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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레닌, 햄버거 이야기



영화를 보고나면 영화 속에 나오는 무엇이 먹고 싶어지곤 한다. 

(그 태반이 술인 건 함정)


일테면 홍상수 영화 속의 소주들, 오션스 시리즈에서 브레드피트가 분한 러스티가 집어먹는 군것질들, 범죄와의 전쟁에서 하정우의 탕수육. 같은 거.


그 중에서 여지껏 영화를 보고나서 먹고 싶었던 가장 강력한 음식의 기억은 굿바이 레닌의 햄버거다.


영화 속, 통일 이후 동독을 잠식하는 자본주의의 상징은 포르노와 코카콜라와 버거킹이었다.


영화를 본지 이제 꽤 오래돼서 정확한 앞뒤의 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자본주의에 꽤나 잘 적응한 동독의 관료가 자본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던 장면이었던 것 같다.


드라이브 스루로 버거킹의 치즈버거를 사서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의 정원에 수영복만 입고 누워 엄청 큰 햄버거를 우적거리던 장면.


흉물스럽게 나온 배, 디룩디룩 찐 살의 아저씨가 빤쓰만 입고 우악스럽게 큰 햄버거를 우적거리는 모습. 역겨울 정도로 탐욕스러운 장면이었다. 토마토 국물이 입가에 시뻘겋게 흘러내리고 케찹이나 마요네즈가 잔뜩 묻은 잔여물들이 막 배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그런 더러운 장면. 


하지만 그 장면을 보는데 갑자기 햄버거가 미친 것처럼 먹고 싶었다.



굿바이 레닌을 본 건 2007년 말이나 2008년 초반쯤이었다. 학교에서 갓 도망나와서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살던 즈음. 살며 가장 우울했고, 가난했고, 혼란스러웠던 날들.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엔가 늘 허기져 있었다. 하루에 영화를 서너편씩 보고 닥치는대로 책을 읽고. 블로그에는 하루에 2~3편씩 글을 썼다. 배가 고팠고 무언가를 계속 그리워하고, 그만큼 허탈해하고. 그 날 썼던 글을 다시 찾아 봤는데, 체제의 붕괴니 삶에 대한 적응이니 하는 되도 않는 말을 지껄여놨더라만, 그건 그 때의 마음이라고 치고.


지금 돌이켜보니 굿바이 레닌을 도서관에서 본 그 날은 그냥 배가 고팠던 것 같다. 

난 햄버거를 좋아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주머니를 뒤져봤더니 딱 850원이 있었다. 버거킹의 왕따시만한 와퍼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집 앞 수퍼에서 '점보햄버거'를 집어들었는데 900원이었다. 이마저도 돈이 모자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공판장이 떠올랐다. 그 공판장은 식자재를 대량으로 살 때 종종 가곤 했는데 빵이나 과자 따위를 다른 수퍼들보다 100원쯤 싸게 팔았다. 수퍼에서 900원인 햄버거는 공판장에서라면 800원쯤이면 살 수 있겠지.


10분을 넘게 걸어간 공판장에서 햄버거를 사서 돌아오는 길이 어쩐지 처량하고 슬펐을 것 같지만 그런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집에 전자레인지가 없는데 이걸 어떻게 데워 먹나 하는 연구만.


일단 프라이팬을 꺼내 아주 약한 불로 달구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달궈진 팬에 햄버거를 올리고 뚜껑을 덮어 10분쯤 데웠다. 찜기에 찌기에는 물기가 많아 축축한 햄버거가 될 것 같았다. 결국 햄버거 번은 다 타고 정작 패티는 하나도 데워지지 않은 햄버거를 먹게 됐다. 그 햄버거는 너무 작아서 서너입만에 다. 콜라도 없이 맹물에 햄버거를 다 먹고 나서야 문득 신세가 처량해졌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그 때는 픽하면 울고 그랬는데. 



며칠 전에 어쩌다 이 이야기가 나왔는지, 한참을 신나서 이 얘기를 떠들어댔다.

지금도 가난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와퍼 하나 정도는 사먹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하여튼 그냥 잡담이다. 주말쯤엔 굿바이 레닌을 다시 보면서 햄버거를 먹어야지. 엄청 큰 놈으로. 지저분하고 탐욕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