만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건드리려고 하는 노력. 연애편지를 써야겠다. 어차피 난 설명충이니까. 성실하게 관찰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서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마음을 다해. 스무 살 때보단 좋은 편지를 써야지.


[워커스 38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최근에 목격한 몇 가지 일로 혼란스러워졌다.

 

#1

그리 친하지 않은 지인 A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얼마 전 공중화장실에 적힌 낙서에서 어느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화장실 담벼락의 낙서가 가질법한 악덕에 매우 충실한 낙서다. 번호의 주인은 남성일 것으로 추정됐다. 그녀는 그 전화번호를 저장했고 저장된 전화번호는 번호 주인의 SNS계정으로 이어졌다. A는 그 SNS 계정의 화면을 갈무리해 자신의 SNS에 공개했다. 번호 주인의 SNS를 공개하면서 A는 그를 ‘몰카범’으로 지칭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가 몰카범이 아닐 가능성, 그 번호의 주인이 그의 신상을 파악한 이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피해자가 될 가능성에 대해 지적하자 그녀는 “그에게 해명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몰카 범죄는 나쁘다.

 

#2

한서희라는 연예인 지망생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 이런저런 사건들로 유명해졌다. 유명한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인권에 대한 게시물을 자신의 SNS에 종종 올리다보니, 그녀에겐 꽤 많은 메시지들이 도착했던 것 같다. 한 씨는 자신의 SNS에 몇몇 트랜스젠더로부터 “트랜스젠더도 여성이니 우리의 인권에 관한 게시물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트랜스남성(FTM)이 보낸 것도 아니었을 텐데, 왜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고 굳이 답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가끔 SNS는 인생의 낭비다.

 

#3

지인 B가 지하철 안에서 화장을 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SNS에 썼다.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 다른 여성이 ‘여자의 자존심’을 운운하며 지하철에서 화장을 해선 안 된다고 면박을 주었고 그 면박은 다른 승객들이 ‘남 이사 어디서 화장을 하든 무슨 상관이냐’며 제지하고 나서면서 멈췄다는 일화. 댓글에서 다른 지인 C는 화장을 할 때 나는 냄새가 불편하니 공중의 공간에서 화장을 하는 건 지양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내놨다. 여성에게 화장을 강요하는 구조적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있었다. “모두 화장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결론이 나려던 찰나, 새로운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남 아재들이 등산복 입고 막걸리 냄새를 피우는 건 어쩔 거냐”는 요지의. “화장에서 무슨 냄새가 나냐”고 묻는 댓글도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역시 SNS는 가끔보다 더 자주 인생의 낭비인 것 같다.

 

# 그게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여성주의를 ‘따듯한 마음’이나 ‘위로의 말’ 같은 걸로 정의했었다. 물론 학술적으로도, 또 운동적으로도 정확한 정의는 아니겠다. 다만 여성주의 텍스트들을 읽고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지위를 발견하고, 차별받는 장애인들로부터 배제된 여성의 존재를 인식하는. 그렇기 때문에 시혜나 연민이 아니라 손을 내고 연대함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여성주의의 본질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여 여성주의 운동은 모든 폭력과 차별과 배제에 저항하며 소수자에 연대하고 어떤 존재도 지워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 여러 논쟁들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틀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궁과 유방을 달고 태어난 여성만을 챙기는 것이 여성주의라는 주장,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때문이라는 단편적인 시선. 저항을 빙자한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생산해내는 지긋지긋한 악순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는 어떤 언어도 배우지 않은 상태고 가장 위험한 존재는 단 한권의 책만을 읽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내가 도무지 뭘 모르기 때문일까. 정말 그게 여성주의 인가요?

 

사실 ‘진짜 여성’을 운운하는 건 ‘진짜 남자’를 빙자하는 남근주의의 거울상에 불과하다.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남성에 의한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면 다른 이들의 ‘존재의 확인’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조롱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 아주 간단한 논리. 누구도 때릴 수는 없다는 주장을 하려면 당신도 누구를 때리면 안 된다. “쟤가 날 때리는 건 싫지만, 내가 널 때리는 건 상관없어. 넌 맞아도 싸니까.”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김치녀를 욕하면서 화장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한남충과 다를 건 뭔가. 피해는 다른 피해를 양산할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니다.

 

사실 이번 원고를 쓰기 시작할 때는 조금 화가 나 있어서 “페미니즘을 자처하기 위한 이들은 시험이라도 봐라”같은 뻘소리를 지껄여볼까 생각도 했다. 990점 만점의 페미니즘 시험에서 850점을 넘지 못하면 SNS에 관련 포스팅을 못하게 하는 법조항이라도 만들자는 아무말 큰잔치. 하지만 조건이 붙은 권리는 권리가 아니다. 아주 피곤하고 복잡한 일이지만 인권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속시원하자고, 불편하다고 멋대로 괴롭히고 죽이면 안 된다. 운동의 역사는 그 다짐을 공고히 해온 논의의 축적이다. 나도 그래서 시험보자는 얘기 결국 안했잖아.

 

당신들이 페이스북 안에서 그린 여성주의가 정말 여성주의인지 모니터 밖의 세상을 보라.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당신의 삶은 '스튜핏'하지 않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당신의 삶은 '스튜핏'하지 않다.


‘스튜삣’ 소리에 들고 있던 치킨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야밤에 혼자 1+1 두 마리 치킨을 먹으면서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통장에 얼마가 남았는지 걱정하면서, 동시에 얼마는 남았으니 치킨은 1마리보다 2마리를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고 고독한 뚱땡이의 길.

엄마는 늘 말했다.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사고 싶은 거 다 사면서 언제 집사고 언제 장가갈래?” 사실 내가 장가를 못가는 건 비단 집이 없고, 돈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설명하기 너무 구차해서 앞으로 아껴 쓰겠다고 대답했다. 결혼은 뭐 혼자서 하나.

월세방을 구하러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한 선배가 “이 김에 대출을 받아 집을 사거나 좀 큰 전세를 얻으라”고 했다. “열심히 일하면서 차근차근 갚으면 대출금은 금세 갚을 수 있다”면서. 대출금을 갚기는커녕 대출을 받기도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순진하고 해맑은 사람이라고 (좋게좋게)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 좀 짜증이 났던 건 이제 지난 일이니까 뭐.

‘스튜핏’과 ‘그레잇’이 유행이다. 사람들이 보내온 영수증으로 재무상담을 해주는 팟캐스트 <김생민의 영수증>은 그 인기에 힘입어 공중파 방송까지 진출했다. 스튜핏과 그레잇이라는 유행어를 배출한 이 방송은 근래 가장 핫한 프로그램이다. 20여 년의 방송 생활 동안 근검절약과 저축, 재테크의 달인이라는 이미지를 쌓아온 김생민은 커피를 마시지 말고, 야식을 먹지 말고, 가죽점퍼를 사지 말고 그 돈을 모아 저축을 하라고 말한다. 차근차근 성실하게 내일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삶을 예찬한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대신 작은 성취를 이루고 다시 조금 더 큰 목표를 설정하는 순리의 삶을 권장한다.

“우리는 ABCDEF로 F에 도착하기 위한 과정을 밟습니다. 이건 정말 중요해요. 0.01%의 친구들이 A라는 행위를 하고 F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에 접근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마치 계단을 밟듯 차근차근 가야 우리의 열매를 지킬 수 있고 수확이 지속 가능합니다.”

김생민은 영수증을 보내오는 사연 신청자들에게 조금씩 노력하면 목표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고 격려한다.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칭찬한다. 눈앞의 작은 목표를 실천하면서 큰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는 설득이다. 사람들은 그런 김생민의 격려와 위로, 위트있는 설득에 열광한다. 실제로 그는 길었던 무명의 시절을 딛고 타워팰리스를 산, 살아있는 재테크의 증거물 아닌가. SNS에는 김생민의 격려와 질타에 감응한 이들의 고백이 수두룩하다. 고독한 뚱땡이의 길을 걷고 있던 나도 들고 있던 4개의 닭다리를 보면서 ‘나 혼자 먹는 야식에 왜 닭다리가 4개나 필요한가’라고 자괴해 버렸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노력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걸까? 닭다리 4개를 포기하면 난 월세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이번 겨울을 조금만 더 춥게 지내면 난 장가를 갈 수 있나. 고양이 치약을 사지 않으면 난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 그건 ‘뽕’이잖아

이 방송이 유행한 후 한 언론은 <김생민의 ‘절실함’이 2017년에 빛을 발한 이유>라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어쩌면 ‘이번 생은 망했다’는 비관이 팽배한 시대가 가고, 성실이 미덕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돌아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헬조선, 비정규직, 탈조선의 정서가 지배하던 시대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노력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땀과 인내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희망의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김생민 현상은 그 전조와도 같다는 것. 희망과 노력, 땀과 인내라는 말은 참 아름답다. 근면하고 성실하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고 힘을 내고. 아침이면 택시 대신 지하철을 타기 위해 1시간을 일찍 일어나고. 음. 어디서 많이 보던 얘기인 것 같은데.

사실 어쩌면 김생민의 ‘절실한 노력론’은 그냥 다시 새마을운동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얘기와도 크게 다르지 않고, 요즘 것들은 노력을 안 한다는 꼰대들의 얘기와도 맥이 통한다. 다만 이젠 포기마저 지긋지긋한 이들의 자기 위안이랄까. 일종의 ‘뽕’이다.

유수의 명문대를 나와서 굴지의 대기업에서 그럴듯한 연봉을 받는 한 친구의 얘기를 빌어보자. 대학을 졸업한 27살에 취업해 8년 동안 열심히 적금한 그 친구는 현재 통장에 4천만 원의 잔고가 있다고 했다. 4천만 원에 가까운 연봉으로 시작해 지금은 5천만 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다는 그는 술도 잘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차도 없고, 집도 없다. 가끔 맥주 두 캔을 사 들고 야구장에 (심지어 가장 싼 외야석에 앉는다) 가는 게 취미의 전부라는 친구는 ‘마흔 전에 자기 명의의 집을 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친구무리 중 가장 먼저 취업에 성공한 그가 ‘집을 사겠다’는 목표를 처음 얘기했을 때 우리는 모두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한 달에 200만 원을 저축하면 1년이면 2,500만 원이니까 10년만 모으면 3억 원, 대출을 조금 끼면 그래도 서울 변두리에 작은 아파트 하나는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8년이 지나 아등바등 4천만 원을 모은 그 친구는 여전히 집을 사는 게 목표하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김생민도 김생민의 방송을 듣는 이들도 커피값을 아끼고 택시비를 아껴서 집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다. 그건 그저 위로고 격려다. 그보다는 유희거나 자조일 수도 있고, 희망이나 긍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뽕’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 외통수 같은 세상을 견뎌내기 위한 작은 마취제. 대마초도 못 피우게 하는 나라에서 이런 ‘뽕’은 참 잘도 권장한다.

# 우리 보통의 삶

재테크 노하우 전수라는 ‘뽕’의 기능 말고 사실 김생민이 진행하는 방송의 의미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보통’이 무엇인지 던지는 질문의 기능이다. 김생민은 방송마다 “깊이 생각해보라”고 한다. 커피에 대해, 옷에 대해, 다이어트에 대해, 고양이 치약에 대해, 감자칩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 당신을 정말 행복하게 해주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김생민은 그런 사유를 ‘그런 소비는 당신의 말초신경을 잠시 자극해 쾌락을 줄 뿐 실은 행복이 아니’ 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커피 마실 돈을 아껴서 저축하면 월세에서 반전세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고, 당장의 소비를 참으면 내일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삶의 행복을 ‘집을 사고 돈을 모아 결혼하고 노후를 풍족하게 보내는 것’이라 규정한 전제에서 가능하다. “언제 집사고 언제 결혼할래”라고 묻는 우리 엄마가 제시한 삶의 ‘정상성’과 같은 전제다. 이런 삶의 전제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서민이 그리는 삶의 궤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기업에 다니며 10년을 숨만 쉬며 돈을 모아도 5천만 원을 모으기 힘든 세상에서, 그 고연봉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세상에서, 5천만 원으론 집을 사기는커녕 전셋값도 안 되는 세상에서 그런 삶의 지향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삶에서 오늘의 닭다리를 포기해 20년 후에도 있을지 없을지 모를 내 집 마련의 자금을 모으는 건 무슨 의미일까. 김생민에게 되묻고 싶다. 희망, 내 집 마련, 미래, 저축 같은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 보통의 삶은 모순된 욕망의 연속이다. 오늘의 닭다리를 외면하기 어렵지만 10년 후의 미래를 포기하기도 어렵다. YOLO가 유행하지만 그건 실은 되는대로 막 살라는 말에 가깝다. YOLO도 저축도 어려운 삶도 있다. 난 지난 《워커스》 기획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 사채시장과 장기판매 루트까지 알아봐야 하는 삶에 대해 쓰기도 했다. 다양한 삶의 양태는 다양한 욕망, 다양한 결핍, 다양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 욕망들은 모순되기도 하고 허황돼 보이기도, 때론 안타까울 정도로 절실해보이기도 한다. 그 모든 것들에 어떻게 스튜핏과 그레잇을 외칠 수 있을까.

20년간 스타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근면과 성실을 무기삼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김생민의 삶을 존경하고 또 응원한다. 그가 주는 위로와 격려로 내 얇은 지갑의 허전함을 잠시 달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차피 먹지도 못할 1+1의 치킨과 쓸데없을지 모르지만 큰맘 먹고 구입한 만년필이 주는 위로와 격려가 있음도 사실이다. 원래 야식과 선물의 의미는 길티플래져인 걸.

희망 같은 불온한 말로 서로를,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괜찮다. 미래 같은 불확실한 것 대신에 오늘의 즐거움을 따라도 괜찮다. 더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을 견뎌내도 좋다. 당신의 삶을 향해 “그레잇”이라 외치겠다. 그러니 갈팡질팡 아직 삶의 궤적을 정하지 못한 보통의 우리, 모순된 삶에 서로 “스튜핏”을 외치지도 말자. 우리의 삶은 고작 그런 것으로 어리석어지는 게 아니다.


[워커스 36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서울에서 집 구하는 이야기, 살면 또 삽니다만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서울에서 집 구하는 이야기, 살면 또 삽니다만


이사를 마쳤다. 땀과 먼지와 피로와 앞일에 대한 걱정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히고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짧았던 지방생활을 마치고 이사한 집은 석관동의 작은 옥탑방이다. 원래는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방이었는데, 주인아저씨를 잘 구슬려 보증금 700에 월세 30만원에 계약했다. 며칠 동안 혜리와 설현이 광고하는 앱을 주구장창 들여다봤다. 전국 모든 복덕방의 공적이라는 네이버의 <피터팬 카페>도 엄청 들락거렸다. 감히 500에 30으로 서울에서 방을 구하겠다고 나섰을 때 겪어야 했던 수모와 좌절, 체념과 납득과 극복의 대 서사시.

# 500에 30으로 한남동에 가보니

졸업한 학교가 있었던 한남동엔 아직도 친구들이 남아있다. 단골가게들도 여전하고.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했던 곳도 한남동이라 이번에 집을 구하면서 처음 찾은 곳도 이곳이다. 방구하는 어플을 실행했다. 방이란 방은 “다 있다”는 혜리의 말을 굳게 믿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방 2칸을 검색했더니 결과는 ‘0’이었다. 이럴수가.

현대차 정 회장님과 삼성 이 회장님이 거주하시는 한남동은 대표적인 부촌으로 알려졌지만 남산자락에 위치한 고지대에다 워낙 오래된 동네라 싸고 허름한 집이 많다. 대학생 때는 그 틈새를 이용해 자취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한남동에 낡았지만 넓고 깨끗한 집에서 처음 자취를 시작했다. 이슬람 사원과 보광동 도깨비 시장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골목 산비탈 사이의 집들엔 이주노동자와 젊은 사회 초년생들과 소규모 공장들이 가득했다.

내가 찾던 허름한 집들은 한남동-보광동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 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동네엔 빈집들이 늘어났다. 이미 노인인 집주인들은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은 쪽과 재개발로 경제적 도움을 받길 기대하는 쪽으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 대학생, 혹은 인근의 LGBT바나 유흥주점 종사자들로 구성된 세입자들은 집세를 올려주거나 떠난다. 십수년 전의 기억을 근거로 그럴듯한 집을 구해보려 했던 내 생각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르는 철부지의 철없는 망상이었을까.

# 500에 30으로 신월동에 가보니

강서구, 금천구, 양천구 같은 서울 서남부 지역은 서울에서 대표적으로 집세가 저렴한 지역이 . 그런 줄 알았다. ‘여기라면 그럴듯한 방에 살 수 있겠지’.

500에 30, 방 2칸의 조건에 기대보다 훨씬 많은 방이 나온다. ‘27개의 방이 있습니다’. 이제 신월동민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27개의 방 중 26개가 반지하 혹은 1층 같은 반지하, 또는 채광 좋은 반지하 내지는 습기 없는 반지하였다. 반지하에 살 순 없지.

‘반지하가 뭐 어때’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가정경제가 급격히 내리막길을 달려 집을 줄이고 줄이다 마침내 반지하까지 진출했던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등장한 바퀴벌레 무리가 식탁 밑을 유유자적 지나 내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을 때도 ‘지구엔 원래 인류보다 바퀴벌레가 먼저 살기 시작했다’고 여기며 괜찮았다. 지나가던 초딩이 창문너머로 빤스만 입고 누워 코를 골던 나를 구경할 때나, 술 취한 아저씨가 거실 창문에 오줌을 갈길 때도 참을 수 있었다. 창문 앞에 주차한 트럭의 배기가스가 집안으로 들어올 때쯤이었나, 침대에 곰팡이가 슬어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던 때였나, 습기가 가득한 방에서 처음 가위를 눌렸을 때였던 것도 같고. 아무튼 그 언저리 언제쯤 ‘반지하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번듯하게 찍어놓은 사진, 기대보다 넓은 방, 생각지도 못한 옵션, 저렴한 월세. 반지하 방에 붙은 이 좋은 조건들은 다 ‘반지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사람들도 알고 있는 거다. 반지하는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 반지하 방들에도 입주자들은 나타났다. 온갖 말로 세입자를 유혹하던 매물은 하나씩 계약종료의 딱지를 붙여 나갔다. 더 좋은 조건의 집을 구할 여유가 없는 사람, 그 방이라도 감지덕지 살 수밖에 없을 사람, 반지하의 그 ‘악덕’들을 감내하면서도 그 동네에 살아야 하는 사람, 혹은 반지하가 얼마나 살기 힘든지 아직 모르는 사람. 여러 이유가 있겠다만 반지하에도 사람은 산다. 가난이나 주거환경, 기본권 뭐 이런 말들을 떠올려봤지만 다 의미없는 말들이다. 그냥 그곳엔 사람이 살고 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하면서 분노할 일도 아니고 동정할 일도 아니다. 그냥 이 드넓은 서울 땅에 바퀴벌레와 곰팡이와 집안을 들여다보는 낯선 이들을 견뎌내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

# 사람이 산다

6년 전 처음 자취방을 구할 때 ‘보증금 500만원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500이 없어서 친구네 집에 얹혀 살거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번에 가까스로 얼마간의 보증금을 모아 (사실 빚을 내서)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는 ‘보증금이 2천만원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증금의 사전적 의미는 “어떻게 해도 모자란 돈”인 것인가.

초등학교 2학년, ‘슬기로운 생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인간의 기본적인 삶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배웠다. 가끔 살아가는 게 벅차거나 두렵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그건 대단한 고난과 역경을 만났을 때가 아니다. 월세 내는 날이 다가올 때, 통장 잔고가 0에 가까운 월급 전야에 배가 고플 때, 한겨울에 가스가 끊겼을 때. 그런 사소해 보이는 일들을 대면하면 ‘세상 무엇도 내 삶을 응원해주지 않는다’는 냉정한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다음날 월급이 들어와 치느님을 영접하면 또 잊힐 것들이지만.)

여하튼 이번에 구한 집은 매우 마음에 든다. 채광이 좋고 습기도 없다. 너른 옥상을 마당처럼 쓸 수 있고 빨랫줄도 무려 3줄이나 있다. 여긴 한남동처럼 힙한 동네가 아니지만 인근의 대학가엔 예쁜 카페와 맛집이 꽤 있다. 여긴 습하고 어두운 반지하가 아니지만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옥탑이다. 30만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월세지만 그 저렴한 월세를 위해 200만원이나 더 빚을 내야했다. 집은 늘 그렇듯 만족스럽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다음 월세날이 오면 난 또 ‘세상은 나를 응원하지 않는 것 같아’ 같은 생각이나 주억거리고 있겠고, 또 ‘2천만원만 더 있으면’ 같은 소리를 지껄이겠지. 그렇지만 분노할 일도 아니고 동정할 일도 아니다. 그냥 그곳에, 한남동이나 석관동이나 신월동이나. 반지하든 옥탑이든 루프탑이든. 그냥 사람이 산다.


[워커스 35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결국은 흔해빠진 먹는 이야기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결국은 흔해빠진 먹는 이야기

1.

며칠 전, 집에 동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해먹었다. 메뉴는 조개 술찜과 토마토 파스타였다. 시장에서 조개를 한 봉지 샀다. 소금물에 담가 해감을 하고 조개껍데기에 묻은 펄을 칫솔로 일일이 닦아냈다. 마트에 가면 세척은 물론 해감까지 완벽히 해서 포장해 놓은 ‘상품’들이 널렸지만 굳이 펄이 묻은 조개를 샀다. 우리 고장에서 나는 토마토를 골라 몇 시간 동안 졸여 소스를 만들었다. 냄비 앞에 서 있는 몇 시간 동안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먹는 사람들은 내 이런 고생을 몰랐겠지.

가급적이면 패스트푸드나 외식 대신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해 먹으려 노력한다. 직접 재배한 풀을 뜯어 밥상에 올리진 못하지만 되도록 가까운 곳에서 자란, 누가 어떻게 키웠는지 알 수 있는 풀과 고기를 쓴다.

회사 구내식당 벽에는 동학 교주 최시형이 남겼다는 경구가 붙어있다. ‘밥 한 그릇을 잘 먹으면 만 가지 일을 알게 된다.’ 먹는 일이란 결국 내가 자연에 의탁하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는, 밥 한 그릇은 결국 내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는 일이라는, 그러니까 일종의 생태주의 철학이다. 먹는 것을 생각하다 보면 공장에서 눈만 껌벅이다 죽어간 동물들에 생각이 미치게 되고, 산에서 채취한 나물의 성기고 거친 뿌리에 담긴 시간을 귀히 여기게 된다.

자본주의는 과정을 소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철저한 분업. 무엇이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를 감춰두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노동이 어디에 어떻게 투여되고 어떤 결과물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온전히 자신을 이루던 삶을 쪼개, 삶을 이루는 많은 것들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배달된다.

밥상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 자란 풀이 누구의 손에서 가공돼 어떤 곳을 거쳐 판매되고 어떤 방식으로 조리돼 지금 내 앞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음식을 해 먹는 노력은 소외된 과정에 다시 집중하려는 노력이다. 내가 먹는 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내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사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어른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밥상머리 교육’도 그런 의미였다. 농부가 여든여덟 번은 손길을 줘야 만들어진다는 쌀 한 톨의 이야기. ‘네가 먹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먹으렴.’

2.

수제 과자와 케이크를 파는 친구가 있다. 하루는 작업실에 놀러 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파티셰들은 죄다 우아하고 세련됐길래 걔도 그럴 줄 알았더니 밀가루 범벅에 손에는 화상 자국이 그득했다. 땀도 뻘뻘 흘리고. 가공된 이야기라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화 중 전설의 레전드는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민중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대꾸한 일이다. 사실 이 일화에서 팩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계급이 부여한 삶의 조건이다. 딱히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어도 귀족들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민중에게 ‘그럼 과자를 먹으라’고 말했을 테다. 그들에게 빵과 과자는 그저 하인들이 주방에서 들고 오는 것일 테니까.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어느 집에서 어떻게 태어나 무엇을 보고 배우며 자랐냐에 따라 사람의 의식이 달라진다. 교과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자유 의지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삶의 조건이 의식과 언어를 집어삼킨다. 밥상머리는 그런 의미다. 삶의 결을 만들어 주는 일. 매일 마주하는 것들, 삶의 가장 근본인 ‘밥’ 앞에서 건져 올리는 의식과 언어.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권력자들이 뭔가 특별히 의도해서 ‘빵이 없으면 과자를’이라고 말한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라났던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밥상머리엔 빵과 과자가 만들어지는 과정, 땀을 흘리며 밀가루를 반죽하고 오븐에 손을 데는 과정, 노동이 생략되기 때문이다.

3.

‘밥하는 동네 아줌마’를 운운했던 국회의원이 있다. 삼성의 법무팀에서 일하던 변호사 출신인 그녀에게 밥 짓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먹을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소외했고 먹을 것을 만드는 이들을 소외했다. 결국, 공산품처럼 예쁘게 플레이팅 된 파편만을 먹거리 전체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밥상머리엔 과정을 소외한 파편화된 세계만이 있다. 삼성 법무팀만 중요해 보이는,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의 마리 앙투아네트. 하여 그녀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실은 삶의 본질이고 그가 의존하고 있는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밥은 만든다고 하지 않는다. 밥은 ‘짓는다’고 한다. 짓는다는 건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도록 새롭게 일으키는 몸짓이나 모습이다. ‘먹고살다’는 말은 한 단어다. 띄어 쓰지 않는다. 삶이란 먹는 일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다.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입을 벌려야 하고 무엇이든 입안에 채워 넣어야 한다는 말이다. 먹는 이야기는 결국 가장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그만큼 삶의 근원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야기다.


[워커스 33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힙스터의 언덕, 몰취향의 고원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힙스터의 언덕, 몰취향의 고원

1.
언제였더라. 한창 ‘썸’을 타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어쩐지 80년대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땐 눈에 콩깍지가 씌인 탓인지 ‘참 우아한 휴일을 보내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 음악을 틀어놓고 책장 청소를 하다 만화책을 한권 집어 들고 먼지구덩이 위에 벌러덩 누워 낄낄거리고 있는데 ‘굳이 솔직하게 일상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음악 들으면서 책 읽고 있다”고 대답하다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혹은 ‘정말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2.
어느 카페에 앉아 있는데 음악 선곡이 너무 대중없었다. ‘다양한 스펙트럼’이라고 말하기엔 나오는 음악들이 너무 조야했고, 카페의 컨셉으로 이해하기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손님들의 취향에 맞춘 것이라기 여기기엔 손님은 내 일행들뿐이었고. 도대체 뭘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친구가 너무 손쉽게 답을 알려줬다. “멜론 인기차트 100”. 이런 빨간 맛.

3.
살며 가장 어이가 없었던 때는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동영상을 영화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투덜거리고 있는데 눈물 콧물을 다 뺀 일행들이 내게 “재수없다”고 말했다.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한다느니, 어설프게 평론가인 척을 한다느니, 천만이 넘는 사람들을 다 바보로 여긴다느니, 영화를 판단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다 듣고 나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건, ‘이게 정말 재미있어?’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천만관객 영화를 두 편이나 만든 감독이다. 그의 다른 천만관객 영화도 영화라고 부르긴 어렵다.)

얼마 전에 ‘힙스터 체크리스트’가 세간에 떠돌았다.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찰스 부코스키를 읽고, 강원도 양양에서 서핑을 즐기거나 대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야 힙스터다. 사람들은 경리단이나 해방촌 같은 ‘힙한 동네’에 몰려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케아에서 가구를 사고 방송에 나온 맛집을 찾아다니고 ‘평양냉면’과 ‘알리오 올리오’를 먹는다. 냉면에 가위질을 하면 안 된다고 면장질을 하는 것도 잊어선 안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힙스터 체크리스트 같은 건 사실 언어도단이다. 힙스터의 본질은 ‘구분짓기’에 있다. 독보적이고 독특한 취향으로 자기를 타인과 구분짓는 것, 그러니까 자아와 주체의 확립이 힙스터의 의미라면 “이래야 힙스터”라는 힙스터 판독기에 편입되는 순간 그는 이미 힙스터가 아니다.

따져보면 사실 한국에 ‘취향’ 같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똑같이 머리를 빡빡 밀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강요받으며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노래를 들으며 똑같은 독재자를 찬양하며 사는 나라에 취향같은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취향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명확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 학교 현관엔 현관문보다 큰 글씨로 단결과 통일이라고 적힌 액자가 붙어 있었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였다. 그걸 민주화라고 불러야하나, 아무튼 겨우겨우 대통령 욕을 해도 잡혀가지 않는 시절이 왔을 때 ‘똘레랑스’란 말이 유행했다. 교과서에도 상대주의니 다양성이니 하는 말이 등장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같은 표어도 그때쯤 나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른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양’과 ‘취향’을 책으로 배운 탓일까. 사람들은 ‘단결’과 ‘통일’이 있던 자리에 ‘취향’과 ‘다양’을 채워놓고 똑같이 굴기 시작했다. 힙스터가 되기 위한 방법마저 남과 같아야 하는 세상이라니. 자아와 주체는 여전히 삭제돼 있다. 다름을 허용치 않던 폭력이 ‘다름’을 강변하는 야만으로 둔갑했다. 역시 마찬가지로 ‘타자성’에 대한 혐오다. 자기의 얼굴이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얼굴을 볼 수나 있을까.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언어생활에서 ‘다름’과 ‘틀림’을 도무지 구분하지 못한다.) 모두 똑같은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 한국사회엔 여전히 취향이 없다. 용산구와 마포구에만 힙스터 체크리스트에 충족하는 힙스터가 수만 명은 될 거다. 자기의 얼굴이 없는 몰취향의 고장.

몰취향은 위험하다. 자기의 얼굴을 모르는 달걀귀신들만이 횡행하는 세계와 같다. 세계를 단조롭게 만들고 서로를 외면하다 결국 혐오하게 한다. 심지어 몰취향을 취향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알리바이마저 주어진다면 (혹은 스스로 획득한다면) 개선의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지금은 총체적 난국이다. 몰취향의 가짜 힙스터들이 몰린 자리에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고 가난한 자영업자들은 쫓겨난다. “호모를 싫어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라는 말이 혐오를 정당화 한다. ‘취향’의 외피를 뒤집어 쓴 ‘몰취향’은 마침내 반지성주의를 잉태한다.

곧 타인에 대한 혐오를 낳는다. “그건 틀렸어”라는 지적에 그것이 무엇이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라고 대답해버리면 그만이다. 지적 사유와 갈등과 토론과 쟁명이 사라진다. 자기 존재의 역능을 통해 타자의 얼굴을 보기보단 대화를 포기하고 타자를 외면하고 혐오해버린다. 그걸 타자성의 인정이라고 우긴다. (결과적으로 <국제시장>이나 <해운대>가 천만관객을 돌파한다.)

다시, 그 시절 내 썸녀는 정말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을까 생각해보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고 전시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 ‘조악한 욕망’에 홀랑 넘어가 눈에 하트를 그린 내 유치한 마음이다. 멜론 인기차트 100을 틀어놓고 기계적으로 커피를 내려주던 그 카페의 알바는 귀갓길에 어떤 음악을 들을까? <국제시장>의 감독은 다음 영화에서 또 천만관객을 넘길 수 있을까? 경리단 오르막길, 힙스터의 언덕은 자기들만을 고립시킨 몰취향의 달걀귀신들이 모인 고원은 아닐까.

[워커스 34호]


[워커스_아무말대잔치] 어떤 광기에 대하여

[워커스_아무말대잔치] 어떤 광기에 대하여


어떤 광기(狂氣)에 대해 생각해보자. 광기의 전제는 ‘무조건’이다. 당신이 부르면 태평양을 건너서라도 무조건 달려가겠다는 유행가 가사야 다소 낭만처럼 보일 수 있겠다만 무조건이란 결국 비이성과 맹목의 의미다. 그러니까 ‘내가 널 만나려고 태평양을 건너는 건 이성이고 합리고 나발이고 신경쓰지 않는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의미. (사실 연인관계에서도 이렇게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관계는 낭만보다는 공포에 가깝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단 하나로 일축한다. 하여 결국 폭력을 잉태한다. “길라임 씨가 내겐 송혜교고 전지현”이라고 여기던 분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선 집회에서 행하는 폭력을 보라. 광기의 결과는 결국 폭력이다.

이 광기는 그저 ‘적폐세력’에게만 있다고 여기는 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대상이 길라임 씨에서 ‘우리 이니’로 달라졌을 뿐 행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기자 개인의 SNS 좌표를 찍어 화력을 집중하고, 구매력으로 언론사를 압박하거나 입맛에 맞지 않는 모든 비판을 가짜뉴스로 이해한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세상 모든 가치를 ‘우리 이니’로 일축해 버리는 폭력.

하지만 ‘그래서 문빠들은 안 돼’라고 말하는 당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당신의 일상에 스며든 맹목과 광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국뽕’에 젖어 든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면서, ‘문빠’들의 몰지각함을 욕하면서, 그러니까 황우석과 심형래와 노무현과 문재인, 이덕일, 환단고기, 두유 노 강남스타일을 욕하면서 당신이 던진 그 멸칭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것은 무엇을 배제했는지. 또 당신은 그 욕설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

뽕, 빠, 까

뽕, 빠, 까(집단적 광기, 아니 그보다는 광기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들엔 왜 하나같이 된소리가 쓰이는 걸까) 같은 단어들로 지칭되는 집단의 공통된 정서적 근간은 ‘상징적 타자’에게 자기의 욕망을 모두 투사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욕망도 비난도 자기 자신이 아닌 상징의 몫이 된다. 모든 집단 광기의 투사, 상징적 타자를 향한 돌팔매질은 나와 당신, 우리의 뱃속에 숨어 있는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입신양명의 신화, 경제적 성공의 신화, 산업화와 근대화가 빚어낸 먹고사니즘의 신화 같은 괴물. 거기에 성숙하지 못한 정치제도와 반지성주의의 파토스가 양념처럼 버무려져 만들어낸 촌극. 결국 자기 내면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욕망과 배반의 꼭두각시놀음이 부끄러워 은폐하는 광기의 카니발 같은 것.

얼마 전 동네 학교에서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학교의 교사가 학교 축제에서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발언과 신체접촉을 한 사건이다. 취재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반면 이 사건을 처음 제보한 학생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학교의 다른 잘못들도 보도하고 기사화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사건들에 대한 제보도 이어졌다.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소의 잡음은 덮자고 말하는 어른들과, 그런 어른들을 조롱하며 도리어 더 많은 학교의 잘못을 고발하고 성토하는 학생들의 대비. 학교라는 상징에 자기들의 욕망을 투여하는 어른들과 그 상징에서 얻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학교라는 상징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학생들의 대비. 학교의 ‘어른’들은 학교라는 상징이 자기의 명예라도 되는 양 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학교의 평판이 떨어지면 대학입시 성과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면서 울먹거리던 그를 보면서 실소가 나왔다. 도대체 학교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과 대입결과의 상관관계를 연결지으려면 뇌 내엔 어떤 망상이 가득차야 하는 걸까. 제보를 해온 학생들은 해당 교사의 사소한 잘못을 들추느라 여념 없었다. 수학여행에 가서 그 교사만 다른 층에 묵었으니 특혜라거나, 그 교사만 생활지도가 유독 엄격했다거나 하는.

상징에 집착하면 본질을 잃게 된다. 이 학교의 교사를 비롯한 어른들은 학교의 명예에 집착하는 광기 어린 태도로 폭력을 만들었다. 그들의 언어 어디에도 피해자는 없다. (그들은 실제로 ‘사건을 명확하게 고발하고 나선 이가 없으니 피해자가 없는 셈’이라는 논리를 들고 오기도 했다. 끔찍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가해 교사라는 ‘악’의 상징에 집착하느라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발생한 젠더 권력의 격차,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저 ‘가해자’ 개인에게 모든 문제를 치환했다. 그래서 그 악을 치우고 나면 그 자리엔 또 무엇을 채워 넣게 될까.

마찬가지로 박근혜가 떠난 자리에 문재인이 들어 무엇이 달라질까. 문재인이 떠난 자리에 다른 이를 채우면 또 무엇이 달라질까. 상징을 깃발처럼 올리고 그걸 빼앗고 찢겠다며 싸우는 동안 결국 웃는 건 누구일까. 깃발을 숭배하는 집단이 광기를 부리는 동안 배제되는 건 깃발조차 올리지 못한 이들이다. 광기의 집단이 올린 깃발을 찢겠다고 덤비는 일은 오히려 광기가 짓밟은 깃발조차 올리지 못한 이들의 존재를 은폐하는 일이다. 또 다른 광기. 랑시에르의 지적처럼 정치란, 또 삶과 투쟁이란 깃발과 상징들의 싸움이 아니라 그 밑에 깔린 몫 없는 자들의 싸움이어야 한다. 깃발을 보며 미치지 말자. 당신이나 나나 몫이 없긴 마찬가지.


[워커스 32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떡밥엔 찬성하지만 낚이는 건 싫습니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떡밥엔 찬성하지만 낚이는 건 싫습니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2012년 대선에서 난 문재인을 찍었다. 그즈음 숱했던 술판에서 “문재인이 이명박이나 박근혜와 다를 게 뭐냐”고 말했다. FTA와 대추리, 비정규직법, 부안, 이라크 파병 등등등. 참여정부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만큼, 혹은 그보다 더 노동자와 농민, 민중들을 괴롭혔다. 그 때도 지금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문재인을 찍었다.

이번엔 좀 빠르게 고백하자면 난 심상정을 찍었다. (더구나 나 혼자 조용히 심상정을 찍는데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 심상정을 찍자는 독려도 좀 했다.) 여전히 숱했던 술판에서 난 “심상정은 또 문재인과 다를 게 뭐냐”고 했다. 진보정치를 참칭하는 자유주의 정치, 페미니즘을 자처하면서 당내에 창궐하는 ‘한남충’들에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비겁함, 피와 눈물이 치열하게 쌓아올린 진보정당의 성과를 갉아먹은 기회주의. 그런 말을 했다. 이런 생각도 당분간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엔 심상정을 찍었다.

# 떡밥에 낚이지 마세요

당연하지만 문재인이 대통령이 됐다고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새 대통령은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지만 실상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직고용 정규직 전환보다는 임금을 비롯한 노동조건은 그대로 둔 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중규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찾았을 때 이런 우려를 제기한 노동자에게 “한 번에 다 얻으려 하지 말라”고 답한 건 우려를 더 키운다. 인천공항공사가 ‘좋은일자리 TF’를 만들면서 자회사 설립을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정규직화, 노동중심 같은 말은 사실 떡밥이다. 떡밥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간 결과 비정규직 법안이 만들어졌고 대추리와 이라크엔 군대가 파병됐다. 떡밥에 낚이면 실상 우리의 삶은 저들의 정치에 포섭된다. 그 포섭은 저들의 알리바이가 된다. 그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 늬들도 좋아했잖아.” 안타까운 건 아직도 자기들이 낚인지 모르는 어망 속의 물고기들이다.

정의당으로 표상되는 한국의 ‘진보정당’도 마찬가지다. 본래 진보 운동은 거개의 권력과 자본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함으로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적대함으로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에 진보와 정치의 공간을 만드는 작업. 그러나 진보정당은 진보보다는 정당에 방점을 찍음으로 공적 영역과 권력에 포섭됐다. 진보 ‘정당’의 정치는 새로운 것으로의 전복보다는 체제를 용인함으로 얻는 안정적 지위에 국한됐다. “사회적 합의가 용인하는 진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같은 거다. 중식이 밴드의 여성혐오 가사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김지연 성우 부당해고에 이은 당내 메갈리아 논쟁에 대처하는 정의당의 방식이 그랬다. ‘안정된 진보’의 떡밥에 낚이면 상상력과 자생성을 박탈당한다. 균열을 두려워하게 되고 마침내 체제에 순응하게 된다.

# 그렇지만, 떡밥을 버리진 마세요

문재인이나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 해서 나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토록 지껄이면서도 정작 그들을 찍은 이유는 어쩌면 그게 ‘연대’의 본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대란 본질적으로 서로가 가진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2012년, 문재인은 쌍용차 해고자의 복직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연히 그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노동 문제의 상징과 같던 쌍용차를 언급함으로 자신의 개혁 이미지를 공고히 하려 했을 뿐이다. 그가 대통령이 됐다고 쌍용차의 해고노동자들이 일거에 복직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건 고작 대통령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적어도 노조가 박근혜 정부에서보단 조금 더 유리한 고지에서 투쟁하고 협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언급’의 힘은 딱 그만큼이다. 그리고 딱 그만큼을 위해 난 문재인을 찍을 수 있었다. 문재인은 표를 얻고 ‘우리’는 딱 그만큼을 얻는 거다. 이번 선거에서 심상정에게 표를 준 이유도 마찬가지다. 계속 열세였던 심상정이 TV토론에서 성소수자 문제에 자기의 1분을 할애하는 순간, 멀리서 찾아왔다는 성소수자 청년과 얼싸안던 그 순간 심상정의 지지율 그래프가 움직였다. 그렇지만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고 소수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심상정이 득표한 수만큼 혐오가 조금 ‘주춤’할 것이란 기대. 그녀에게 준 ‘표값’으로 내가 기대한 건 딱 그만큼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고 쿨하게 다시 헤어지는 것. 그게 연대의 본질이다.

정치인을 이용하는 건 그들을 논리적 모순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들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 표를 구하러 다닐 때와 이후의 말이 달라진다면 우리는 말의 무기를 쥐고 그들을 다그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죽어도 그들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시혜와 권력의 크기를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저 애초부터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용할 거리들은 차고 넘친다. 낚시 바늘을 피해 떡밥을 야금야금 물어뜯을 방법은 많다. 난 낚이는 것은 싫지만 떡밥엔 찬성한다.


[워커스 31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대학에선 두꺼운 철학책을 끼고 앉아 사랑이니 삶이니 실존이니 하는 말을 지껄이고 싶었다. 어릴 때 본 드라마에 나온 형들은 그랬다. <우리들의 천국>이나 <카이스트> 같은 드라마. 나이를 더 먹고 취직을 하면 자기 일을 사랑하고 열의가 넘치는 신입사원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야근 중에 눈 맞은 직장동료와 시작한 불 같은 연애 같은 것도 상상했다. <미스터큐> 같은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이 꼭 있었다. 그런 장면에서 여배우는 주로 김희선이었다. 꿈이 참 컸다. 난 장동건이나 김민종이 아닌데.

생각해보면 한 20년쯤 전, 드라마엔 캔디들이 참 숱하게 나왔다. 그런 드라마의 캔디는 자고로 돈 앞에 의연해야 했다. 나쁜 짓하고 돈으로 대충 때우려는 재벌 2세에게 “돈이 전부인 줄 아느냐, 일단 사과부터 하라”는 대사를 날려주는 게 자고로 모든 드라마 속 신데렐라, 캔디의 첫 대사였다. (그럼 그 당당하고 올곧은 성품에 재벌 2세가 홀딱 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엄청 예뻐서 반하는 거다. 캔디 역도 주로 김희선이나 최지우가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디는 돈 앞에 의연하지 않다. 드라마 속의 대학에도 삶이나 실존, 사랑, 낭만 같은 오글거리는 말보다 알바와 최저임금과 등록금, 취업난 같은 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돈이 지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 꿋꿋하던 캔디들은 이제는 지고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꿋꿋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돈보다 꿈과 사랑을 택하던 대학생들은 꿈과 사랑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번다. 예전엔 직장에서 야근하다 눈 맞는 커플의 가장 큰 방해가 ‘연적’이었지만 지금은 ‘신분’이다. 남자 주인공은 주로 정규직, 여자 주인공은 비정규직이다.

그건 아마 사랑과 낭만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시대의 드라마 주인공들과 달리, IMF에 사춘기를 보내고 FTA의 시대에 연애하고 취직해야 하는 신자유주의형 주인공들이 갖는 삶의 태도 때문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드라마.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지난해 10월, CJ E&M의 예능채널인 tvN에서 드라마를 만들던 이한빛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라마 <혼술남녀>의 종방연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이한빛 PD가 만들던 <혼술남녀>는 노량진 고시학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친구가 없고 돈이 없고, 시간과 여유가 없어 홀로 술을 마시는 ‘혼술족’들의 이야기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의도는 그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려 한다고 드라마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한빛 PD의 일은 위로와 공감이 아니었다. 이한빛 PD는 <혼술남녀>의 조연출을 하면서 촬영 중간에 촬영팀에게 계약파기를 알리고 계약금을 환수 받는 일을 담당했다. 드라마 현장의 계약직들에게 ‘정리해고’를 통보 하는 일이다. 이한빛 PD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일에 대해 선임 PD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과 욕설이었다. 이후 그에게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이 강요됐다. 선임의 눈 밖에 난 그에게 인격적인 모독과 집단 괴롭힘도 뒤따랐다. 이한빛 PD의 유가족들은 CJ E&M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이한빛 PD가 사망한 이후 회사는 유가족에게 “이한빛 PD가 불성실했고 비정규직을 무시해 갈등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사건은 6개월 가까이 은폐됐고 4월이 돼서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랐다.

기륭전자, 서울대 점거 농성장, KTX 해고 승무원, 416 연대. 이한빛 PD가 1년차 월급을 쪼개 돈을 보낸 곳들이다. 신출내기 드라마 PD는 아마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나보다. 마음과 힘을 모아 더 좋은 세상, 따듯한 마음을 그리는 그런 드라마. 돈 보다는 사랑이 중하고 삶에는 희망이 남아있는 그런 드라마. 외로운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드라마. 그러나 세상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정리해고, 계약직, 욕설과 따돌림. 어딜 봐도 드라마 같지 않던 현장에서 그는 조금씩 죽어간 셈이다. 차라리 그보단 이제 드라마조차 더 이상 따듯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토록 비정한 세상의 삶이야말로 드라마처럼 사는 일일까.

#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김과장>은 ‘사이다 같은 드라마’라고 호평 받았다. 말단 사원들이 재벌기업의 부조리에 맞서는 내용이었다. 몇 해 전 크게 히트한 <미생>은 비정규직 노동자 들에게 ‘장그래’라는 대명사를 만들어줬다. 그 드라마들을 꼬박꼬박 챙겨봤지만 어린 날 그랬던 것처럼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경리부 말단직원들이 대기업의 분식회계를 밝혀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고, 비참한 비정규직의 삶을 견뎌내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 드라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고다르가 말하길,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라고 했다. 영화란 현실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만드는 이가 그리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을 막무가내로 해고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한 PD가 죽어나가는 세계에 사는 이들이 그려낸 현실을 구태여 보고 싶지 않다. 이제 이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희망 같은 걸 감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쩐지 자꾸 옛날 드라마만 찾아보게 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서울의 달>을 유료 결제했다. 홍식이는 비참한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부여잡을 수 있었는데.


[워커스 30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청년문제 같은 건 없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청년문제 같은 건 없다"



답답한 마음에 “그래서 도대체 청년의 문제가 뭔데?” 라고 물었더니 “선배가 겪는 문제가 바로 청년 문제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딱히 반박할 말도 없으니 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다. ‘청년문제’를 주제로 (무려 원고지 15매에 달하는, 무려 신박한 문체로) 글을 써내라는 무리한 청탁을 받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청년의 문제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싫었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워커스>가 규정하고 있는, 또는 이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청년’이 무엇인지, 창간 당시부터 ‘청년’을 주 독자층으로 삼아 갖은 기획과 꼭지를 생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겠다. 도대체 왜. 청년이 도대체 뭐라고.


청년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적·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이다. 이 모호한 의미 규정 때문인지 정부와 지자체가 규정하는 청년 세대의 기준은 제멋대로다. 19대 국회는 청년고용촉진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처음에 청년을 만 19세에서 만 29세로 규정했다가 30대 구직자들을 소외한다는 지적에 만 34세까지로 상향 조정했다. 정부의 청년전용창업자금 지원은 만 39세 이하만 받을 수 있다. 서울시의 청년보장제도는 만 19세에서 29세가 수혜 대상이지만 성남시의 청년배당 대상자는 만 19세에서 24세까지다. 정치권의 청년규정도 제각각이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청년 비례대표를 뽑을 때 청년의 기준이 정해졌는데 새누리당은 35세 미만, 새정치민주연합은 45세 미만이었다. 만 31세의 성남시민인 나는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받을 수 없지만 정부의 청년창업자금 지원은 받을 수 있다. 서울은 성남보다 공기가 좋지 않아서 신체적, 정신적 성장과 무르익음이 더딘 것일까.


<워커스> 창간 초기에 ‘청년 패널’이란 콘텐츠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2~30대 비슷한 연령의 몇몇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취업, 빈곤, 연애와 성, 가정과 가족의 문제 등등 이른바 ‘청년 문제’로 손쉽게 언급되는 주제의 대담을 하는 기획이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기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매 호의 기사에선 대담을 진행하고 이야기를 정리한 기자가 뭔가 대단한 대화라도 오고가고 심오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과장했지만, 이제와 고백하건대 그거 죄다 ‘뻥’이었다. (독자 제현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매주 도무지 하나로 그러모아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열됐다. 뉴스가 제공하고 드라마와 영화가 포장한 ‘청년 세대’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 청년 세대는 죄다 가난하고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알바에 시달리고 그 알바 업주는 악덕업주라는 설정. 그럼에도 미래의 꿈과 희망에 열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클리셰, 지독한 가난함에도 끈끈하게 이어지는 사랑과 그 사랑마저 극복하지 못할 고단한 삶이라는 진부한 러브라인까지. ‘청년 세대’라는 허상을 만들고 그들이 사는 허구의 세상을 구획하는 일이었다. 거짓부렁의 글을 돈 주고 사 읽은 독자들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의 관심과 호명은 거개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변명도 얹고 싶다. 대상을 짜맞추고 거기서 자기만족을 얻는 일. 무례한 고나리질과 의미 없는 꼰대질.


이건 ‘청년’이라는 개념 범주를 묻기 이전에 ‘청년 세대’가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이를 규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정말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세대의 범주를 상정해놓고 문제를 만들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 끼워 맞추다보니 ‘청년’이라는 세대는 호명의 순간부터 대상화된다. “너희는 이런 세대고, 이런 아픔을 겪고 있을 거야 맞지?” 체제는 젠더, 인종, 세대, 국가 같은 것들로 노동력을 구획하고 통제한다. 2017년을 살고 있는 젊은 세대가 취업하기 어려운 건 자본의 이윤율 저하에 따른 문제고 삶이 피폐해지는 건 고도화된 신자유주의가 추동한 경쟁 때문이다. 그들이 그 세대여서 그런 게 아니다. 청년들이 만 39세를 넘어서는 순간 ‘뿅’ 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실은 ‘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 제각각의 삶, 저마다의 어려움, 저마다의 고통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의 주름에 새긴 고통의 종류와 양과 질은 다 다르다. 그것들을 고작 ‘세대’의 이름으로 뭉뚱그리는 일은 너무 안일하고 불온하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달관 세대 등등등 등등등.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수많은 말과 말의 잔치가 포섭할 수 있는 ‘청년’은 없다. 세대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다. 특정 연령대를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가난한 청년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문제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아니라 불량한 일자리, 불안한 고용이 문제다. 29세의 미취업이 49세의 실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건 아니다. 미래세대라고? 49세에겐 미래가 없냐고. 굳이 일부러 노력해서 ‘청년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워커스>는 안일한 세대론이 담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은폐하고 있는 너머의 것들을 들춰내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젊은 피’를 운운하며 떡고물 던져주듯 젊은 이들의 표를 구걸하거나 강탈하는 정치권의 속내, 88만원이니 청년의 대변자니 하는 세대론 장사치들의 꿍심 같은 것. 오늘 ‘청년 세대의 문제’를 운운하는 건 피시방에서 디스크 조각모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부디 담당기자는 다음 원고청탁에선 더 신박한 주제의 원고를 청탁해주길 바란다.[워커스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