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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응원 논란에 대하여 - 뿌리 깊은 나무는 도대체 어디로 본거야


지난 주말 비키니응원 논란을 보다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생각났다. 좀 뜬금없이. 남한사회 똥멍충이 마초이즘의 여성에 대한 객체화에서 로자를 떠올리는 건 사실 그녀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ㅋ

맑스의 친구였고 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대장 격이던 베른쉬타인을 수정주의라 비판하고 그 레닌과도 맞짱을 뜨던 이 혁명가는 장애를 가진 유대인이다. 그리고 여성.

로자는 그랬다. 그녀는 여성이라서, 장애인이라서, 유대인이라서, 코뮤니스트라서 받아야 하는 온갖 모순을 직접 맞닥뜨려야 했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의 삶의, 세상의, 혁명의 온전한 주체에서 비껴 서지 않았다.

언젠가 로자가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끌던 혁명가, 레닌에게 거의 유일하게 대항 할 수 있었던 이론가로서의 평가보단 흔치않은 '여성 혁명가'로서만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끝까지 그녀는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보다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로 존재한다. 더욱 속상한 일은 그 객체화의 주범이 그녀를 동지라 말하던 이들이란 사실이다.

남한사회는 여러모로 많이 구리지만 그중에서도 젠더문제에 대한 인식은 구림오브 구림, 병신큰잔치. 여성의 성이 정치주체인 남성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성들에게 호출되는 것은 참여가 아니라 도구화다. 자발적인 참여니, 표현의 자유니를 운운해선 안 된다. 그 행위, 그러니까 여성의 특정 성징을 통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서로 말 안 해도 알고 있잖나. 그렇게 표현의 자유가 소중하다면 왜 성범죄는 여성들의 야한 옷차림 때문이고 여성들의 방탕한 생활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거냐. 여성이 성의 주체로서 나서는 일은 음란이고,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객체화 되는 일은 자유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오만하고 안하무인한 모순인가.

자신만은 그 유치한 마초이즘의 수혜자가 아니라는 알량한 자기위안 또한 역겹다. 이미 남한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것을 깨트리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이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공범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사회가 얼마나 남성 우월주의적 가부장제인지를 인식조차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지보다는 외면, 죄악에 가깝다. 그러면서 그것은 진보라는 가치로 에둘러 포장한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다.

누구더라, '춤 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저 즐거운 진보운동을 운운하는 꼼꼼한 분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기도하다. 난 그 유치한 장단에 춤 출 수가 없다. 그건 유쾌보단 유치에 그보단 폭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작 이런 사건 하나로 분열을 일으키면..' 운운할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젠더의 문제는 고작을 운운할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그건 이 사회의 인권과 민주를 가늠하는 바로미터. 그리고 무엇보다 주체의 확장만이 운동의 본질이라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런 여성의 성에 대한 도구화는 다신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정치주체의 확장을 그렇게 얘기하던 뿌리 깊은 나무는 도대체 어디로 본거야. 우라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