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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야기





# 극적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 놀라운 시간, 기억하고 싶은 것들, 잊히지 않는 사람. 그런 것들을 극적인 순간이라고 부른 다면 영화의 순간이란 일상과는 가장 배치되는 것이다. 


어제 퇴근 길, 지하철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사람.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사람의 얼굴. 오늘 점심시간 담배를 산 가게의 주인 아저씨의 얼굴과 목소리. 십수년 전 들었던 교양수업 강의실 건너건너 자리에 앉아있던 어느 과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얼굴. 전혀 극적이지 않은 그런 것들을 그러모은다고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가 될 수 없다고 그것들에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야기가 있으니 영화도 될 수 있는 것이지. 


<얼굴들>은 가장 극적이지 않은 영화다. 극적이지 않으니 서사에는 개연성이 없고, 갈등의 고조와 절정이나 해소가 없고 원인과 결과도 없다. 아니다, 없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얼굴들에는 저마다의 서사와 개연성과 목소리와 절정과 분노와 슬픔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없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것. 여백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삶의 순간들이란 모든 곳에서 극적이고 모든 곳에서 극적이지 않다. 내가 평화롭고 안온하게 보낸 어느 순간이, 혹은 평화롭고 안온하다고 여겼던 어느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삶이 뒤흔들리는 순간일 수도 있고 실은 그 어느 누군가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얼굴들>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고 어떤 이야기도 없었지만 혜진은 아마 회사동료들과 식사를 마치고 어색하고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 이미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을테다. 그 순간 마치 인생극장의 이휘재처럼 '그래, 결심했어'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녀가 문득 "나가죠" 라고 말하는 순간에, 어쩌면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할지, 물을 먹고 밥을 먹어야 할지를 떠드는 순간에, 테이블 위 네명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 그녀는 회사를 나가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순간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은 얼굴들에서 보여지지 않는 것으로 있는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다. 잊히는 얼굴들이고 굳이 기억하지 않는 얼굴들이다. 그보다는 영화의 인물이라고 보이지 않으니 주인공이라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는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제공하지 않는다. 인물이 없으니 갈등이 없다. 갈등이 구체화되는 사건도 없다. 사건이 없으니 서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고 심지어 관객은 거기에 감응하고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사실 모든 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야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할 때면 늘 '사람'이나 '사건'의 돌출을 떠올린다. 누구의 이야기, 어떤 이야기,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 그런 것들은 극적인 요소다. "개가 사람을 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무는 일"에 천착하는 태도. 사실 상징과 은유, 메타포란 얼마나 작위적인 일인가. 고작 기호와 돌출된 이야기로 세계를 이해하겠다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오만일지도.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왜 다를 것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질문들의 중첩을 이야기라고만 여긴다면 <얼굴들>은 최악의 영화다. 다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들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의 통창 너머 길 건너에서 걸어가고 있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남자의 삶을 함부로 말하거나 구기지 않고 그 얼굴 자체를 보거나, 그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그 공간에 실은 무엇이든 있을 수 있음을 떠올린다면 <얼굴들>은 근래 나온 영화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극적인 영화일 수 있겠다.


덧,

혜진이 지영과 함께 (영화에는 이 둘의 관계가 안나와서 영화를 보는 한동안은 혜진의 새 썸녀가 아니었을까, 기선과는 그래서 헤어졌을까..를 생각했지만 그게 뭐 무슨 상관이야)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장면이 좋았다. 예쁘지도 요즘 유행이라는 그 흔한 벽화도 없는 골목. 빈 사무실, 공사현장. 뭐 그런 것들. 무엇이 있겠지만 내게 굳이 설명해주지 않는 그 공간들. 


초행을 볼 때도 생각했지만 김새벽은 정말 멋있는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