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9. 16:33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축이 되는 디딤 발이 흔들려서 킥이 정확하지 못하니까 공이 떠버리는 겁니다”
한 때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축구 해설가였던 신문선은 늘 ‘축’과 ‘디딤발’을 강조했다. 간과하기 쉽지만 정확하고 강한 킥을 위해서는 공을 때리는 발보다는 땅을 딛고 있는 디딤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강속구 투수에게 강한 어께만큼이나 튼실한 하체와 균형 감각이 더 중요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 끝내 강력하지도, 정확하지도 못한 킥을 날린 채 끝을 맞았던 것도 축과 디딤 발이 튼실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드라마의 ‘킥’이 결국 멜로라인이라면 김병욱 감독이 구축한 하이킥의 세계의 멜로라인을 지탱해주는 축은 ‘해학’이다.
해학이란 현실에 기반한 웃음이다. 비극적 현실에서 파생된 희극이다.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조언이야말로 해학의 본질을 꿰뚫는 경구다.
그동안의 하이킥 시리즈는 오직 물질만을 숭앙하는 자본주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소외된 개인, 사랑조차 철저히 계급적인 세상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김병욱 감독의 정확한 ‘눈’이 디딤 발과 축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튼실한 축을 바탕으로 한 킥은 지붕을 뚫어버릴 듯 거침없는데다 정확했다. 높은 시청률과 스타탄생은 성공한 슈팅에 이은 일종의 세리모니였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도 그랬다. 2012년을 돈의 해로 규정한 이적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적응’ 혹은 ‘종속’돼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야기는 수 십 년간의 인간관계를 금전관계로 전복시키면서 시작했다. 가부장의 권위도 사실은 ‘금력’에 기반 하고 있었음을 폭로했다. 금력의 상실이 곧 권위의 상실로 이어졌음을 인정하지 못하던 내상은 급격한 스트레스에 부닥쳤다. 123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좋았던 유선의 ‘완경’ 에피소드도 경제가 ‘몸’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완성과, 이별, 새로운 삶에 대한 이미지들은 그냥 차치하더라도.
그러나 갈등은 너무 쉽게 봉합됐다. 남한사회에 사업에 실패한 가정은 숱하겠지만, 복권당첨으로 재기의 기회를 잡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취업에 애를먹던 취업준비생이 용감하게 꿈과 희망을 담은 대기업에 지원해서 합격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현실적 난관’을 무시하고 말이다.
숏다리들의 기습적 하이킥은 통쾌하겠지만, 사실 그 궤적이란 롱다리의 미들킥보다도 낮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세경이 행복해지기 위해 시간을 멈춰야 했던 것처럼 짧은 다리들의 역습도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한다. 짧은 다리들의 하이킥이란 그저 통쾌함으로 건네는 위로가 최선이다.
희망과 행복이란 절망과 불행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과 불행을 정확히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망조차 하지 못한 희망이란 거짓이고 불행해본 적 없다면 행복 할 수도 없다. 사실 희망과 절망, 행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하이킥의 매력은 그 종이 한 장을 포착해 내는 지점에 있었다. ‘짧은 다리의 역습’이란 이름처럼 이번 시즌이 그 불행과 절망의 순간들을 가장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담을 수 있었을테지만, 절망은 방치됐고, 불행은 외면당했다. 현실이 거세된 그렇고 그런 가짜 희망극. 무책임한 ‘1년 후’ 혹은 ‘그들은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주문과도 같았다.
이건 해피엔딩, 혹은 시청자들이 강요하는 ‘강박적 행복’에 대한 김병욱 감독의 신물이거나 납득이거나 항복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롱일 수도 있겠다. 사실 김병욱 감독의 전작들 중에는 해피엔딩이 아닌 작품이 없다. 김병욱 감독의 최고작이라 꼽고싶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도 마지막 회,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왔지만 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삶은 늘 죽음을 곁에 두는 것이며 죽음조차 일상인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붕킥의 세경도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 삶, 물질, 풍요가 행복을 가늠하는 오직 한가지의 잣대가 아님을 김병욱 감독과 하이킥의 세계는 알고 있었고 행복과 불행은 총량의 법칙에 따라 움직임을, 마냥 행복할수만도, 마냥 불행할 수만도 없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절망에 대한 응시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행복을 탐구하는 모습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이킥의 주인공들은 늘 안주하지 않고 떠났다. 발전이란 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삶, 관계로. 그러나 짧은 다리의 역습은 아무도 떠나지도, 상처받고 치유하지도, 변화하고 발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완성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겠지만, 사실 그런 삶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이킥 시리즈는 이제 끝났다.
하이킥의 결말을 예측해본적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를 가진 두 인물은 이적과 크리스탈이었다. 이적은 늘 그런 삶의 태도를 후회하고 환멸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가장 잘 관철한다. 크리스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 (젊고 예쁜 여자의 성적 매력이 대표적인데)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워간다. 미국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아빠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자신의 기질적 특성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그녀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본성을 발각당하지 않았다) 난 그 둘이 결합할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결합하는 것. 일종의 M&A 같은거다. 크리스탈은 자신의 미모와성적 매력을 팔고 이적은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낭만이 없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금전적 능력으로 젊고 예쁜 여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원시시대에 사냥 잘하던 남자가 애 잘 낳는 여자와 결합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신적 가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매력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의 시대의 낭만이란 그런 것.
지원이는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갈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의사가 될 거라고. 그녀의 말대로 늘 재미없어하겠지만 적당히 재밌는 척 해주면서 그렇게 삶을 살아갈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계상이 걸은 길이기도 하다. 그 결핍감을 봉사활동이니 보건소근무니 하는 것들로 보충하겠지만, 그건 본질적인 건 아니니까. 그렇게 적당히 불행하고 적당히 윤택하고 적당히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원이 뛰쳐나가서 정말 르완다로 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아마 좌절할거야. 르완다 비자가 그리 쉽게 나오나..ㅋ
종석이는 떠난 사랑에 좌절하고 적당한 성적에 명문대엔 지원했다 떨어지고 삼수해서 수도권 4년제 대학쯤에서 연애하고 술마시다 군대에 다녀오고 가끔 아이스하키를 보러가는 잘생긴 중소기업 직장인 쯤이 될거고, 진희는 언제까지고 골골거리면서 고시원을 전전하다 그럭저럭한 회사 비정규직 경리직원으로 살아가다 과장쯤 되는 남자랑 결혼할거라고 생각했다. 종석이 명문대에 지원하고, 진희가 꿈과 희망으로 대기업에 지원해보는 것. 그리고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한땐 나도 잘나갔지’를 주섬거리는 것이 짧은 다리들이 날릴 수 있는 역습의 궤적이다. 애초에 짧은 다리들에게 하이킥으로 경기를 역전하기란 불가능 한 일.
다만 희망이란 그렇게 수태날리는 숏다리들의 로우킥에 천하역사도 쓰러지는 법이란 사실이다. 본야스키의 로우킥이 최홍만과 밥샙을 자빠뜨렸던 것처럼. 그러나 어쩌다 날린 하이킥 한방에 들뜨다간 또, 자기가 그런 하이킥 날릴 수 있을거라고 믿고 로우킥 연습 안하다간, 밥 샙한테 신나게 두드려맞는다. 세상은 원래 롱다리들 편이다.
덧,
- 시즌 시작할때는 오직 백진희 편이었으나 지금은 박하선도 좋아연.
- 이종석에 박하선, 크리스탈까지. 김병욱 감독이 신인배우 알아보는 눈은 정말 매의 눈입니다.
2012. 1. 7. 06:23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그녀는 왜 이런 표정을 지어도 아름다운 것인가.
그녀의 작품중 가장 좋아하는건 런닝,구. 종종 이렇게 단편을 찍어주면 더 좋겠다.
2012. 1. 1. 10:19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헌정앨범은 당연히 별로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존경하는 뮤지션의 아우라를 넘어서기 위한 앨범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대해야 할 것은 상상력이다. 그리고 솔직한 고백이다. "난 이 노래를, 이 뮤지션을 좋아해서 이런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를 보여주는 고백.
일단 나는 거장이라거나 노인, 세월 같은 키워드에 굉장히 약해지는 어른공경컴플렉스 환자라는 것을 밝혀두자.
하지만 그럼에도 이 앨범이 엄청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가 그 전설의 밴드 들국화의 한 축이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위에 나는가수다에 대한 얘기도 있지만 지난 노래들을 다시 부르는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자신의 노래들이라면 그 부담은 더하다.(만약 자신의 노래라 더욱 쉽다면 그건 가짜예술이다. 자기복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건 지난 시간을 긍정하는 동시에 현재를 살아 한 걸음 나아가야하는 때문이다. 안주하지않는 삶의 증명.
난 들국화의 시대를 살진 않았지만 들국화의 위대함은 알고있다. 그래서 난 이 앨범의 노래가 역시 위대하고 30년쯤 후에 어느 찌질한 블로거가 역시 들국화와 조덕환의 위대함을 곱씹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
Flightless Bird American Mouth로 대변되는 그간의 아이언 앤 와인과는 또 다르다. 기타 한대에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던 미국의 조동익같은 사람이었는데 현란한 비트와 사운드가 귀를 잡아끈다. 그런데 이게 좋다. 그건 아마 사운드가 덧씌워져도 티가 나게 마련인 좋은 멜로디와 예쁜 목소리때문. 그동안과는 조금 다른 음악을 상상하는 듯한 샘교수님의 다음이 더 기다려진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는 인터뷰중에 아버지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얘기를 꺼내면 두말없이 자리를 떠나버린다고 한다. 후광이란 간절하고 감사할때도 있지만 지워내고 싶을만큼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거다. 조동희는 그런 엄청난 후광을 갖고 있다. 그녀의 오빠, 조동익과 조동진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기는 커녕 가장 앞장에 넣을 것인지 표지에 넣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뮤지션이다. 요 며칠전에도 술자리에서 조동희 얘기를 꺼내다 그녀를 조동익의 동생으로 소개해야했다.
그녀는 그 후광을 거부하지도 거기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그저 오빠들의 조언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자기의 노래를 완성했다. 그렇게 나온 첫번째 앨범. 지나간 시간들의 힘일까 아니면 정말 그건 핏줄의 힘일까 조동희의 노래엔 억지도 부담도 없다. 그 독백같은 목소리로 그저 담담하게 지나온 날을, 앞으로의 삶을, 소중한 것들을 노래한다. 슬프라고 강요하지도 기쁘라고 윽박지르지도 않는 자기 노래. 이 조씨남매들의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12. Paul Simon - So Beautiful Or So What
관계가 가져오는 삶의 변화를 믿지는 않지만 좋아한다. 그건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걸 찾아서 헤매는 일과 비슷한거다. 시간이 멈췄던 애나는 훈의 시계를 받아 시간을 다시 돌린다. 화면은 훈과 애나 둘을 잡지만 주인공은 그 사이 어느께에 있는 둘의 관계다. 마지막 장면, 오지 않는 훈을 기다리면서 마침내 웃는 애나의 변화.
색,계에서부터 주목이야 했지만 탕웨이가 이렇게 아름다운 배우인줄은 미처 몰랐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는 시크릿가든이 막 끝나서 온 나라에 현빈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는데, 정말 현빈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탕웨이는 아름다웠다.
2011. 12. 30. 05:19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2011. 12. 15. 16:23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2011. 11. 9. 21:32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2011. 9. 22. 15:22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2011. 4. 2. 23:47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2011. 3. 13. 06:03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2010. 1. 6. 19:24 당신의 노래에 관한 소묘
처음 하이킥 시즌2가 방영된다는 기사를 어느 포털의 메인에서 접하고서 탐탁찮아 했습니다.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로 수년간 변변한 인기 시트콤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MBC의 진부한 상술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죠. 대개의 경우 흥행한 영화나 드라마의 속편은 별다른 미덕 없이, 전작의 후광에만 기대려다 결국 모두에게 외면 받곤 했으니까요. 나아가 그렇게 의미 없는 속편은 전작에 대한 좋은 기억까지도 바래게 만들어 버립니다. 대개의 경우 그러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대개의 경우를 중얼거리면서도 지붕킥 첫 주 방영분을 고스란히 봤습니다. 그것도 정좌하고선. 전작에 대한 변치 않은 애정 때문이었겠죠. 그리고 일주일치의 지붕킥을 몰아본 주말이 지난 월요일 저녁, 다시 TV앞에 앉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악! 이건 대개의 경우가 아니잖아.”
지붕킥이 재밌고 좋은 이유는 우리 사는 모습을 빼다 박은 듯 하기 때문이에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주는 박장대소 보단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는 동감과 여운의 미소가 있기 때문이죠.
## 해리와 미스터 순대. 그리고 우리
전 가여운 신애와 세경이 보다, 해리와 미스터 순대에게 더 많은 감정이입을 합니다. 온 집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갖은 구박과 핍박을 일삼는 해리는, 더 많이 가지려고만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만 하는 우리 사는 모습을 닮지 않았나요? 심지어 해리는 그 작은 몸으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먹어대는 고기 탓에 늘 변비에 시달립니다. 지나친 육식과 불균형한 섭생. 그 때문에 나타나는 질병과 또 질병들. 그러고 보면 그것도 또한 우리 얘기구요. 무엇보다 해리의 외로움에 더 큰 싱크로를 느낍니다. 해리는 부잣집의 사랑받는 막내딸이지만, 사실은 참 외로운 아이죠. 잘못을 혼내주는, 아니 바로잡아 주는 사람도 없고 딱히 이렇다 할 친구도 없습니다. 많은걸 갖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고작 사소한 인형놀이를 함께 하거나 빠진 이를 같이 신기해 해주거나 잘못되고 틀린 행동에 대해 바로잡아 줄 친구도 어른도 없어요. 해리 얘기냐고요? 아니 우리 얘깁니다. 사람도 많고 가진 것도 많지만 사실은 외로워 죽겠는 우리들 얘기요.
미스터 순대는 황혼의 로맨스를 이뤄가는 로맨틱 마초입니다. 황혼 로맨스의 상징인 멋들어진 콧수염도 기르고 있죠. 다리가 좀 짧긴 하지만 이 정도면 숀 코네리인들 부러울까요. 그러나 로맨틱 마초인 미스터 순대는 동시에 구시대적 가부장이기도 합니다. 체면과 권위, 자기과시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겠다고 가정의 생활비를 강제적으로 줄이고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기도 하죠. 며칠 전엔 심지어 자기를 욕보였다고 20년 넘게 성실히 일한 우리의 봉실장을 해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장의 권위, 사장의 권위를 운운합니다. 그에게 가정이나 직장이란 그렇게 장의 권위만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곳 인가 봅니다. 이 사람을 보면서도 저는 우리들 사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들을 전부 포함 할 수 있는 그 말이요. 바로 ‘소통의 부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소통이 뭔지 모르는 것 같은 또 다른 어느 ‘장’을 떠올리지 않아도 바로 우리부터 가족 간에, 친구 간에, 직장에서, 사회에서 너무 소통 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요?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는 않고 정작 내 얘기를 듣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있지 않은가요? 너무 비약입니까? 저 오바인가요?
## 세경이와 정음이. 그리고 우리
지붕킥의 인기를 책임지며 뭇 남성들은 물론 뭇 언니들의 마음 까지도 설레게 하는 미모의 그녀들은 극중에선 가장 약하고 힘없는 아이들로 나옵니다. 놀기 좋아하고 허영 많은 지방대생과, 집도 절도 없는 가난한 식모.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녀들은 세상이 말하는 루저일지도 모르죠. 그래선지 그녀들은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것도 있어 보입니다. 다른 이의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경이도, 학벌 얘기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음이두요.
외모도 영 별로고 뚱뚱한데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하고 심지어 영어도 잘 못하는 저는 그녀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해요. 세상의 기준대로라면 저 역시도 루저일테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그녀들에게 더 마음이 가고 어떨 땐 콧날이 시큰해져서는 괜스레 콧잔등만 긁어내리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여전히 세상은 돈 많고 명문대 나온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만 좋아하니까요. 에잉~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 메시지
지붕킥의 매력중 하나는 에피마다 한 번씩 등장하는 알듯 모를 듯 한 메시지들입니다. 자옥 아줌마와의 이벤트 비용을 메우려는 미스터 순대의 노력 편에서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한 세경이의 노력이 빛을 발했습니다. 세경이는 세제대신에 쌀뜨물로 설거지를 하고, 난방을 끄고, 변기에 벽돌을 넣고, 과소비하던 사과를 줄이고, 식단을 간소화 하죠. 식구들은 불편해 하면서도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웃음의 포인트는 가정은 나 몰라라 하며 또 자옥아줌마에게 밍크를 사주는 미스터 순대에게 있었지만 전 사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반성을 초큼 했습니다. 빈 방에도 불을 켜거나 난방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음식을 남기고 하던 생활들에 대해 말이죠.
지붕킥은 그렇게 어느 곳엔가 갖은 메시지들을 들여 놓습니다. 가족, 여성, 환경 같은 얼핏 재미없어 보이는 그런 얘기들을 매우 재미있는 소재로 만들어서요. 웃자고 만든 시트콤을 이렇게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제작진이란 말임미다.ㅋ
##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해요. 사랑하는 그들과 사랑하는 우리
전 지난 연말 MBC 연예대상에서 준세커플에게 베스트 커플상 투표를 했습니다. 예쁘잖아요. 걔들.ㅋ 제가 진짜 지붕킥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은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학벌차도 가난도 나이도 무엇도 상관없이 그들은 그래도 사랑을 해요. 우리처럼요.
늘 괴롭히고 괴롭힘 당하는 해리와 신애는 어느 새 알 수 없는 단짝이 됐고, 왠수 같던 지훈이와 정음이는 연애를 시작했어요. 까칠한 준혁이는 첫사랑을 앓고 있고 세경이는 가슴 아픈 외사랑을 합니다. 백수날건달 광수와 인나도, 보석 아저씨와 현경이 아줌마도 티격태격하면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죠. 미스터 순대와 자옥 아줌마도 황혼의 로맨스를 즐기구요.
우리도 그렇게 사랑을 합니다. 왠수 같은 아이를, 더 왠수 같은 남편을, 밉상인 친구를. 서럽고 아픈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하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어요. 서로 상처주고 서로 위로해주면서 세상이 준 상처를 서로 치유해주면서 그렇게요.
어쩌면 세경이와 신애는 쉽게 아빠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어요. 정음이와 지훈이는 서로의 차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헤어질 수도 있고, 미스터 순대는 가족의 반대를 못 이기고 언젠가 다시 가슴 아픈 이별을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래도 그들은 다시 또 사랑을 할 겁니다. 상처받고 넘어져도 다시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처럼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던가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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