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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의 소통


글쓰기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읽히기 위한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글의 존재는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치유하는 글쓰기, 그러니까 일기같은건 어쩔거냐는 물음도 있지만, 그건 작자 자신이 독자가 되는 경우니 마찬가지인거고.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도 얘기했지만 사유는 읽고 쓰고 토론하고 쟁명하며 확장된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큰 즐거움이다. 세계가 넓어지는 즐거움. 그 즐거움을 기술의 발전으로 확장시켜 온 역사가 아마 미디어의 발달史. 구술에서 문자로, 활자로, 영상으로, 마침내 지금 2.0이라 부르는 시기까지.

그래서 미디어의 발달사는 다시 사유의 발달사로 이해할 수 있겠다. 관심을 두는 관계망이 점차 넓어져, 처음엔 가정에서, 마을로, 국가로, 마침내는 세계로. 이건 세계가 분절돼있지 않고 우주 삼라만상이 결국 하나의 관계로 이루어져있음을 이해하고 소통해 나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글의 본질은 읽히기 위한 것, 그것은 다시 말해 모든 언어는 관계맺기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SNS니 블로그니 하는 발달된 기술은 소통을 용이하게는 하였으나 소통을 가능케 했는지는 모르겠다. 깊은 사유와 친절한 우정의 언어 대신에 사람들은 140자의 강렬하고 섹시한 문장과 그 섹시함을 가능케하는 폭력, 그리고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네트워크 위에서의 무책임으로 대화를 가장한 웅변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타인과의 공명을 통한 확장을 시도하지 않고 모든걸 자기안으로 수렴하려한다. 그건 트랙백 보단 스크랩에 익숙한 풍경이다. 예쁘거나 웃기거나 자극적인 문장을 RT하고 LIKE해서 수용하는 것으로 소통의 과정을 마무리한다. 그 과정 어디에도 공명과 확장의 자리는 없다.

화제인 '나는 꼼수다'가 가장 대표적인 예일 수 있겠다.   기사링크
위트와 조롱으로 시작한 대화를 사유도, 소화과정도 없이 받아들여 이젠 그 외연의 확장에만 신경쓰게된 불통의 집단. 그게 지금 나는 꼼수다와 그 팬들의 좌표다. 그들이 내걸고 있는 최대의 가치가 소통이고 표현의 자유인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건 전형적인 스크랩의 소통이다.

기존의 언어와 합리성이 결국은 그 견고함을 더 가중시킨다. 의심하고 탈주하려는 사유, 그것을 깨고 나서려는 욕망이 결국 사유의 목적이고 진보의 의미다. 결국 모든 언어의, 글쓰기의 목적이다.

고민하고, 의심하며 읽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또 생각하고, 이해하며 써야한다.
이건 사소한 한 줄의 텍스트지만, 그 의미란 사실 세계와의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목적은 왜 열심히 쓰고 방문자도 곧잘 느는데 트랙백도 댓글도 없냐는 투덜거림. 징징징.
확 이글루스로 다시 돌아가버릴까보다.ㅋ





Sigur Ros - Gobbledigook

반두비 - 타인과 관계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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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들리지 않아 수술 날짜를 받아 놓고 기다리고 있을 즈음, 시시껍절한 농담 한마디를 끼적인 적이 있었다.
'내가 귀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뇌안에 대화 뉴런이 망가져서 그런거다' 라는 자학쯤 되는 우스개.

우스개였지만 웃기지도 않았던 그 끼적임은 어쩌면 은연의 진심이었겠다.
'대화'란 그렇게 쉽지 않은거니까. 하물며 마음과 마음이 부닥쳐 영그는 소통이야 말해 무엇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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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
대화와 소통이 어려운 이유도 가능한 이유도 나와 네가 서로 다른 존재 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고,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대화와 소통이 쉽지 않다.

소통은 벽에다 문을 내는 것이다. 하여 문을 내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벽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벽이 무언지, 얼마나 두꺼운지. 벽을 이루는 것이 인종인지 계급인지 성별인지 나이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인지. 무엇이 나와 너를 가로막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벽을 인정하는 것부터 벽을 허물어 문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는 법이다.

결국 소통은 타인과 하는 것. 중요한 건 벽을 부수어 통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난 숟가락으로, 넌 손으로 하지만 이 음식이 네게 맛있었음 좋겠어.] 같은 마음이랄까.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어에서 허물어진 벽에 홀로 남은 문이 계속해서 남는다. 문이 온전하려면 벽도 온전해야 하는 법. 벽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허물려 해서도 안되고. 소통이든 연대든 그 전제는 타인. 타인으로서 온전해야 소통도 온전 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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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이주노동자
세계시민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음에도 짙은색 피부와 두꺼운 쌍커풀의 외국인들에게 내보이는 시선은 싸늘. 세계화를 외치는 이들이 인식하는 '세계'란 고작 북반구의 하얀색 코쟁이들.

이 곳은 즐거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한국사람들도 잘 모르는 택껸을 배우는 미국인과 떼인 돈을 받으러 주소 한 장들고 골목골목을 누벼야 하는 방글라데시인의 동석만큼 우스꽝스러운 곳.
이 곳은 지주에게 핍박받는 마름이 소작농을 학대하듯, 지배받는 개인이 타인을 학대하는 곳.
분노한 만큼 서러울 밖에, 서러운 만큼 포기할 밖에 없는 곳.
제가 노예인것도 모르는, 어쩌면 모른 채하는 사람들이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곳.
답 대신 눈물이 먼저 흐르는 곳.

## 노골적이어서 재미없는

민서의 가방에 달린 촛불소녀 뱃지, MB수학학원, 한겨례21, 조선일보, 돌발영상, 불탄 남대문..
너무 노골적이어서 가끔 극을 향한 집중을 방해할정도.
위트와 풍자와 해학은 언뜻언듯 보일락말락이 정도인 것을.

감독은 전작에서도 똑같이. 전작 '방문자'에 비해 훨씬 더 재치있고 부드럽고 유연한 진행이었지만, 그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풍자는 여전히. MB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에 있어 MB는 풍자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목에걸린 밥알처럼 까끌까끌.

##  백진희

예쁘고 잘한다.
처음 만난 카림에게 입맞추고 돌아서는 장면에서의 그 눈빛은 아주 '정확해'보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예뻐서 잘해보일 수도 있는거다. ;;
박보영, 정유미와 함께 주목하고 싶어지는.
 

## 청소년 관람불가

분두비 이미지를 찾으려고 네이뇬에서 반두비를 검색하자 영화에 달린 온갖 악플들이 쏟아져 나온다.
'외국인(피부색 짙은)이 우리나라 여고생을 강탈하는 쓰레기영화'라는 평을 보다 생각했다.

청소년 관람불가는 청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를 감출때 쓰는 요령이구나.
사기꾼 약장수가 애들은 가라고 말했던 것도 같은 이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