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살인은 추억이 될 수 있을까 -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과 ‘살인의 추억’의 기시감


전봇대 뒤에 숨어있던 남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여성을 납치한다. 남자는 납치한 여성을 강간하고 무참히 살해한다. 피해 여성은 간곡하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경찰은 애꿎은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수사 책임자가 옷을 벗고 물러나지만 여파는 잦아들지 않는다. 이 와중에도 경찰은 사건의 본질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사건은 오리무중이고 진짜 범인은 음흉하게 다음 범죄를 기획한다.

지난 1일 벌어진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3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줄거리다. 기시감이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와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은 놀랄만치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건의 배후엔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경찰’이고 조금 나아가면 ‘정권’이고 어쩌면 ‘국가’ 혹은 ‘체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장면을 언젠가 본 적 있는 것 같아”

영화 ‘살인의 추억’의 주인공들은 끈질긴 수사 끝에 범인이 등장하는 시점을 알아낸다. 비 오는 날, 라디오에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흘러나오면 범인은 범죄를 저지른다. 그들은 마침내 범인이 등장 할 시점을 포착하지만 결국 희생자가 발생한다. 촘촘한 포위망을 구축해야 할 경찰력이 시위진압을 위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살인의 추억’의 배경이 됐던 5공 말기, 경찰은 시골 아낙이나 지켜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정권을 위협하는 이들을 고문해야 했고(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가끔씩은 성고문도 해야 했고(권인숙 성고문 사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러내기 위해 철거민(상계동 철거민 탄압)들을 쫓아내야 했다.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의 경찰들도 바빴다. 그들은 꼼꼼히 라디오를 챙겨들을 필요도 없이 피해자가 위치정보를 매우 상세하게 알려줬고, 7분이 넘는 시간동안 피해자와 전화가 연결돼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 듣고 있었지만 단순한 “부부싸움 같았다”던 담당 경찰관은 상황을 수수방관했고, “단순 성폭력 사건인 줄 알았다”던 형사과장은 다음날 사건이 다 종결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하다. 이들은 바다 건너 제주의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을 ‘진압’해야 했고,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에게 최루액과 테이저건을 쏴야하는 데다가, 크레인을 점거한 노동자와 그녀를 돕겠다고 몰려든 ‘외부세력’들을 쫓아내야 했다. ‘부부싸움’이거나 ‘단순 성폭력’일지도 모르는 일에 에너지를 쏟기엔 이들에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 서천호 경기경찰청장은 강정에 수 백 명의 경찰력을 투입했고, 과잉진압 논란이 있던 ‘희망버스’ 당시 부산경찰청장 이었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평택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당시 경기경찰청장이었고, 진압의 공을 인정받아 서울 경찰청을 거쳐 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

영화가 ‘동네 바보 형’ 한 명을 잡아다가 두들겨 패서 거짓 증언을 만들어내는 모습과 신고전화 녹취시간과 경찰출동 여부 등 금방 드러날 거짓말로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모습도 닮아있다. 이들도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하지만, 이들의 ‘사건해결’은 일반적인 의미의 그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에겐 ‘사건이 불거지지 않는 것’이 ‘해결’이지 않을까. 그들이 지키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정권’, ‘국가’, ‘체제’같은 것들 일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이건 ‘기시감’이라는 단순한 현상으로 설명 할 수 없다. “이 장면을 언젠가 본 적 있는 것 같아”라는 신기한 감정으로 치부하기에 이 반복은 너무 구조적이고 치밀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는가

눈 밖에 난 인물이라면 그가 연인의 딸에게 어떤 선물을 할지 고민하는 대화까지도 엿듣는 국가다. 공무원이고 노조고, 정치인이고, 언론사고 ‘닥치고 사찰’하는 국가다(굳이 정권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정권만 그런 것이 아니니까).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맨 앞장에 태극기를 그려 넣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충성’을 맹세시키던 국가다.

세금을 내고, 법규를 준수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것은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 곳에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을 국가가 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친 결과 오늘 날 돌아온 건 치안의 바깥으로 내던져지는 결과다. 어느 경우엔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국가에게 사생활이 파헤쳐지거나 직접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교과서는 분명히 우리의 안전한 삶과 행복을 위해서 국가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는데, 실상은 그 반대다. ‘국가’(로 대변되는 그 무엇)의 존속과 안위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경찰과 군대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따금 그들은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

‘살인의 추억’의 시대와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의 시대 사이엔 30년에 가까운 시간이란 간극이 있지만, 여전히 동시대라 불러야 한다. 사람보다 국가가 우선시 되거나 국가를 위해 사람이 무시되는 시대. 공권력의 의미가 ‘공익’을 위한 권력보단 ‘공인’을 위한 권력으로 이해되는 시대.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이 지겨운 반복의 주범은 사실 우리이기도 하다. 몰이해 혹은 무지는 망각이나 단념보다 더욱 큰 죄악이다. 무엇이 잘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왜 화를 내야하는지 알지 못하는 일.

“부부싸움인 줄 알았다”는 말의 기저엔 부부간의 폭력은 개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일한 의식이 깔려있다. “단순 성폭행인줄 알았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 성폭행 사건은 긴급을 요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을까.

피해자의 유가족들은 경찰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무책임한 사람들의 반응에 더 큰 상처를 받는다고도 말하고 있다. 10일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유가족은 “그러게 왜 밤중에 돌아다니냐는 악성댓글이 달리고, 언론들은 멋대로 사건을 부풀린 자극적 기사를 내고 있다”고 말하며 “이런 일들이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일에 무던해질 대로 무던해진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에도 무던해졌는지 모르겠다. (이 유가족이 출연한 라디오 프로그램도 애초에 프로그램 공식 웹사이트에 그의 실명을 공개했다가 그가 익명을 요구하자 부랴부랴 실명을 삭제했다)

감수성의 문제다. 자신과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고통의 정도를 인지하는 능력의 문제다. 부족한 감수성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도 인지하지 못하게끔 한다. 국가가 살인을 방관해도, 부부간의 폭력을 일상으로 치부해도, 성범죄의 책임을 오직 피해자에게 전가해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시대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문제의식조차 없는데 어떻게 나아갈까. 그저 지긋지긋한 반복뿐이다.

살인은 추억이 될 수 있을까 - “미치도록 잡고 싶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살인의 추억’ 메인포스터가 하는 말이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잡을 수 없었던, 오늘날 수원에서 또 한명의 희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경찰이 수사보다 축소를, 사과보단 은폐를 선택하게 했던 ‘그 것’. 그 범인을 미치도록 잡고 싶지만 ‘그 것’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어딘가에서 음흉하게 웃고 있다.

어쩌면 ‘그 것’은 가까이에 있을지 모른다. 부부간의 폭력은 일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머리에, 성폭력의 원인은 피해 여성에게 있다고 말하는 당신의 혀 끝에, 피해자의 처신을 운운하는 댓글을 달고 있는 당신의 손 끝에.

추억은 과거에 머물러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때 추억이 된다. 반복되는 것은 추억이 아닌 현실이다. 우리가 전부 달려들어 죽인 그녀. 우리에게 이 살인만은 추억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