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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우리 슨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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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첫번째 선거는 92년 대선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당시에 골목골목마다 붙었던 대통령선거 포스터는 신기한 풍경이었다.

아버지는 김대중 후보의 지지자였다. (후일에야 듣게 된 얘기지만, 아버지는 당시 민중 후보였던 백기완 선생을 지지했으나 '사표론'에 휩쓸려 김대중 지지로 돌아선 전형적인 비판적 지지자 였다.ㅎ) 집안에서고 어느 자리에서고 아버지는 공공연히 '김대중 선생님'을 뽑아야 민주화가 완성된다고 말했었다.

꿈뻑꿈뻑 졸면서도 아버지를 따라 개표방송을 보던 나는 아버지가 분개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김대중 선생님'은 처연하게 울었고 숙적이자 라이벌이자 동지이자 웬수인 김영삼이 당선됐다. 아버지는 분개하고 원통해했지만 나로선 '후보중에 제일 못생긴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참 폼 안나게 됐다'란 생각외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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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IMF가 터졌다. 온 국민이 나서서 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캠페인이 펼쳐졌다. IMF와는 상관없이 당시 우리 가족 경제는 내 출생 이후 최고의 호황기였기 때문에(그때 우리 부모님은 꿈에 그리던 내 집 장만을 하셨다.) 경제 위기에 대한 푸념은 사실 팝콘을 집어먹는 뉴스비평에서 한발짝도 더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 모든게 멍청하고 무능한 김영삼 탓이라고했다. 식탁에선 멍청한고 무능한 김영삼을 비꼬는 우스개가 가족의 화목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구제금융신청과 외자유치, 국민캠페인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흐뭇해 하셨고. 나도 덩달아 흐뭇해 했다. 아이고 우리 슨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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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오후. 순안공항에 남한 대통령이 처음 발을 딛고 국방위원장과 뜨거운 악수를 하던 그 순간에 난 교무실에서 업드려뻗쳐있었다. 왜 혼나고 있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선생님들 들으라고 한 말은 정확히 기억난다.
" 아 왜 뉴스보느라 다들 난리야. 대강하고 빨리 와서 집에 좀 보내주지."
정확히 4년 후 그 장면을 볼때마다 환호하고 눈물흘리며 '자주통일의 필승보검, 민족의 빛 공동선언'이란 성명서를 쓰게 될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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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아버지와 술을 마시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로 언쟁을 벌였다.
"그는 위기극복을 가장하여 국제 금융자본앞에 우리를 내 던지고 신자유주의 경제구조를 만들어냈어요. 결국 구조조정, 경영합리화라는 미명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렸죠. 가난한자들의 돈을 빼앗아 재벌의 배를불려준것이 어째서 위기 극복이죠? 그와 박정희가 다른점을 모르겠어요. 노벨평화상이 별건가요? 결국 다 국가와 자본의 신선놀음일 뿐이에요."
아버지는 예전처럼 분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선생님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고 말씀하셨다.
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뭘 배웠길래 선생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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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무실에 앉아 푸짐했던 점심식사에 만족하며 배를 두드리고 있을때 속보가 흘러나왔다.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굉장히 슬펐다. 이해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가 공동선언을 만들어내고 민주화를 이룩해내서 드는 안타까움따위는 아니었다. 공동선언은 가변적인 평화안착엔 기여했지만 그 자체로 문제를 내포하고(이 문제에 대한 인식은 차후에 다시 포스팅)있고, 민주화의 공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업적이 훌륭한 위인에게 바치는 경외도 인간적 감정이 물씬 드는 친구에게 보내는 안타까움도 아닌 이 감정은.

어쩌면 '존경'이겠다. 80이 넘는 세월동안 오직 하나의 신념.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진정으로 옳다고 믿는 그것.에 모든것을바칠 수 있는 끈기와 의지. 거기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강인함. 그것에 대한 존경.
지금 이 마음은 존경할 것들이 점차 사라지는 세상에서 얼마남지 않은 존경의 대상마저 사라져버리는 아쉬움과 허탈함에서 나타나는 것이겠다.

그래, 그는 선생님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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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노제가 있던 거리에서, 함께 거리를 걷던 누이에게 물었다. 누가 죽어야 또 사람들이 이리 슬퍼할까요.
글쎄, 김대중 선생쯤이나 되야 이만큼의 오열이 또 있겠지.
사람들에게서 눈물을 이끌어내는건 거짓 이미지나 화려한 업적이 아니다. 그건 오직 진정성. 난 노무현의 서거정구에서 한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김대중선생이 노통의 유가족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에선 눈물을 훔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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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면 이란 말들을 하던데 난 그 냥반 다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겁의 세월동안 영면만 오직 휴식만. 삼가 명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