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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 봉중근, 애국주의 - 당신을 위해서만


그의 애국심은 언제나 조금 위태로워 보인다.

언제부턴가 '독도'에 아주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그와 그런 그를 추켜세우며 '김장훈을 국회로'같은 시시껍절한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어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했는데, 기어이 노래를 못하게되는 한이 있어도 독도 문제는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그의 말에 마침내 '아차'싶다.

독도의 '소유'에 대한 논쟁과 대립은 사실 대다수의 우리들의 삶과는 무관한 일이다. 결국 한떨기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 그것에 우리는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바다 저편 새들의 고향에 대해서까지 '소유'를 주장함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종속시키려는 자본과 국가주의의 탐욕이 정체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차원에서 일부 일본 극우세력의 파시즘과 역사왜곡에 마땅한 비판을 가하는 것은 정당하고 정의로운 일이겠으나 그 접근이 '소유를 우리의 것으로 확정짓는'형태라면 이는 그 극우 파시즘을 우리 안으로 확장시키는 것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당면한 일본내 극우파시스트세력에 대한 지탄과 철퇴는 응당 가해져야 할 것이나 더욱 신중하고 엄격해야할 것은 우리안에 존재하는 파시즘이다. '우리 것'아닌 것들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로하는 애국주의, 민족주의는 결국 자본과 국가의 탐욕에 순응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독도를 누구의 '소유'로 할 것인가 하는 의미없는 다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질문과 싸움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장훈은 독도를 포기한은 있어도(포기라는 말조차 웃기지만) 노래를 포기해선 안된다.(물론 그 발언이 그대로 그의 진정이 아니라 그만큼의 굳은 각오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있지도 않은 독도의 '소유권'보다 곁에 존재하는 그의 노래가 우리의 삶을 훨씬 더 위로하기 때문이다.



봉중근은 팔꿈치 부상의 와중에서도 팀을 위해 몸바쳐 경기에 나서겠다고 한다. 그의 숭고한 희생과 의지에 많은 팬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지만, 글쎄.

봉중근은 명실상부 국내 프로야구에 손꼽히는 에이스투수다. 95마일을 육박하는 그의 묵직한 직구와 예리하게 허를 찌르는 너클 커브는 명품중의 명품이다. 8개구단의 주전 타자 72명중 봉중근의 볼을 자신있게 쳐 낼 수 있다고 장담 할 자 얼마나 될까.

걸출한 실력을 가진 봉중근에게 LG팬들이 거는 기대는 컸다. 8년만의 플레이오프 진출, 몇년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투수부문 수상, 소박하게는 탈꼴찌. 그런 부담을 고스란히 전해받아서일까, '팀을 위해'라는 말이 그의 입엔 아주 붙어 있다. 시즌 초반 인터뷰에서도 다승이나 삼진보다는 이닝을 많이 소화하는 것이 팀을 위한 길이라고 말하던 그는 '팀'의 의미를 과대 확장하여 해석한다. 그는 팀을 위해 던지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팬들을 위해서나 다른 누구를 위해서 던지지 않아도 좋다. 그는 그저 자신을 위해서만 던지면 된다. 자신을 위하는 것이 높은 연봉이든, 명예의 전당이든 그저 그는 자신을 위해야만 한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엔 도대체 정체도 모를 팀의 위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바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저 팀을 위해 조직을 위해 헌신을 강요받는 일은 지독한 폭력이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의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 어리석은 짓임에야.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매 월요일 아침마다 강요받고, 조직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는 영웅들의 영웅담을 교과서로 배우면 자란 우리는 조직에 헌신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만이 '절대 선'인줄로 착각하고 있다. 착각이다. 오히려 암묵적으로 헌신과 충성을 강요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건 선이라기 보단 차라리 악.

WBC가 시작되기 전, 김인식감독은 국가가 있어 야구를 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군말없이 대표팀 차출에 응하라는 엄포를 놓았다. 김인식 아저씨를 좋아하지만 그건 틀렸다. 국가가 있어 야구인생에 방해가 될지언정(군대같은거) 국가가 있어 그들의 야구인생에 도움이 되었던적은 결단코 없다. 지금도 WBC의 영웅들은 막판 체력저하와 잔부상으로 개고생중.


한겨레 지면을 통한 장은주 교수와 권혁범 교수의 애국주의 논쟁이 흥미롭다. 이택광 교수까지 덤으로 끼어들어 장은주 교수를 물리치는 형국. 장은주 교수의 민주적 애국주의란 개념은 모호하다. 결국 논의를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확립한 공화국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진행시키기 때문에 논리가 허공에 맴돌밖에.

애초에 민주주의는 가당치도 않은 개념이다. 다들 이 민주주의라는 말에 목메어 살지만 사실 그건 되게 거추장스럽고 어리석은 장치. 심지어 이루기조차 지난한. 하여 민주주의는 현실에선 그저 지향의 문제일 따름이다. 공고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 따위 소설책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약간의 민주주의와 약간의 파시즘과 약간의 폭력과 약간의 저항이 어우러진 세상을 살며 애국주의를 말하는 것은 이미 숱한 근로인민들을 바탕으로 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포기하며 국가에 투항하겠다는 말과 같다. 오늘 국가는 투쟁의 대상이지 종속의 대상은 아니다.

대한민국 좀 싫어하면 어때. 그거까지 보듬는게 민주주의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