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뻔뻔함에 대하여

유시민 “로마시대 검투사 경기보듯..뽑아놓고 잔인하다”



처지도 그렇고 깜냥도 그렇고. 그저 말이나 보태면서 스스로 위안삼는 글같은 것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유시민 이 자는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 남의 속 뒤집는 재주는 하늘에서 내는 것일까.


"문재인과 노무현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대통령이 됐다"같은 말을 어떻게 저렇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할 수가 있나. 솔방울로 수류탄이라도 만드신 건가. 근본적으로 권력자를 똑같이 보아선 안된다고 언론을 탓한다. 어불성설이다. '권력'은 인격이 아니다. 선한 권력과 악한 권력이란 있을 수 없다. 권력이란 '위정'과 '피정'(被政)의 역학에서 발생한다. 정치의 자리에 인격을 끼워넣는 순간 정치는 도그마의 종교로 변질된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그의 정치는 옳다' 같은 어리석은 말을 내뱉게 되는 것. 대통령을 뽑아놓고 왜 그를 지지하지 않느냐는 말을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심지어 지식인이고 저술가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일까. 박근혜는 남의 나라 국민들이 뽑았나.


유시민은 '이명박이 감옥에 있는데 왜 아무도 이명박을 신경쓰지 않느냐'고 묻는다. 감옥에 있는 그에게 왜 신경을 써야 하는가. 지금 내 삶에 직결되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문재인으로 대변되는 '권력'이다. 그들에 대한 비판과 감시가 언론의 역할이다. 박근혜가 감옥에 가면 항문검사를 할지 안할지, 이명박이 명절에 어떤 특식을 원했는지를 낄낄거리는 것이야말로 언론의 기능에서 한참을 벗어난 저열함이다. 도대체 왜 '우리편을 들지 않으면 옳지 않다'는 신념을 강변하는가. 그것은 차라리 전도의 영역이다. 요즘은 전도도 그런식으로 하지 않는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유행어는 이명박 시절이 아니라 김대중 - 노무현 정부에서 파생됐다. IMF를 지나 아무나 신용카드를 만들던 금융자본 비대화의 시대. 돈이 삶의 전부라고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벌라고 정부가 강변하던 시대. 사기여도 좋으니 돈을 벌라던 말이 황우석과 심형래와 용산참사와 쌍용차 사태를 만들었다. 유시민은 "박근혜가 박정희의 고도성장 신화를 부추겼다"고 하지만 고도성장을 위해 다이나믹 코리아를 외치고 스크린쿼터를 없애고 광우병걸린 쇠고기를 들여오면서까지 한-미 FTA를 추진했던 것도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 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가. 그러면서 왜 문재인을 욕하는 뉴스가 가짜뉴스라고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나.


이 정부의 국정수행 능력은 바닥이다. 대부분 산업의 지표는 최악을 가리키고 있다. 특히 한국경제를 지탱해오던 주요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건설 경기는 역대 최악의 수준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하겠다고 변죽을 울렸지만 정작 최저임금 인상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사노위는 노동자를 포위하고 목숨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다. 눈속임이다. 양두구육 같은 사자성어를 배우기에 적합한 사례일까. 산업정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제시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한다고 볼멘 소리를 낸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현재의 정책이 결국엔 실패를 만들 것이라고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하고 사회적 투자와 공적 서비스의 확충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 모든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나온 것이 광주형 일자리와 삼성 바이오의 분식회계 눈감아주기와 한국GM의 법인분리다. 경제적 정의도 원칙도 자기들의 말에 대한 책임도 없는 이들이 '선한 권력'이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전 장관이면서 자칭 지식인이고 전대통령 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공적 자리에서 할 수 있나.


멍청이 아니면 사기꾼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지금 굴뚝 위의 노동자들에게, 전광판 위의 택시 노동자에게, 컨베이어 벨트에서 죽어버린 그 청년의 부모와 친구들에게 말해보라. 이 정부의 산업-경제-노동 정책이 향하는 곳은 당신이 그토록 혐오해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사람들의 지탄을 계속 받아야 한다는 이명박의 정부가 향하던 곳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그보다 차라리 이명박같은 괴물을 호출한 괴물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상가임대차 보호법 개정을 반대하고 한미FTA를 추진하고 당내 여성주의자들에게 해일 앞에서 조개나 줍고 있다며 비난하고 좌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던 유시민과 유시민의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가. 노무현이 죽었다고? 그래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것인가? 그 복수와 양친을 모두 정적의 총탄에 잃은 박근혜가 다짐하는 복수는 얼마나, 왜 다른가.


유시민의 기사를 읽은 비슷한 시간에 굴뚝 위에 400일이 넘게 올라있는 노동자의 글을 읽었다. 세계 최장 고공농성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언론의 수많은 기사에 정작 정권을 비판하고 노동관계 악법을 철폐하라는 절절한 요구는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는 개탄. 도대체 누가 억울하고 누가 슬퍼야 하는가.


콜로세움이라고 했나. 잔인하다고 했나.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누구이고, 그걸 보면서 '보는 내가 다 아프네' 수준의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잔인한 사람은 누구인가.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떡밥엔 찬성하지만 낚이는 건 싫습니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떡밥엔 찬성하지만 낚이는 건 싫습니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2012년 대선에서 난 문재인을 찍었다. 그즈음 숱했던 술판에서 “문재인이 이명박이나 박근혜와 다를 게 뭐냐”고 말했다. FTA와 대추리, 비정규직법, 부안, 이라크 파병 등등등. 참여정부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만큼, 혹은 그보다 더 노동자와 농민, 민중들을 괴롭혔다. 그 때도 지금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문재인을 찍었다.

이번엔 좀 빠르게 고백하자면 난 심상정을 찍었다. (더구나 나 혼자 조용히 심상정을 찍는데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 심상정을 찍자는 독려도 좀 했다.) 여전히 숱했던 술판에서 난 “심상정은 또 문재인과 다를 게 뭐냐”고 했다. 진보정치를 참칭하는 자유주의 정치, 페미니즘을 자처하면서 당내에 창궐하는 ‘한남충’들에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비겁함, 피와 눈물이 치열하게 쌓아올린 진보정당의 성과를 갉아먹은 기회주의. 그런 말을 했다. 이런 생각도 당분간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엔 심상정을 찍었다.

# 떡밥에 낚이지 마세요

당연하지만 문재인이 대통령이 됐다고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새 대통령은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지만 실상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직고용 정규직 전환보다는 임금을 비롯한 노동조건은 그대로 둔 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중규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찾았을 때 이런 우려를 제기한 노동자에게 “한 번에 다 얻으려 하지 말라”고 답한 건 우려를 더 키운다. 인천공항공사가 ‘좋은일자리 TF’를 만들면서 자회사 설립을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정규직화, 노동중심 같은 말은 사실 떡밥이다. 떡밥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간 결과 비정규직 법안이 만들어졌고 대추리와 이라크엔 군대가 파병됐다. 떡밥에 낚이면 실상 우리의 삶은 저들의 정치에 포섭된다. 그 포섭은 저들의 알리바이가 된다. 그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 늬들도 좋아했잖아.” 안타까운 건 아직도 자기들이 낚인지 모르는 어망 속의 물고기들이다.

정의당으로 표상되는 한국의 ‘진보정당’도 마찬가지다. 본래 진보 운동은 거개의 권력과 자본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함으로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적대함으로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에 진보와 정치의 공간을 만드는 작업. 그러나 진보정당은 진보보다는 정당에 방점을 찍음으로 공적 영역과 권력에 포섭됐다. 진보 ‘정당’의 정치는 새로운 것으로의 전복보다는 체제를 용인함으로 얻는 안정적 지위에 국한됐다. “사회적 합의가 용인하는 진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같은 거다. 중식이 밴드의 여성혐오 가사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김지연 성우 부당해고에 이은 당내 메갈리아 논쟁에 대처하는 정의당의 방식이 그랬다. ‘안정된 진보’의 떡밥에 낚이면 상상력과 자생성을 박탈당한다. 균열을 두려워하게 되고 마침내 체제에 순응하게 된다.

# 그렇지만, 떡밥을 버리진 마세요

문재인이나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 해서 나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토록 지껄이면서도 정작 그들을 찍은 이유는 어쩌면 그게 ‘연대’의 본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대란 본질적으로 서로가 가진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2012년, 문재인은 쌍용차 해고자의 복직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연히 그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노동 문제의 상징과 같던 쌍용차를 언급함으로 자신의 개혁 이미지를 공고히 하려 했을 뿐이다. 그가 대통령이 됐다고 쌍용차의 해고노동자들이 일거에 복직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건 고작 대통령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적어도 노조가 박근혜 정부에서보단 조금 더 유리한 고지에서 투쟁하고 협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언급’의 힘은 딱 그만큼이다. 그리고 딱 그만큼을 위해 난 문재인을 찍을 수 있었다. 문재인은 표를 얻고 ‘우리’는 딱 그만큼을 얻는 거다. 이번 선거에서 심상정에게 표를 준 이유도 마찬가지다. 계속 열세였던 심상정이 TV토론에서 성소수자 문제에 자기의 1분을 할애하는 순간, 멀리서 찾아왔다는 성소수자 청년과 얼싸안던 그 순간 심상정의 지지율 그래프가 움직였다. 그렇지만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고 소수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심상정이 득표한 수만큼 혐오가 조금 ‘주춤’할 것이란 기대. 그녀에게 준 ‘표값’으로 내가 기대한 건 딱 그만큼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고 쿨하게 다시 헤어지는 것. 그게 연대의 본질이다.

정치인을 이용하는 건 그들을 논리적 모순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들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 표를 구하러 다닐 때와 이후의 말이 달라진다면 우리는 말의 무기를 쥐고 그들을 다그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죽어도 그들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시혜와 권력의 크기를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저 애초부터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용할 거리들은 차고 넘친다. 낚시 바늘을 피해 떡밥을 야금야금 물어뜯을 방법은 많다. 난 낚이는 것은 싫지만 떡밥엔 찬성한다.


[워커스 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