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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과학> - 총천연색 꿈의 세계, 하지만 깨어나야 합니다

<수면의 과학> - 총천연색 꿈의 세계, 하지만 깨어나야 합니다

 

 

꿈의 세계. 현실에선 도통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들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공간이다. 개연성도 과학적 원리도, 자연의 섭리도 상관없다. 그저 바라는 것들이 총천연색으로, 때로는 폭력적일만큼 단편적인 색으로 나타난다. 그 안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나의 의지일 뿐이다. 미셸 공드리의 영화 <수면의 과학>은 총천연색 꿈의 세계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영화다. 그래서인지 영화엔 개연성이라곤 없다.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증세를 가진 남자의 동화다. 또한, 염세적이고 철없는 남자의 연애 방식을 자학적으로 드러내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소심한 멕시코 아티스트 스테판은 꿈속에서는 ‘TV 스테판이라는 화려한 쇼의 활달한 진행자로 변신한다. 어려서부터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 속에 살아온 스테판은 심기일전해 파리로 날아온다. 아버지를 여의고 마법사와 연애 중인 프랑스인 어머니 크리스틴이 그에게 소개한 일자리는 달력 만드는 회사.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고 창의성이 희박한 일은 스테판에게 스트레스를 안길 뿐이다. 한편 스테판은 아파트 이웃의 아가씨 스테파니에게 끌리는 자신을 깨닫고 그녀에게 집착한다. 일과 연애감정이 배설하는 좌절은 기괴한 전조와 환상으로 변해 스테판의 꿈속에 등장한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테판의 혼돈스러운 꿈은 다시 그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내몬다. 스테파니는 신기한 장난감들- 심지어 독심술 기계와 타임머신을 포함한- 을 만들 줄 아는 재능있고 천진한 남자에게 호감을 품지만 그의 생떼와 위악에 지쳐간다.

 

# 꿈의 해석과 꿈의 구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꿈 해몽집인 줄 알고 읽기 시작한 적이 있다. 이내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에 책을 집어던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꿈의 해석이나 점쟁이의 꿈 해몽이나 꿈을 기호와 은유, 상징으로 대한다는 점에선 상통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다양성을 의미의 단일성으로 환원시킨다. 꿈의 이미지는 검열을 피해 변장하고 나타난 억압된 욕망이라는 것. 정신분석은 꿈을 개인적 무의식(프로이트)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집단적 무의식(칼 융)상징으로 읽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꿈은 욕망이나 상징을 표현하는 장치가 아니다. 미래를 예고하는 전조(前兆)도 아니다. 공드리는, 그러니까 스테판의 입을 빌린 공드리는 왜 굳이 꿈을 해석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꿈과 실제가 뒤섞이고 상상의 전조가 열리고 독심술과 타임머신이 가능한 현실이면 안되느냐 묻는다. 이 영화는 수면의 해석학이 아니라 수면의 과학이다. 물론 감독은 나도 프로이트 책 몇권쯤은 읽었다는 티를 초반부에 내고 싶어하지만, 이내 자기의 방식대로 나아가며 비과학적 수면의 세계가 얼마나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무의식의 터가 되는지 역설하려고 한다. 그게 수면의 과학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리잡은 사랑이야말로 바로 이런 무질서한 모양새가 아니겠냐고 묻는다. 꿈을 해석하며 현실에 반영하고 싶어하고 몽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을 공드리는 마치 엄숙주의라고 비웃는듯하다. 공드리가 그리는 사랑의 세계는 그토록 엄숙한 현실의 세계에 있지 않다.

공드리의 영화에서 잠든 연인은 오래된 아이템이다. 그들은 잠만 자지 않고 꼭 꿈을 꾼다. 그러니까 꿈. 공드리를 뮤직비디오계의 발명가 자리로 만든 그 시절의 작품들에는 참으로 많은 인물들이 잠들고 꿈속을 헤매고 또 깨어났다. 꿈은 현실을 덮어 서로의 경계를 뒤섞어버리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관계의 맥락을 무너뜨리는 초절의 무기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자기와 타자의 관계마저 뒤섞어 버리는 초절의 무기. 그리고 이런 초현실적인 상상의 장면들은 대개 너무나 사랑스럽다.

<수면의 과학>에서도 그런 장면들은 여전하다. 꿈속에서 바위만하게 커지는 스테판의 손, (그 손은 첨단의 그래픽 기술이 아니라 그냥 커다란 소품으로 무작정 대체해버린다) 서투른 애니메이션 요소, 조악해 보이지만 그래서 그 빈틈으로 상상력을 초대한다. 1초 타임머신 기계와 독심술 기계처럼 말도 안 되는 장난감들이 등장한지만 그것들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면서 실제의 장면을 지배해버린다. 공간의 변환은 영화적이라기보단 연극적이다. 영화적 배경보다는 연극적 무대에 가깝게 장면이 배치된다. 음악과 미술, 색 모든 곳에서 경계를 허무려는 듯 기존의 것들에 상상의 기재를 덧씌운다. 영화라기보단 공드리의 두시간짜리 꿈에 초청받은 듯한 연출이다. 영화는 대단히 자유롭다.

 

# 언젠간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유롭다는 말은 일견 아름답고 상쾌하지만 실은 산만함과 무질서에 대한 유아적 욕망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스테판의 동료는 산만함은 생산성을 저해한다고 일갈한다. 사실 이 대사는 공드리가 주변으로부터 숱하게 들어왔을 말이지만 영화 속 스테판도, 그리고 그 인물이 자기의 분신이라고 말한 바 있는 공드리도 끝내 그 말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가 유치하다고 지적해도 공드리는 스테판이 그랬던 것처럼 꿈의 세계는 본래 유아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러면 안되느냐고 되묻겠지.

<수면의 과학>은 유아적이기 짝이 없는 스테판이 어머니를 떠나 다른 여자를 찾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이건 아이의 꿈이다. 스테판에게 스테파니는 현실원리를 대변한다. 그는 그녀를 통해서만 현실과 화해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실은 스테판은 스테파니를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테판에게 현실의 창구인 스테파니는 스테판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현실을 강요하고 꿈의 세계를 부정하던 하버지. 그래서 스테판을 스테파니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사랑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그저 너는 나의 창의성을 칭찬해줘야 한다고 요구할 뿐이다. 어쩌면 스테파니에 대한 스테판의 사랑은 자기애의 연장일 뿐이다. 자기가 두려워하는 상상을 실재로 둔갑시켜놓고 스테판은 강박적으로 스테파니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떼를 쓴다. 토라진 아이처럼 울며 보채다 제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다 일을 그르치고, 이 모두는 스테파니를 지치게 한다. 스테판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벽에 부딪힌다. 스테판은 꿈을 꾸기 시작하고, 거기서만 골든 포니 보이를 타고 그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수면의 과학>이 자전적 영화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서 스테판은 감독처럼 창의성에 넘치는 어떤 인간 유형을 대표한다. 나이가 들어도 결코 늙지 않는 영원한 소년’. 영화를 찍기 전 공드리는 실제로 연인과 헤어졌다. <수면의 과학>은 연인에게 버림받은 공드리의 이야기다. 스테판의 입을 빌려 말하는. 그래서 영화의 세계는 공드리의 꿈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 한 편으로 남의 연애사를 유추한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지만 어쩌면 공드리의 연애는 스테판의 연애와 같지 않았을까?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창의적인 천재 감독의 사랑. 자기애의 연장에서 자기의 창의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타자성마저 거부해버린 유아적인 철부지의 사랑. 그래서 <수면의 과학>정말 이제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건가?”라고 애처롭게 저항하는 감독의 자문 같다.

꿈은 총천연색이고 아름답다. 백일몽. 코끼리가 나비를 타고 날아다닐 수도 있고, 기타를 타고 배기음을 뿜으며 질주할 수도 있다. 슬픔은 과장되기도 기쁨이 강물처럼 흐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꿈은 깨어나야 하는 법. 사랑은 현실의 영역이다. 사실 영화도 마찬가지. 현실에선 슬픔도 기쁨도 끝이나게 마련이고 다른 존재와의 사랑은 잠에서 깨어난 현실에서만 가능하다. 영화는 머릿속에서 나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 걸어 다른 이와 함께 나누는 것이다. 사실 자기 안의 세계가 달콤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이 씁쓸하기 때문 아닌가. 공드리와 스테판이 현실에서 또다른 스테파니를 만난다면 그녀를 꿈의 세계로 초청하기보다 꿈 바깥으로 한 걸음 더 나오는 용기를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