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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비밀’ - <세상의 모든 계절>

[영화리뷰]

 

삶의 비밀’ - <세상의 모든 계절>

 

성지훈

 

언제나 더 행복해지길 바라지만 행복해지길 바라서 영원히 행복하지 못하고 부유한다. 고작 지나온 것들만을 뒤늦게 인식하는 존재에게 현재란 고작 쌓인 과거의 무덤일 뿐이고 미래란 유예된 과거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인식은 더디다. 그래서 고정된 상태로의 행복같은 건 없다. 행복이란 오직 지향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을 손에 쥐길 바라기 때문에 삶은 괴로워진다. 행복이란 것이 없다면 행복의 대립항으로서의 불행도 없다. 있지도 않은 것에 자기 삶을 우겨넣기 때문에 괴로워진다. 그래서 어쨌거나 삶은 괴롭다. 그보다는 사실 삶이란 것은 행복이나 불행 같은 안일한 말 따위로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 “누구나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잖아요?”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은 노부부 톰과 제리, 그리고 그들의 친구 메리의 이야기다. 톰과 제리는 그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과 달리 매우 이상적이고 행복한 부부다. 남편 톰은 인자한 지질학자고 톰의 아내 제리는 상담치료사다. 그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한다. 그들은 능숙하게 요리를 하고 때때로 친구들을 불러 함께 식사한다. 주말엔 농장에서 정성스레 작물을 가꾸고 잘생기고 위트있는 변호사 아들이 연인과 함께 가끔 찾아온다. 부부는 경제적으로 넉넉하며, 학식이 풍부하다. 저녁 식탁의 대화에서 늘어가는 탄소배출량을 고민할만큼 정치적으로도 깨어있다. 그야말로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가정.

 

메리는 제리의 직장동료다. 제리가 일하는 병원의 비서직 사무원이다. 메리는 제리 부부와 달리 학식이 부족하고, 이혼했으며, 가난하고, 외롭다. 그래서인지 알콜 의존증도 있다. 거기다 무엇보다 너무 수다스럽다. 메리의 삶은 비참하고 불행한 삶이다. 누구의 삶을 감히 불행하다고, 비참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느냐만 메리의 삶만은 확실히 불행하며 비참하다. 메리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그래서 메리가 밝은 전등 불빛에 달려드는 날벌레처럼 제리의 주변을 멤도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작은 질량의 사물은 더 큰 질량의 물체에 끌려간다는 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이던가. 제리는 자신의 환자를 대하듯이 메리를 받아준다. “Yes”라고 말해주며 메리의 끝없는 수다에 귀를 기울인다. 아마도 메리는 그들 곁에 있음으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나아가선 자신도 그들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실은 메리도 알고 있다. 자신은 결코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문제는 메리가 톰과 제리의 아들 조에게 연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들의 행복한 가정에 편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면서 불거진다. 그 순간 언제까지고 메리를 안아줄 것 같았던 제리의 연민은 싸늘한 외면으로 변모한다. 마치 불길한 전염병을 만난 것처럼. 행복은 불행의 침범을 차단한다. 메리는 앞으로 더욱 외롭고 괴로워지겠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영화는 아무런 과장도 없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쓸쓸함을 표현해낸다. 메리는 말없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그대로 묻어있는 얼굴로. 아무런 대사가 없지만 메리는 마치 누구나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잖아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 봄에는 꽃을, 여름에는 열매를, 겨울에는 소멸을.

 

<세상의 모든 계절>은 노부부 톰과 제리, 그들의 친구 메리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메리와 메리의 궁상을 지켜보는 우리, 그보다는 메리보다 더 궁상맞은 삶을 살고있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의 삶은 메리의 삶을 닮아있다. 늘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욕망 그 자체보다 욕망이 초래한 결핍에 집중하는.

 

영화는 행복의 상징과 같은 톰과 제리 부부보다는 그 주변에서 자기의 삶을 학대하는 이들의 편이다. 영화는 행복한 (혹은 행복한 것으로 여겨지는) 노부부를 제시하고 영화의 시선은 그들을 응시하며 부러워하는 이들의 자괴감과 궤를 맞춘다. 불면증 환자 자넷과 홀아비 뚱땡이 켄, 세상에서 무감한 로니, 그리고 메리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들을 지켜보기보다 이들이 되어 톰과 제리 부부를 지켜보게 한다.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 자체보다는 그걸 바라는 일에 집중하는 메리와 켄과 로니와 당신과 나.

 

비단 영화가 지시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은 늘 제리와 톰을 바라보는데 익숙해 있다. 그들의 주변을 맴돌고 그들 속으로 편입되길 바라지만 결코 그리 들어갈 수는 없다는 걸 실은 알고 있는 삶. 그래서 늘 부유하는 삶. 부유를 불행이라고 부르는 삶. 우리는 결핍된 것을 욕망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 반대다. 욕망은 욕망 그 자체로 존재하며 욕망이 결핍을 초래한다. 삶을 생산하는 원동력인 욕망대신 욕망이 초래한 결핍에 집중하다보니 당신과 나의 삶은 때때로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자기의 삶을 부정하기 바빴던 메리처럼.

 

행복이라는 안일한 말로 치부했던 제리와 톰의 삶은 실은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일 따름이다. 애초에 행복이라는 거창한 말은 언어의 유희일 따름이다. 삶은 시간을 따라 변모하며, 매 순간의 욕망도 변모하기 때문에 고정된 개념의 행복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불행도 없다. 그저 순간 순간 자기 삶의 존재를 긍정하며 마주보며 웃는 것. 세상에 있는 모든 계절을 마주하고 괴로워하다, 웃다, 살아가다 사라지는 것. 삶의 의미란 고작 그런 것이다.

 

영화에서 제리 부부는 텃밭의 작물들을 소중히 가꾼다. 영화는 4계절의 하루씩을 보여주는 데 철마다 톰과 제리 부부가 텃밭을 가꾸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 부부의 삶은 욕심내지 않고 꾸준하고 차분하게 가꿔온 텃밭 같다. 때가 돼 씨를 뿌리고 잎을 가꾼 뒤 열매를 수확하면 식물은 죽는다. 봄에는 꽃을, 여름에는 열매를, 겨울에는 소멸을.

 

# 삶의 비밀

 

살다가 어쩌면 인생을 관통하는 한 줄의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고 산을 오르지만 실은 그런 건 없다. 미래엔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삶에는 해결같은 것이 없다. 삶의 비밀, 그리고 비극은 바로 그것이다.

 

머피의 법칙,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행과 불운은 모두 내 삶으로만 기어들어오려는 것 같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어젯밤 어느 술자리에서도 누가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불행 올림픽을 개최했지만 실은 그런 것도 없다. 삶의 비밀, 삶의 희극은 그런 것이다. 이러쿵저러쿵 삶을 계획하며 도무지 행복해지지 않는 삶의 우울증에 시달리지만 그건 어쩌면 봄에 열매를 바라서, 가을에 꽃을 바라서 그런 것일지 모를 일이다.

 

행복도 없고, 그래서 불행도 없고, 해법도 없고 해답도 없는 것이 삶이라 삶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이 넓은 세계에서 누구 한 사람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존재는 먼지보다도 작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 먼지같은 삶에 주어진 찰나의 순간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더 거대한 것을 바라다 불행해질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자기 욕망에 솔직해질 것,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을 사랑할 것, 남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직시할 것, 나의 가능성을 상상할 것, 즐겁게 웃으면서 살아갈 것. 고작 이것이 삶의 진짜 비밀이다. ‘고작이것을 못해 불행해지고 있는 셈이다.

 

이까짓 것들을 고작이라 부르든 행복이라 부르든 그것은 상관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삶의 비밀을 주변에 널리 전염시키며 살아갈 것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