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 퇴갤'에 해당되는 글 1건

단상


1.
담배를 사러가는데 별로 춥지 않았다. 심지어 얇은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나갔는데. 그러고보니 벌써 입춘도 지나 이월중순이다. 며칠 있으면 다시 봄. 봄이 설레기보다 겨울이 섦다.

2.
며칠 전엔 남에게 내가 쓴 글을 보냈다. 미루다 미루다 새벽녘에야 졸린 눈 부비며 쓴 글이라는 핑계가 구차하지만 그 핑계말곤 붙잡을 위안도 없이 졸렬하고 부끄러운 글들이었다. 정말이지 손발이 퇴갤할 것 같아. 사실 언제 쓴 글이라고 부끄럽지 않았냐만은, 그 부끄러움에도 강도란게 있는 법이니까. 그러고선 또 부끄럽지 않은 척, 후안무치하게 글쓰고 말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지껄여댔는데, 그건 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이렇게 부끄러웠다고 토설하는 알량한 자기위안적 고백은 또. 침 세번 뱉는 것으로 모든 선언에 신뢰감을 부여하던 그 어린 놀이가 더 진정성 있어뵌다. 이건 대낮의 길 한복판에서 수음을 하는 짓.

3.
스물 일곱해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야식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출근도장을 찍고있을 이 시간에 치킨과 맥주생각이 간절하다. 물론 먹지는 않는다. 그럴 돈이 없는게 오직 한가지 이유다. 하하하.

4.
먹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올 해엔 자격증을 하나 따고싶다. 조리사 자격증. 자꾸 내 요리 실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동분자들이 나타난다. 난 모래알로 밥을 짓고, 솔방울로 탕수육을 만드는 인스턴트 음식계의 한복례. 맛있는 음식보다 종이쪼가리를 실존적 증거로 채택하는 우둔한 혓바닥들을 전부 아오지행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다시금 새벽별을 보며 연필을 잡기로 다짐했다. 요리실력을 증명하고자 국자와 후라이팬보다 연필과 참고서를 잡아야하는 이 문화적 후진국의 앞날이 심히 통탄스럽지만, 난 왜 또 그걸 굳이 증명하고 싶어서...응?
그냥 숙원사업인 대학가 인심좋은 털보뚱보 아저씨네 술집의 주방장겸 호스트겸 디제이를 위한 고되고 묵묵한 고련과정이라고 생각해야지.

5.
오래간만에 나온 강허달림 언니의 신보. 당연히 좋다.
하지만 왠지 같이 찌질하게 우울해서 위로되던 누나였는데, 어느 날인가 더 어른스러워지고 여유도 생겨서 그저 괜찮다고 얘기해주는 막내이모가 된 느낌이랄까. 그래도 당연히 좋다.
한국말로 노래하는 여성 중에서 지금은 이 언니가 (아마)1등 아닐까.


강허달림 - 꼭 안아주세요

6.
얼마전엔 생활이 궁핍하고 고되다며 질질짜는 친구를 만나서 얘기를 들었다. 도시가스가 끊겨서 집안이 냉골이고 당장 내일 식비와 차비가 걱정이고, 통장에 기십만원도 없는 생활이 비참하다고 했다. 그 친구의 힘듦을 무시하는건 아니지만, '얌마 그거 내 얘기잖아, 나 안 힘들면 병신인거냐?' 어쨌든 술값은 옆에 앉았던 돈 잘버는 친구가 냈다. 난 사실 그게 더 비참했다.

7.
예전에 엄청 좋아하며 따라다니던 선배가 있었다. 우리학교 총학생회장이었는데, 지금도 "그때 형이 삼계탕 사주면서 꼬시지만 않았으면 지금 이렇게 살고있진 않을거"라는 농담을 한다. 여하튼 내 대학생활의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다. 난 엄청 착하고 말 잘듣는 후배여서 그 양반도 나 되게 예뻐했던거 같다. 내가 그 양반 군대갔을 때 명절때마다 명절음식 싸들고 면회 다니던 그런 착한 후배다. 얼마전에 오래간만에 그 양반하고 술을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해야 된다는걸 억지에 억지를 써서 그 양반 사는 동네까지 찾아가서 술을 얻어마셨다. 내 생일이었다. 여전히 변변치못하게 살고 있는 내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사실 조금(보단 훨씬 많이) 못마땅했다. '변절'운운하는게 아니다. 자신의 삶을 정당화시키고 그 삶에 대한 확신으로 다시 스스로를 위안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에겐 그 시절의 운동도 그런 것이었을까. 또 당분간 만나지 않을 것 같다.

8.
낮잠을 자고, 시덥지 않은 책을 읽고, 개콘 재방송을 보면서 낄낄거리다 식은 밥에 남은 반찬을 몽창 때려넣고 특제 비빔밥을 만들어 우걱거리면서 뉴스를 봤다. 쌍용에서 또 사람이 죽었다. 앞으론 모래알로 밥을 짓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까끌거려서야.

9.
목수정씨 좋아했는데, 이제 별로 안좋아하련다.
정명훈 사건에서 드러난 태도는 예민함의 발로라고 생각했고, 그 예민함이 남한사회처럼 두루뭉술이 미덕인 사회에선, 특히 좌파에겐 더욱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예민함이 다소 감정적으로 발현되는 것도 토론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일이고 지속되는 토론은 결국 감정을 배제한 순수한 예민함과 정연한 논리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수정씨가 선언하듯 사건을 종결하고 블로그를 닫았을 때도 예민한 감수성에 진중권의 비수같은 말들이(사실 그의 언어에 따듯함이나 상대에 대한 배려같은게 없는건 사실이니까) 상처를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목수정씨는 얼마전 다시 블로그를 열었다. 그리고 '나꼼수와 비키니 사건'에 대한 글을 포스팅했다. 그녀는 이 일을 두루뭉술하게 넘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걸 포용과 관용이라고. 어디에서도 예민함은 찾기 어렵다. 어느 순간에, 어느 지점에만 예민하고 또 다른 순간엔 다시 두루뭉술, 포용과 관용을 운운하는 태도에서 명확한 정의를 찾기란 쉽지 않다. 사실 자신에 대한 공격과 자신이 애초에 상정한 '적'에게만 발로되는 공격성으로 해석하는게 되는 것이 어쩌면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야초부터 나꼼수를 옹호하는 태도도 영 마뜩치 않은 판이었다.
그녀의 책들을 통해서 그녀의 삶이나 그녀의 글, 바라는 세상에 대해 동조하고 또 그녀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호감은 말한 것처럼 그녀가 갖는 예민함이 바탕이었다. 아끼고 좋아하는 팬심에서 하는 말이다. 좀 정신차리고 살자.

10.
하이쿠나 한 편.

이 세상은 /
나비조차 먹고 살기 위해 바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