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킥 - 숏다리 주제엔 원래 역습같은거 안돼요





“축이 되는 디딤 발이 흔들려서 킥이 정확하지 못하니까 공이 떠버리는 겁니다”


한 때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축구 해설가였던 신문선은 늘 ‘축’과 ‘디딤발’을 강조했다. 간과하기 쉽지만 정확하고 강한 킥을 위해서는 공을 때리는 발보다는 땅을 딛고 있는 디딤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강속구 투수에게 강한 어께만큼이나 튼실한 하체와 균형 감각이 더 중요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 끝내 강력하지도, 정확하지도 못한 킥을 날린 채 끝을 맞았던 것도 축과 디딤 발이 튼실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드라마의 ‘킥’이 결국 멜로라인이라면 김병욱 감독이 구축한 하이킥의 세계의 멜로라인을 지탱해주는 축은 ‘해학’이다. 


해학이란 현실에 기반한 웃음이다. 비극적 현실에서 파생된 희극이다.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조언이야말로 해학의 본질을 꿰뚫는 경구다.  


그동안의 하이킥 시리즈는 오직 물질만을 숭앙하는 자본주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소외된 개인, 사랑조차 철저히 계급적인 세상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김병욱 감독의 정확한 ‘눈’이 디딤 발과 축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튼실한 축을 바탕으로 한 킥은 지붕을 뚫어버릴 듯 거침없는데다 정확했다. 높은 시청률과 스타탄생은 성공한 슈팅에 이은 일종의 세리모니였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도 그랬다. 2012년을 돈의 해로 규정한 이적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적응’ 혹은 ‘종속’돼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야기는 수 십 년간의 인간관계를 금전관계로 전복시키면서 시작했다. 가부장의 권위도 사실은 ‘금력’에 기반 하고 있었음을 폭로했다. 금력의 상실이 곧 권위의 상실로 이어졌음을 인정하지 못하던 내상은 급격한 스트레스에 부닥쳤다. 123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좋았던 유선의 ‘완경’ 에피소드도 경제가 ‘몸’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완성과, 이별, 새로운 삶에 대한 이미지들은 그냥 차치하더라도. 


그러나 갈등은 너무 쉽게 봉합됐다. 남한사회에 사업에 실패한 가정은 숱하겠지만, 복권당첨으로 재기의 기회를 잡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취업에 애를먹던 취업준비생이 용감하게 꿈과 희망을 담은 대기업에 지원해서 합격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현실적 난관’을 무시하고 말이다. 


숏다리들의 기습적 하이킥은 통쾌하겠지만, 사실 그 궤적이란 롱다리의 미들킥보다도 낮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세경이 행복해지기 위해 시간을 멈춰야 했던 것처럼 짧은 다리들의 역습도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한다. 짧은 다리들의 하이킥이란 그저 통쾌함으로 건네는 위로가 최선이다.    


희망과 행복이란 절망과 불행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과 불행을 정확히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망조차 하지 못한 희망이란 거짓이고 불행해본 적 없다면 행복 할 수도 없다. 사실 희망과 절망, 행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하이킥의 매력은 그 종이 한 장을 포착해 내는 지점에 있었다. ‘짧은 다리의 역습’이란 이름처럼 이번 시즌이 그 불행과 절망의 순간들을 가장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담을 수 있었을테지만, 절망은 방치됐고, 불행은 외면당했다. 현실이 거세된 그렇고 그런 가짜 희망극. 무책임한 ‘1년 후’ 혹은 ‘그들은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주문과도 같았다.    


이건 해피엔딩, 혹은 시청자들이 강요하는 ‘강박적 행복’에 대한 김병욱 감독의 신물이거나 납득이거나 항복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롱일 수도 있겠다. 사실 김병욱 감독의 전작들 중에는 해피엔딩이 아닌 작품이 없다. 김병욱 감독의 최고작이라 꼽고싶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도 마지막 회,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왔지만 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삶은 늘 죽음을 곁에 두는 것이며 죽음조차 일상인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붕킥의 세경도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 삶, 물질, 풍요가 행복을 가늠하는 오직 한가지의 잣대가 아님을 김병욱 감독과 하이킥의 세계는 알고 있었고 행복과 불행은 총량의 법칙에 따라 움직임을, 마냥 행복할수만도, 마냥 불행할 수만도 없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절망에 대한 응시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행복을 탐구하는 모습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이킥의 주인공들은 늘 안주하지 않고 떠났다. 발전이란 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삶, 관계로. 그러나 짧은 다리의 역습은 아무도 떠나지도, 상처받고 치유하지도, 변화하고 발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완성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겠지만, 사실 그런 삶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이킥 시리즈는 이제 끝났다.


하이킥의 결말을 예측해본적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를 가진 두 인물은 이적과 크리스탈이었다. 이적은 늘 그런 삶의 태도를 후회하고 환멸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가장 잘 관철한다. 크리스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 (젊고 예쁜 여자의 성적 매력이 대표적인데)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워간다. 미국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아빠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자신의 기질적 특성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그녀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본성을 발각당하지 않았다) 난 그 둘이 결합할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결합하는 것. 일종의 M&A 같은거다. 크리스탈은 자신의 미모와성적 매력을 팔고 이적은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낭만이 없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금전적 능력으로 젊고 예쁜 여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원시시대에 사냥 잘하던 남자가 애 잘 낳는 여자와 결합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신적 가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매력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의 시대의 낭만이란 그런 것.


지원이는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갈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의사가 될 거라고. 그녀의 말대로 늘 재미없어하겠지만 적당히 재밌는 척 해주면서 그렇게 삶을 살아갈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계상이 걸은 길이기도 하다. 그 결핍감을 봉사활동이니 보건소근무니 하는 것들로 보충하겠지만, 그건 본질적인 건 아니니까. 그렇게 적당히 불행하고 적당히 윤택하고 적당히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원이 뛰쳐나가서 정말 르완다로 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아마 좌절할거야. 르완다 비자가 그리 쉽게 나오나..ㅋ 


종석이는 떠난 사랑에 좌절하고 적당한 성적에 명문대엔 지원했다 떨어지고 삼수해서 수도권 4년제 대학쯤에서 연애하고 술마시다 군대에 다녀오고 가끔 아이스하키를 보러가는 잘생긴 중소기업 직장인 쯤이 될거고, 진희는 언제까지고 골골거리면서 고시원을 전전하다 그럭저럭한 회사 비정규직 경리직원으로 살아가다 과장쯤 되는 남자랑 결혼할거라고 생각했다. 종석이 명문대에 지원하고, 진희가 꿈과 희망으로 대기업에 지원해보는 것. 그리고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한땐 나도 잘나갔지’를 주섬거리는 것이 짧은 다리들이 날릴 수 있는 역습의 궤적이다. 애초에 짧은 다리들에게 하이킥으로 경기를 역전하기란 불가능 한 일.


다만 희망이란 그렇게 수태날리는 숏다리들의 로우킥에 천하역사도 쓰러지는 법이란 사실이다. 본야스키의 로우킥이 최홍만과 밥샙을 자빠뜨렸던 것처럼. 그러나 어쩌다 날린 하이킥 한방에 들뜨다간 또, 자기가 그런 하이킥 날릴 수 있을거라고 믿고 로우킥 연습 안하다간, 밥 샙한테 신나게 두드려맞는다. 세상은 원래 롱다리들 편이다. 


덧,


- 시즌 시작할때는 오직 백진희 편이었으나 지금은 박하선도 좋아연.

- 이종석에 박하선, 크리스탈까지. 김병욱 감독이 신인배우 알아보는 눈은 정말 매의 눈입니다.


영광의 재인 - 박민영, 사실 오직 그녀가 답이다




뿌리깊은 나무와 영광의 재인이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기 시작했을 때, 내심 더 마음이 갔던 쪽은 오히려 영광의 재인이었다. 그건 오직 박민영 때문이었는데, "뭐야, 김탁구잖아"라는 반응이 떠올랐던 첫 회의 미적지근함과 "우라질, 지랄하네"를 중얼거리는 세종, 심지어 송중기의 자태를 뽐내던 뿌리깊은 나무의 위용에 박민영에 대한 사랑도 잠시 미적지근해졌었다. (여기서 '민영아, 오빠가 미안해' 라고 하면 나 완전 오덕 인증하는거임?)

여하튼 뿌리깊은 나무에 밀려 본방사수가 힘들었던 영광의 재인의 밀린 부분들을 어제, 오늘에 걸쳐 다시보기했다. 보고났더니, 이거 생각보다 더 재밌는 드라마였네.

# 자본주의 우화

옛부터 자고로 캔디라 함은 돈 앞에 의연해야 했다. 나쁜 짓하고 돈으로 떼우려는 재벌 2세에게 "돈이 전부인 줄 아느냐, 일단 사과부터 해라"라는 대사를 날려주는게 자고로 모든 신데렐라, 캔디류의 드라마 첫 회였다. (그럼 그 당당하고 올곧은 성품에 재벌 2세가 홀딱 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엄청 예뻐서 반하는 거다. 캔디는 주로 김희선이나 최지우가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디는 돈 앞에 의연하지 않다. 돈이 지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 꿋꿋하던 그녀들은 지고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꿋꿋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건 아마 사랑과 낭만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시대의 캔디들에 비해, IMF에 사춘기를 보내고 FTA의 시대에 연애를 해야하는 신자유주의형 캔디들이 갖는 삶의 태도때문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캔디. 어쩌면 우리도, 그녀들도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건 극중의 허영도 팀장의 대사에서도 나타난다.
"정말 비참한 건 잘못을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거야"

여담이지만 모 기업의 광고가 마뜩찮은 것도 같은 까닭이다.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은 좋아질 것도 많다는 말'이라던가. 그건 역시 쌓아올려 나아가는 것만이 오직 옳은 일임을 강변하는 말이다. "돈 벌자고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대신에 "뭐든지 열심히 해서 돈 벌거에요. 빠샤"가 꿋꿋함의 상징이 되는 시대.

조금 유치했지만 영광의 재인은 이런 세상을, 그러니까 세상을 구성하는 계급의 잔인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그곳은 가족을 찾는 일 마저도 '처음엔' 돈의 힘을 빌려야 했다. 주인공들의 정직한 심성은 돈을 대하는 태도로 그려지고, 타인에 대한 호감과 사랑 역시 돈으로 표현된다. 오직 돈만이 세상의 모든 언어고 감정이고 윤리인 시대, 바로 지금. 

# 그래도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보려고 해요

이렇게 한 줄이라도 끄적거리고 싶게 만들었던 건 저 진부하고 오글거리는 대사 때문이었다. 진부하고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에 남겨놓아야 하는 말, 희망.

그토록 싫던 서재명 회장과 닮아가던 재인은 마침내 답을 찾았다. 그건 직원이 곧 회사라는 아버지의 말씀. 그녀는 다시 사람이 희망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을 읊조리면서 모든 희망을 사람에게 건다. 어디서 보기만 하면 하악거리는 소재인 '노동자 자주경영'. 그게 드라마가 하고 싶었던 얘기일테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물려가도 우리 서로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있다는 얘기. 역시 모든 우화는 오글거려도 새겨들어야 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있다. 그들이 권하는 선이란 사람이고, 그들에게서 발견한 희망이었다. 

재밌었던 건 내내 영광의 재인의 앞길을 막았던 뿌리깊은 나무의 주제의식도 같았다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책임이기 때문에 책임질 수 있는 몇몇이 해나가야 한다는 정기준과 정치의 주체는 책임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함께 토론하고 쟁명하여 고통스럽더라도 책임을 나눠가져야 한다는 세종의 대립. 그건 사람에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이와 그럴 수 없는 이의 대립이었다. 정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어떤 답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안일하지 않은 대답을 내놨다면, 영광의 재인은 말했다시피 조금 유치하고 조금 조악하지만 결코 거부 할 수 없는 희망으로 대답한다. 그건 재인이 '기적'이라는 무기를 들고 극을 이끌어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희망은 어쩌면 이뤄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기적같은 희망을 가져요"

냉철하고 정확한 눈도 좋지만, 때로는 무조건적이고 근거따위 없더라도 마냥 희망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도 반가운 법이다. 재인이의 기적처럼.

# 박민영, 사실 오직 그녀가 답이다

고백하자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박민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평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못되고 차가운데다 비관적이기까지 한 도시남자라서 사실 희망의 강요. 같은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의 주체가 박민영이라 이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달까.ㅋ

그녀는 왜 이런 표정을 지어도 아름다운 것인가.


박민영은 예쁜데다 매우 영리하다. 그건 그녀의 작품 선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가 선택했던 작품들은 언제나 평균 이상의 수준을 유지한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더니 자명고를 들먹거리는 이가 있더라만, 자명고는 박민영을 제외하더라도 충분히 가치있는 작품이다. 완전한 파국, 그 섬칫할 만치의 비극을 가졌던 사극이 존재하기나 했던가. 자명고는 훌륭한 상상력의 스토리와 섬세한 감수성이 스몄던 걸작. 흠이라면 시껍할 만치의 시청률과 조기종영일까. 

여하튼 이 영리하고 예쁜 배우에게 홀릭하게 된 계기는 어느 인터뷰. 성균관 스캔들이 끝나고 있었던 그 인터뷰에서 그녀는 “마지막에 대사성이 김윤식 박사라고 불렀다. 마지막까지 동생의 이름으로 박사를 한 거다. 결국 여자로서 인정받은 건 없다”라고 말했다. 극과 캐릭터를 진짜로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말 좋은 시야를 가진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던 계기.
언제나 다음 작품이 매우 기다려지는 배우랄까.

그녀의 작품중 가장 좋아하는건 런닝,구. 종종 이렇게 단편을 찍어주면 더 좋겠다.




##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

예전에 SNS에 중얼거린 낙서인데,

'인생은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벤야민의 경구를 떠올리며 일평생 대충 때우다 가게되면 가고 또 아님 말지 뭐. 하다가도 어느 날은 삶에 당당히 맞서는 무사가 등장하는 무협지에 주먹이 불끈불끈 하기도 한다. 이렇게 흔들흔들 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인가보다. 생각해보니 성균관스캔들에서 정조는 나침반이 흔들리는 한 틀린 방향을 가리키진 않는다는 주옥같은 대사를 날려주신다. 그래, 답은 결국 박민영인 것이다.

이걸로 완벽히 박민영 덕후 인증.ㅋ

2011 '내 멋대로' 올 해의 음반 / 올 해의 영화 결산


딱히 정산할만한 것도 없어서 늘 그랬듯이 올해의 음반과 영화 결산.
당연히 내 멋대로이며 순위는 없고, 가나다순은 복잡해서(귀찮아서) 못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따위도 없다.

음반

1. 코스모스 사운드 - Ep. 스무살


이 생소했던 이름의 노래는 듣는 순간부터 빠져들었다.
기타와 목소리외엔 별다를 것 없는 단촐한 사운드와, 후벼피듯 찌질하고 서글픈 가사는 얼마나 제목에 충실한가.
나는 성대다 류의 뽐내는듯한 보컬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박하고 서툰 목소리의 진심을 더 믿는편인데 한음절 한음절마다 마음을 다 담아서 내뱉는 것 같은 목소리는 금세 그의 세계로 빠져들게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아직도 스무살의 그 쓸쓸함과 절망감의 어귀에서 헤매는 중이라.ㅋ
 Ep를 넘어 나올 그의 정규앨범에 침만 꼴깍꼴깍.

2. 허클베리 핀 - 까만 타이거


나에게 최고의 밴드는 허클베리 핀이다. 사막이나 Somebody To Love가 들었던 2집은 내 생 최고의 음반을 결산하라고해도 반드시 들어갈 앨범.
당연히 늘 기다릴 수밖에 없고 나오면 뛰어가서 앨범을 사고 공연을 봐야했던 이 밴드가 유래없이 규칙을 깨고(허크는 3년마다, 11곡의 노래로, 한글이름의 정규앨범을 낸다.) 4년반만에 낸 앨범.

너무 오래기다린 탓일까(유앤미 블루 앨범도 아직 기다리는 주제에ㅋ) 괜히 이기용이 연애를하는 것 같네, 너무 방방떠서 진중하지도 사유할 수도 없는 것 같네, 이건 변절이네 하며 툴툴거렸지만, 언제나 버리지 못하는 노예근성. 결국 내내 허크 앨범을 듣고, 올 여름의 공연엔 모두 허크가. 그런데. 어라, 이거 좋잖아. 그것도 엄청.

그동안의 허클베리 핀에서 벗어나는 앨범을 만들어낸 이기용은 이 앨범을 백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앨범이라고 자평. 동의한다. 객석을 움직이게 하는 사운드에 얹은 메시지. 베이스가 탈퇴했음에도 더욱 또렷한 리듬감은 백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테다. 심지어 이소영 누나는 치명적인 외모까지 갖게됐다. 하악하악. 옛날에 남상아 언니랑 비교해서 미안했어요.ㅋ 앞으로도 당분간 내 최고의 밴드는 허클베리 핀일듯. 한 백년쯤?ㅋ (아는 사람은 아는 밴드, 한국사람은 논외로ㅋ)

3. 이승렬 - Why We Fail


"이승열 신보 들어봤어요?"
"아니, 아직. 왜?"
"엄청나던데요."
"그렇겠지. 이승열인데"

딴딴함, 완결성, 신뢰감, 명불허전 같은 고루한 말들이 어울릴까.
코스모스 사운드가 처연하고 서글픈 친구의 노래였다면, 이승열은 내 맘을 어루만져주는 큰 형의 위로주같달까.
지루하거나 꼰대같은 맞는 말 퍼레이드가 아니라 고단함과 외로움을 앓을만큼 앓았다 일어선 똑똑한 큰 형. 미국유학 갔을때 놀만큼 놀아봤을것 같은 그런 큰 형.ㅋ 한대수 아저씨와의 콜라보가 주는 신선한 재미는 형님의 위트같은 느낌.ㅎㅎ

4. 2011 들국화 리메이크


헌정앨범은 당연히 별로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존경하는 뮤지션의 아우라를 넘어서기 위한 앨범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대해야 할 것은 상상력이다. 그리고 솔직한 고백이다. "난 이 노래를, 이 뮤지션을 좋아해서 이런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를 보여주는 고백.


들국화 리메이크는 그 미덕을 골고루 두루두루 보여주고 있다. 일단 참여 뮤지션의 면면이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데, ( 그간 있었던 헌정앨범에 메이저씬의 유명한 가수들이 참여에 의의를 두었던 일은 그냥 잊어버리고)  김바다, 허클베리핀, MOT, 국카스텐, 한음파, 이장혁, 몽니, W&Whale, 그리고 무려 테이의 밴드 핸섬피플까지.

곡과 뮤지션을 떼어놓고 어울리는 짝을 찾아주자고 했을 때, 대부분이 이장혁에게 제발을 권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못에게 매일 그대와를 매칭시키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전자는 고백이고 후자는 상상력이다. 모든 트랙이 훌륭하다. 김바다는 시나위 보컬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걸 확실히 보여준다. 그가 외치는 "앞으로!"를 듣다가 정말 앞으로 걸어갈 뻔 했다.(물론 뻥이다ㅋ) 못의 매일 그대와는 마치 음울한 스토커 살인마의 침실을 떠올리게한다. 사랑하는 그녀의 시체 옆에서 매일 아침햇살 받으며 눈뜨는 스토커.ㅋ 몽니의 치기어린 그것만이 내 세상은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 외칠 어린 치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한음파는 어떤 면에선 들국화보다 낫더라는...ㅋ 염려했던 웨일의 사랑한 후에도 무리없고 담백했다. 허크야 말해 뭐해..ㅋ

5. 나는 가수다 3차 경연 - 내가 부르고 싶은 남의 노래


MBC연예대상을 받은 나는 가수다를 빼놓고 올 해를 결산할 수는 없다.
나는 가수다는 이 즈음이 정점 아니었을까 하는. 지금이야 뭐. (인터넷 기사에서 전인권 아저씨가 나는 가수다에 나올 수 있다는 얘기를 봤는데, 반갑기 그지 없다가 괜히 속상해질수도 있단 생각에 마냥 반가워하기도 애매하더라능)

임재범이, 그 임재범이, 무려 그 임재범이 나와서 빈잔을 불렀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게 저렇게 부를 수 있는 노래였구나. 임재범은 애국가나 찬송가에도 롹 스피릿을 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롹 스피릿이라면 이소라의 넘버원도. 사실 이소라가 나가수에서 부른 최고의 넘버는 사랑이야라고 생각하지만 넘버원도 빼 놓을 수 없다. 올 해 최고의 돌풍의 곡임을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가 증명해 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도 이 에피소드에서 불렸다. 여러모로 대단했던 에피소드.

6. 정차식 - 황망한 사내


레이니썬은 그렇게 주목하거나 좋아하는 밴드가 아니었다. 사실 잘 몰라서 더 관심이 없었던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당연히 정차식도 앨범 발매 후 한참이나 지나서야 듣게 됐다.

난 우울함과 쓸쓸함의 정서를 좋아하는데 그 한탄이나 슬픔, 체념의 정서에서 억지 희망의 강요보다 더 많은 위로를 얻기 때문이다. 윽박지르면서 행복하고 재미있게를 가장하는 노래들은 사실 거짓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쉽사리 희망과 즐거움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정차식의 황망한 사내는 그렇게 황망한 슬픔을 노래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즈막한 바람은 없었다. 단지 내가 쓰라리고 아프고 격했던 시간 뿐인걸.] - 용서 中

이 퍼석퍼석한 슬픈 노래들에 위로받는 건 결코 내가 변태여서가 아니다.

7. 꽃다지 - 노래의 꿈


고등학교때 어릴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대학생 형이 '바위처럼'을 들려줬다. 대학에 가면 다들 이런 노래를 듣는다고 했다. 그건 반은 사실이었으나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바위처럼만은 정말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노래였으나 꽃다지로 대변되는 민중가요는 그렇게 흔한 노래가 아니었다. 이미.

어느 시절엔 소위 '빡쎄다'고 표현되는 민중가요들을 즐겨들었다. 학생회실에서 엄청 큰 소리로. 그걸 부담스러워 하는 '학우들'의 찌푸린 얼굴을 오히려 즐기면서 오만했던거다. 그때 울리던 노래들의 많은 목소리가 꽃다지였다. 꽃다지는 어떤 운동권의 상징같은 존재였던거다.

더이상 대학생과 운동권이 등치하지 않고, 민주화는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서 꽃다지는 무대를, 노래와 관객을 잃었다. 더이상 단결과 투쟁을 외치는 결기어린 선언의 노래가 필요치 않게됐다. 그러나 꽃다지는 희망의 노래답게 계속 노래를 불렀다.

이제 꽃다지의 노래는 결기와 분노에 찬 선언이 아니다. 그건 지나온 삶에 대한 고백과 기억이고, 희망에 대한 다짐이고 연대에 대한 위로다. 노래의 꿈이다. 그저 제창하기 쉬운 노래를 벗어나 음악적 성과를 내고, 그 성과로 다시 희망이 움트는 노래다. 그 희망에 동조하는 이들의 연대와 사랑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은 분명 올 해 최고의 음반 중 하나다.

8. 조덕환 - Long Way Home


일단 나는 거장이라거나 노인, 세월 같은 키워드에 굉장히 약해지는 어른공경컴플렉스 환자라는 것을 밝혀두자.

하지만 그럼에도 이 앨범이 엄청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가 그 전설의 밴드 들국화의 한 축이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위에 나는가수다에 대한 얘기도 있지만 지난 노래들을 다시 부르는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자신의 노래들이라면 그 부담은 더하다.(만약 자신의 노래라 더욱 쉽다면 그건 가짜예술이다. 자기복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건 지난 시간을 긍정하는 동시에 현재를 살아 한 걸음 나아가야하는 때문이다. 안주하지않는 삶의 증명.


난 들국화의 시대를 살진 않았지만 들국화의 위대함은 알고있다. 그래서 난 이 앨범의 노래가 역시 위대하고 30년쯤 후에 어느 찌질한 블로거가 역시 들국화와 조덕환의 위대함을 곱씹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


9. Iron & Wine - Kiss Each Other Clean


Flightless Bird American Mouth로 대변되는 그간의 아이언 앤 와인과는 또 다르다. 기타 한대에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던 미국의 조동익같은 사람이었는데 현란한 비트와 사운드가 귀를 잡아끈다. 그런데 이게 좋다. 그건 아마 사운드가 덧씌워져도 티가 나게 마련인 좋은 멜로디와 예쁜 목소리때문. 그동안과는 조금 다른 음악을 상상하는 듯한 샘교수님의 다음이 더 기다려진다.


10. GD & Top - GD & Top


난 힙합이나 랩은 잘 듣지 않아서 좋고 나쁘고의 기준은 아무래도 굉장히 직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절묘하고 기발한 라임과 흥겹고 맘이 동하는 플로우에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그건 결국 간지가 전부라는 뜻이다.ㅋ (물론 전문가들이 그랬듯이 버벌진트나 가리온이 짱이겠지만 난 GD가 박명수랑 만든 랩이 더 좋은걸 어째.ㅋ)

난 이렇게 신나게 양아치처럼 노는 친구들을 본적이 없다.(양아치라는 표현이 거슬릴수도 있으나 이건 굉장히 좋은 의미임. 얽메이지 않고, 말 안듣고 노는 귀엽고 예쁜 동네 말썽쟁이쯤?ㅋ) 특히 GD는 타고난 양아치. Top도 멋지지만 그건 왠지 만들어지고 훈련된 느낌이랄까..ㅋ 그래서 GD는 어저면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아이돌.

11. 조동희 - 조동희 1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는 인터뷰중에 아버지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얘기를 꺼내면 두말없이 자리를 떠나버린다고 한다. 후광이란 간절하고 감사할때도 있지만 지워내고 싶을만큼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거다. 조동희는 그런 엄청난 후광을 갖고 있다. 그녀의 오빠, 조동익과 조동진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기는 커녕 가장 앞장에 넣을 것인지 표지에 넣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뮤지션이다. 요 며칠전에도 술자리에서 조동희 얘기를 꺼내다 그녀를 조동익의 동생으로 소개해야했다.


그녀는 그 후광을 거부하지도 거기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그저 오빠들의 조언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자기의 노래를 완성했다. 그렇게 나온 첫번째 앨범. 지나간 시간들의 힘일까 아니면 정말 그건 핏줄의 힘일까 조동희의 노래엔 억지도 부담도 없다. 그 독백같은 목소리로 그저 담담하게 지나온 날을, 앞으로의 삶을, 소중한 것들을 노래한다. 슬프라고 강요하지도 기쁘라고 윽박지르지도 않는 자기 노래. 이 조씨남매들의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12. Paul Simon - So Beautiful Or So What



말했다시피 거장이나 어른에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이 있다. 그 대상이 폴 사이먼쯤 되면 사실 음반을 듣기전부터 좋을거야란 자기최면을 걸기도..ㅋ 사이먼 앤 가펑클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팀 중 하나기도 하다.그걸 영어로 하면 SG Wannabe(정말이다. 이 팀은 사이먼 앤 가펑클 워너비란 뜻이다).

여튼 그런 어른공경컴플렉스를 감안해도 이 앨범은 충분히 좋다. 풍부한 소리가 나는 포크랄까. 그리고 무엇보다 사이먼 아저씨의 멜로디. 이건 뭐 신사동호랭이 저리가라. 젊은 감각이란 뜻임.ㅋ 이 아저씨도 안주하지 않는 남자. 거장들은 역시 해내주신다. 어른공경컴플렉스를 고칠 생각이 전혀 안드는 이유다.




영화

1. Black Swan - Darren Aronofsky


순수한 욕망이나, 솔직한 광기 같은 것들을 꿈꾸지만 늘 갇혀있다.
그건 이성이나 관습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건 언제나 날 가장 안전한 상태로 있을 수 있게 해주지만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내가 만든 벽에 내가 갇히는 모양. 완벽한 백조여서 결코 흑조가 될 수 없었던 니나는 사실 날, 아니 사실 규칙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우릴 닮아서 더 슬펐다. 그래서 마침내 흑조가 날아 올랐을 때, 니나가 죽었지만 행복했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탈리 포트만과 위노나 라이더. 각자 마치 자신을 연기한 것 같은. 가장 완벽한 백조지만 결코 흑조를 연기할 수 없는 나탈리 포트만은 이 영화를 마치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말로 한물 가버린 여배우 위노나 라이더는 무슨 생각으로 베스를 수락했을까.ㅋ

2. 만추 - 김태용


관계가 가져오는 삶의 변화를 믿지는 않지만 좋아한다. 그건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걸 찾아서 헤매는 일과 비슷한거다. 시간이 멈췄던 애나는 훈의 시계를 받아 시간을 다시 돌린다. 화면은 훈과 애나 둘을 잡지만 주인공은 그 사이 어느께에 있는 둘의 관계다. 마지막 장면, 오지 않는 훈을 기다리면서 마침내 웃는 애나의 변화.


색,계에서부터 주목이야 했지만 탕웨이가 이렇게 아름다운 배우인줄은 미처 몰랐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는 시크릿가든이 막 끝나서 온 나라에 현빈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는데, 정말 현빈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탕웨이는 아름다웠다.


3.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 - Mike Leigh


이상적인 가족공동체에 들고싶은 외로움이야.
하지만 정말 그런 공동체따위 정말 있을까. 그건 사실 내 외로움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어쩌면 그렇게 멋대로 이상을 만들고 거기 들지 못하는 자신을 괴롭히고 외로워하는 자학일기 같은 것.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으랴. 아마 메리는 죽을때까지 화목한 톰과 제리의 가족을 ㅂ러워하면서 자기를 괴롭힐테다. 그건 아마 나도 마찬가지. 외로워서 어디서 눈칫밥이나 얻어먹는 신세를.

마지막 장면이 좋다. 담담하게 그 외로움을 포착하던 그 장면. 올해의 라스트 씬.

4. 혜화, 동 - 민용근


버려진 건 유기견이기도 하고, 손톱이기도 하고, 아이이기도 하고, 자기자신이기도 하다.
버려진 것들을 다시 주워모아 혜화는 마침내 자기 자신도 주워담을 수 있다. 버려진 순간 멈췄던 혜화가 마침내 움직이는(動)이야기. 그 동력은 과거에 버린 것들이지만 혜화는 주워담을 뿐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매력적인 신녀성. 영화 중간에 흐르는 앵콜요청금지가 이 영화의 테마송일까.

유다인은 올 해 발견한 주목할만한 뉴스타. 뭉테기로 볼아주는 방송국의 쓸모없는 뉴스타 상보다 내가 주는 뉴스타상이 훨씬 값진거임. 내가 찍은 배우는 반드시 곧 스타가 된다니까. 백진희도 송중기도 김수현도 그랬어.

5. 굿바이 보이 - 노홍진


비우티풀은 아버지를 긍정하면서 성장했지만, 굿바이 보이는 아버지를 부정함으로 유년기를 마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밍키를 잡아먹은 날, 내 유년기는 끝났다"고 뇌까리던 진우는 아버지의 무덤앞에서 웃음을 흘리고 담배를 피운다.
영화는 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신파도 아니고, 가정을 파괴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정당화하는 영화도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을 미제나 자본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운동권영화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공존했다. 폭력적이고 무능했지만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정함으로 존재를 증명하려했던 누이. 그리고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늘 가해자를 꿈꾸는 소년.

부계, 폭력, 가부장, 경제력, 무능 같은 키워드들로 얼룩진 80년대, 하지만 사실 지금도.

류현경은 10년전 단팥빵에 나올때도 선생님 친구 역할이었는데, 여고생역이 어울리는 까닭은 무엇이냐.

6. 오월 愛 - 김태일


광주는 너무 아픈기억으로 남거나 영웅들의 신화적 싸움으로 남았다. 물론 그건 맞다. 도시 하나가 폭도가 되어 국가에 의해 학살당했고, 그에 맞서 저항했고, 스스로 해방의 도시 대동의 세상을 만들어 살았다. 그걸 가능케한 영웅들도 있었고 이름도 없이 사라진 결코 잊지 못할 아픈 기억들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주던 아줌마들도 있고, 끝까지 도청을 지킬 수 없었던 어린 학생도 있다. 광주를 기억하는 방식도 기억하는 부분도 저마다 다르다. 광주는 결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과거이기도 하고, 절대 잊지 않을 한이기도 하고, 꿈에서나 봤던 아름다운 세상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이 80년 5월의 광주다.

"벌써 이 모양인데 이제 우리가 죽고나면 누가 광주를 기억하겠냐"던 얘기가 제일 가슴에 남았다. 광주가 잊혀질 수도 있겠구나. 그저 역사책 한 페이지에나 나오는 그런 얘기로 잊혀져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7. 고백(Koku Haku) - Tetsuya Nakashima


복수극은 이래야한다. 복수란 스스로 파멸하게 하는 것이다.
냉철하고 치밀하고 야비하게. 어설픈 도덕교과서식 권선징악이 아니라 스스로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 압사하도록 만드는 야비한 복수극. 냉철한 얼굴 뒤에 숨은 뜨거운 복수의 화신.

스토리 전개가 좋지만 것보다 처음 30분가량 복수의 출사표를 던지는 유코선생님의 그 냉정하고 예의바른 선언이 더 오싹하다. 유코가 복수에서 한 액션이란 사실 그게 전부다. 죄 지은 자들에게 쥐어준 제 살을 달아 파멸케하는 저울.

8. 파수꾼 - 윤성현


청소년기 남자애들의 우정이란 생각보다 얄팍하다. 하지만 그 남자애들의 폭력이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하고 허술하다. 그건 개연성도 의미도 없는 그저 존재확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보다 쎄.

파수꾼은 그 지점을 명확히 잡아낸다. 그 폭력이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하지만 그 폭력에서 어떻게 기어나오는지. 그건 우정이니 용서니 하는 알량한 언어가 아니다. 그건 삶에 대한 의지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폭력을 극복한다. 폭력을 극복해내지 못한 의지는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 것처럼.

이제훈을 주목하고 있다. 고지전을 지나면서 벌써 여럿에게 주목받고 있는듯 하지만. 역시 난 신인배우를 집어내는 탁월한 역량이.ㅋ 서준영도 광평대군에 이어 KBS일일 드라마 주연을 따내며 출세의 고속 열차에..ㅋ

9. 비우티풀(Biutiful) - 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


고단한 경계의 삶. 구원과 안식은, 최후에 다가설 그 곳은 가족.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어요.

사실 비우티풀을 넣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하비에르 바르뎀 아저씨의 자태가 잊혀지지 않아서..ㅋ

10. 무산일기 - 박정범 


탈북자들은 125로 시작되는 주민번호를 받는다. 그건 2등시민의 주홍글씨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들은 그저 견뎌야한다.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변해야하고 또 모두 변한다.

승철이 아끼던 강아지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외면하고 돌아설 때 그는 비로소 남한사람이 됐다. 그는 이제 함부로 착한척하지 않을 것이고, 쉽사리 호감을 표현하지 않을 것이고, 요령을 갖고 사람을 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는 2등시민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주홍글씨도 찍어주지 않아 불쌍히 보이는 일마저 차단당한 그게 바로 무산계급이다.

11. 북촌방향 - 홍상수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나면 할 말이 참 많지만 뭐라 한마디 감상문을 적기도 어렵다.
그저 영화속에 나온 술집들을 한번 기웃거리는 일밖엔.

매 영화마다 훅 꽃히는 장면들이 하나씩 있는데,(거의 모든 장면들이 재밌고 좋지만) 이 영화엔 김상중의 찌질한 동조장면. "나도 그 생각해본적 있는데"

나도 그래본적 있는데 말이야, 지기 싫어서 뱉은 말이지만, 대부분 정말 그 생각을 해본적 있었단 말이야.
이런 말 하면 더 찌질해 보일텐데.ㅋ

까메오 대박. 고현정은 그렇다 치고 백현진이라니..ㅎ

12. Source Code - Duncan Jones


평행우주 이론을 이용하는 SF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미드도 로스트. 한창 시즌까지 평행우주에 의한 멘붕들이 일어나는거라고 확신했었.ㅋ

이렇게 스토리가 탄탄해서 러닝타임 내내 집중시켜주는 오락영화를 좋아한다. 국내영화에서 찾자면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같은 최동훈류의 영화들. 치밀한 스토리 구성은 그 자체로 영화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되도않는 이론으로 무장하여 볼거리로 어떻게 쳐발라 버리는 예의 그 헐리웃 영화들은 더욱 혐오스럽달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디워같은.ㅋ

소스코드는 복잡한 주제의식 같은 건 없지만 그 탄탄한 스토리로 두시간동안 숨도 쉬지 않게한다. 올 해 나온 영화들 중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던 영화.

13. 환상극장 - 김태곤, 이규만, 한지혜


옴니버스 환상극장 자체보다는 세개의 단편들 중 하나인 한지혜 감독의 소고기를 좋아하세요?를 꼽은거다.
누구나 지켜보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예전엔 고교야구에서부터 선수를 찍어서 지켜봐오다 마침내 프로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곤 기뻐하며 내 선견지명을 자랑하곤 했다. (임찬규 이형종 한기주같은 애들은 고교때부터 지켜보고 있었..ㅋ) 한지혜 감독의 전작 기차를 세워주세요를 보고선 이 감독이 만드는 또 다른 영화들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환상극장에서 이름을 발견.

사실 기차를 세워 주세요에서 받은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충분히 흥미롭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 기대감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까닭은 감독이 영화를 만들며 하고싶어 하는 이야기들이 흥미롭기 때문일까. 어쩌면 기차를 세워주세요가 엄청 좋아서 아직도 이러는 걸수도 있다.ㅋ 그러고보니 저번에 케이블 티비에서도 틀어주던데..ㅎㅎ



아 이걸로 밥벌어먹는 것도 아닌데, 너무 에너지 쏟았다.
도대체 몇시간을 쓴거야...ㅡㅡ;;

쓰면서 더 생각난 음반이나 영화들이 있지만 여기까지만 해야지.
열심히 한다고 누가 밥사주는 것도 아닌데.


Iron & Wine - Tree By The River

비우티풀 - 아버지, 당신을 사랑 할 수 있을까요





# 고단함

욱스발은 경계에 서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이민자와 원주민의 경계, 연민과 착취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그 경계의 삶은 고단하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마지막 처연한 눈을 보지 못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을텐데. 그저 착취하고 제 배를 불릴만큼 뻔뻔할 수 있다면, 그들의 괴로움에 무관심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는 더 행복할 수 있을텐데. 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이 그를 더욱 고단하게 만든다. 그는 그 고단함을 묵묵히 견뎌내기만 한다. 정신줄을 놓아버리지도 않고, 아이들을 무책임하게 방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괴로움을 쌓아갈 뿐이다. 방출하지 않고 쌓았던 고단함은 한번에 추심을 시작한다. 병이다. 그는 끝까지 고단하다.

그만 유독 고단하고 고독한 것도 아니다. 이냐투리는 세계는 모두 고단하다는 말을 하고싶어 한다.누구는 행복하고 어느 곳은 불행하단 투덜거림이 아니다. 바벨에서부터. 세네갈 이민자들은 백만마리가 넘는 닭을 잡아도 바르셀로나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들은 마약을 팔거나 쫓겨난다. 중국 이민자들은 갖은 착취를 당하면서도 중국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받는다. 그들은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일한다. 욱스발은 그들을 연민하지만 그들을 착취하고 세계는 다시 욱스발을 착취한다. 세계는 모두 고단하다. 영화 내내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도시를 오시하지만 구원따위는 없다. 거의 대부분의 집에 '신'의 그림이 붙어 있지만 사실 어쩌면 신을 가장 간절히 그리는 곳은 바로 지옥이다.



# 가족

바벨에서부터 이냐투리는 자꾸 가족에서 위로를 찾는다. 욱스발은 죽음을 준비하면서 가족을 돌이킨다. 붕괴된 가족은 욱스발의 상처를 마침내 보듬는다. 욱스발은 안나의 곁에서 죽었고, 죽어서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 눈(雪)을 보고, 담배를 피우고, 웃음을 짓고, 질문을 한다. 어머니의 정 같은걸 겪어보지 못했을 남매는 이헤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이헤가 정말로 반창고를 떼어내고 약을발라주는 장면을 상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기도했다.)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이냐투리는 이제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를 떡갈나무 같은 아버지에게 바친다고.

하지만 가족이라는 것이 정말 그렇게 이해하고 위로하는 존재일까. 또 부성이라는 건 정말 그렇게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마음이 따듯해지고 눈물이 나는 일과는 별개로 부성에 대한 강요같았던 텍스트들은, 오직 아버지를 이해하기만 하려는 몸짓처럼 보이던 것들은 좀 불편했다. 그건 가족만이 최후의 보루라는 얘기를 하고싶었던 것 같지만, 그래서 가족에서 위로받는 삶의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난 글쎄. 가족도 고단하고 고독한 세계이긴 마찬가지. 난 차라리 이헤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 버리길, 욱스발이 남매로부터도 고립되길, 마람브라가 차라리 자살해 버리길 바랐다. 어쩌면 그런 완벽하고 갈데없는 절망만이 삶의 진실일지도 모르니까.

가족에서 구한 위로. 같은건 어쩌면 환상. 위로도 연민도 구원도 스스로 해야 할 일.



# 하비에르 바르뎀

길었던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하몽하몽의 잘생긴 육체파 배우였던 이 아저씨는 씨 인사이드의 삶을 사랑하는 안락사 희망자와 단발머리 킬러 안톤 쉬거를 지나 이젠 2시간반 동안 혼자서 관객을 압도하는 본좌가 됐다.

다른 이였다면 가족에 대한 집착이나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계의 삶같은 걸 납득하지 못했겠지만 이 아저씨는그걸 해낸다. 결국엔 죽기직전 화장실에서 자신의 영혼을 목격한 순간, 이 아저씨가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스쳐갔을지 모를 영화를 (21그램이나 바벨이 좋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진 않았던걸 보면 난 이냐투리를 크게 좋아하는 것 같진 않다) 내도록 새겨놓을 영화로 만든 힘은 역시 오롯이 바르뎀 아저씨의 공이다.


도대체 그 길은 무슨 맛이에요? - 아이다호 , My own private Idaho





길이란 떠남을 전제로 머무는 곳이다. 누구도 길을 향해 가지 않는다. 길을 통해 걸을 뿐이다. 어쩌면 삶도 마찬가지다. 떠남을 전제로 머무는 곳. 그래서 누구는 삶은 여행이라고 노래했나 보다. 삶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걷는 길에 더 닿아있을 것 같다.

마이크의 길, His road.

“이 길은 어디로든 갈 수 있지. 난 도로의 감식가야, 평생 이 길을 맛보며 살아갈 거야.”

삶의 정체가 여행이고, 방황이고, 어딘지 모를 어딘가를 향해 가기만 하는 것이라면 길 위를 삶의 지대로 삼은 마이크의 ‘길의 삶’이야말로 본질에 가장 가까운 삶일지도 모르겠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모르는 길을 맛보며 살아가는 길의 감식가는 사실 삶이라는 여행, 세상이라는 길 위에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이고 동시에 바람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에, 예상치 못한 시간에 쓰러져 역시나 예상치 못하게 깨어나고 또 일어서는 기면증. 어느 상처가, 어느 사건이, 또 어느 누군가에게 상처를 좌절을 절망을 얻어맞고 넘어지고 잠들었다가 어느새 다시 깨어나고 일어서는 삶이라는 길 위의 기면증 환자들. 그러나 길 위에 잠든 마이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고 깨어날 때까지 지켜봐 주고 안아주는 스콧. 우리의 길,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도 깃들어 있을 그 스콧들.





스콧의 길, His ways.


“난 돈을 받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어. 널 사랑해, 돈은 내지 않아도 좋아”

그래서 마이크도 우리도 스콧을 사랑 할 수밖에 없다. 길 위에 지쳐 잠들어도 날 지켜주는 그 스콧을, 돈을 받지 않아도 사랑한다. 스콧은 잠든 내 머리맡을 영원히 지켜줄 거라고, 이 길 위를 계속해서 함께 걸어가 줄 거라고.

그러나 사실 스콧은 없다. 스콧의 길은 삶의 지대보단 차라리 한 번의 외유. 스콧에게 길이란 머물 곳으로 가는 도중. 마이크의 길이 어딘지 모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끝이 없는 길이라면 스콧의 길은 목적지로 가는 여러 형태의 과정들. 언젠간 길의 끝, 집 안쪽 울타리 안에서 담장 밖 길 위의 삶들을 바라보겠지. 다른 이들처럼. 자신과는 다른 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렇게 길 위에 마이크를 남겨두고 떠나가겠지.

청춘을 돌려다오

그러나 사실 마이크는 없다. 평생 길을 맛보고 살아가는 방황과 청춘은 없다. 모두 어딘가를 향해 바삐 걸어갈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 마이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차라리 스콧에 가깝다. 우리는 마이크를 버려두고 언젠가는 담장 안쪽의 세계를 향해 갈 테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지금 잠든 마이크의 머리맡에서 담장 안쪽의 세계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애써 ‘우리’라고 말했지만 사실 스콧을 닮은 건 나다. 꿈이니 청춘이니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이니 그저 잠깐, 마이크의 곁에서 마이크를 품 안에 안고 있는 동안에나 지껄인 허황한 ‘말’이다. 나는 길 그 자체보다 길의 끝을 상상하고 있다. 그래서 난 날 닮은 스콧이 싫었다. 다시 마주친 길에서 차창 너머로 마이크와 눈이 마주쳤을 때, 담담하게 바라보던 마이크의 눈과 달리, 미안함인지 미련인지 자괴인지 모를 끈적거리는 눈빛을 보이던 스콧이 싫었다.

청춘을 돌려주세요. 아니, 사실 내게 청춘이 있기는 했던 걸까. 내게도 머물지 않고 늘 변화하는 길 위의 삶이 있기나 했었을까. 그렇다면 언젠가는 나도 어딘지도 모를, 아니 어쩌면 있지도 않은 길의 끝이 아니라 내 발밑의 길에서 살아가고 잠들고 깨어나는 솔직하고 본격적인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 이렇게 계속 막연히 마이크를 동경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어느 만화책에서 보니 동경은 이해와 가장 먼 감정이라던데.





리버는 마이크가 돼버린 걸까?

방황과 좌절의 무채색 청춘의 아이콘, 리버는 정말 마이크가 돼버린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소실점을 보게 되면 여전히 또 영원히 길을 걷고 거기서 잠드는 리버를, 마이크를 그린다

뿌리깊은 나무


간만의 흥미로운 드라마다. 애초부터 고백하자면 신세경과 송중기의 자태가 이 드라마를 시청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으나, 지금에서 이 드라마에 대한 흥미의 토대는 그것이 아니다.(송중기는 이제 출연하지도 않을 뿐더러, 신세경은 주연이라는 이름과는 사뭇 동떨어진 분량을 보이지 않는가)

드라마의 축을 이루는건 두 부자지간이다.
이도와 이방원, 똘복과 이름도 명확치 않았던 그의 아버지.
주인공인 이도와 똘복의 행동의 근원은 결국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다. 서로 다른 형태로. 그러니까 이도의 경우는 아버지를 부정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군주상, 통치론을 관철함으로 아버지를 극복하려한다. 똘복의 경우는 그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인듯 보이지만 그것 역시 결국 아버지로 대변되는 신분질서, 혹은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지켜내지 못한 책임감과 죄의식(그의 삶이 오직 아버지로 귀결되는 개연성, 아버지에 대한 책임을 마치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인양 과잉하는 개연성은 극 초반부에 장황하다 싶을정도로 나타난다) 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의 그리움이다. 그 역시 오이디푸스.

결국 이 드라마는 주인공들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일종의 성장드라마인걸까.
라캉의 말마따나 이도의 상징계는 아버지 이방원의 권위에 굴복하는 언어들로 가득하다. 그에게는 이방원과 같은 폭력성도, 권력에 대한 집착도 강렬한 카리스마도 없다. 즉 그는 팔루스가 결여된 전형적인 오이디푸스다. 이도의 실재계는 이방원의 정치를 극복한, "모두가 권력을 나눠갖고, 권력의 독은 오직 왕만이 참고 견디어내며, 서로가 서로를 이야기하고 칭찬하거나 꾸짖는" 그런 사회겠지만, 이 역시 라캉의 말마따나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욕망은 상징계의 질서에 따라 만들어진다. 말인즉슨 욕망은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도는 "모두가 권력을 나눠갖고, 권력의 독은 오직 왕만이 참고 견디어내며, 서로가 서로를 이야기하고 칭찬하거나 꾸짖는"세상을 꿈꾸고 상상할 수는 있으며, 또한 그 실재계의 환상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상징계의 무엇을 바꾸어내는 예술(그에겐 훈민정음이나 조세개혁같은 것)의 자극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실재계에 닿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어서 이방원의 무덤에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라'는 자아를 만나지 않았나.

반면 똘복이의 오이디푸스는 더 정직해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억울하게 죽은 노비라기보다는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조차 거세해버리는 사회의 질서, 즉 왕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질서에 가까워보인다. 그가 거세의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 즉 신분질서, 그리고 그 정점인 왕인 것이다. 어쩌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친부가 그에겐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존재. 그래서 그는 저항하고 죽이려고 하겠지만 우리는 뻔히 알고 있다. 세종은 장수하고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훌륭한 업적도 남기고 '대왕'이라는 칭호도 얻는다. 똘복이 역시 실패하고 굴복할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나 권력의 분산같은 것들은 사실 이도와 똘복의 욕망에서 파생되는 잔여물 같은 것이다. 문자와 정보가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그것을 이양함으로서 모든 정보, 즉 권력을 자신에게로 회귀시키고 싶었던 이방원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의지를 표현 하는 것. 이도가 상스런 소리를 입에 담는 것도 마찬가지.

드라마는 세 권력의 투쟁이다. 왕과 신하와 천민.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자기의 싸움은 없다. 결국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싸움. 그러니까 이도와 똘복과 정기준의 싸움이 아니라 이방원의 아들과 노비의 아들과 정도전의 아들의 싸움이다. 그것은 개인의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다만,
그들의 드라마가 닿을 수 없는 그 욕망의 근원에 닿음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오래된 학자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종은 마침내 권력의 독도 권력의 달콤함도 지식도 정보도 부도 모두와 공유함으로 마방진을 완성해냈으면 좋겠다.
똘복이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삶의 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나 더 나은 삶에 대한 그리움으로 삶의 길을 개척하고 살아가는 평범함을 가졌으면 좋겠다.

결여된 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곳이지만, 그 드라마에서만은 그들이 어머니의 자궁안으로, 그들의 욕망이 시작된 곳으로, 그들이 마침내는 닿고싶은 그곳에 닿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세경의 출연 분량이 대폭 늘어났으면, 송중기가 종종 회상신으로 나타나줬으면, 김기범의 쌍커플이 좀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다.


▲신세경 사진이나. 
  아직 뿌리깊은 나무엔 이 때보다 예쁜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고 자시고 좀 출연을 하란 말이다.



요즘 본 몇 편


1. 하이킥

이제 고작 2회에 리뷰라니. 성급하기 이를데 없지만. 그러니까 이건 하이킥에 대한 리뷰라기보단 하이킥을 보고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이다. 학자금 대출과 생활고와 취업난으로 대변되는 20대를 연기해낸 백진희에 대한 열광에 대한 반응인것이다.

물론 오늘의 20대는 괴롭다. 그러니까 도무지 앞 말고는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괴로움이다. 서점엔 청춘을 위로한다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수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쉽게 88만원세대라고 부르고 쉽게 괜찮다고 힘내라고 말한다.

도대체 뭐가 괜찮고 또 어떤 힘을 내라고.

반값 등록금이니 청년실업이니 말을 만들어내기만 할 뿐 사실 달라지는건 없다. 오히려 이 요란스런 호들갑이 더 불편하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만들어낸 그 사람은 결국 우리가 짱돌을 들지 않은 탓이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청춘은 원래 그런것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이게 다 가카때문인데 그러니까 원인은 우리가 투표를 안해서라고 말한다. 뭐 다 틀린말도 아니지만, 그게 위로와 격려가 되진 않는다. 그걸 억지로 우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허한 논의의 긑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보이는 앞을 향해서만 달려야한다. 그렇게 그들의 세계로 편입되거나 도태되어야 한다. 앞만 보이게 만들어 놓은 이 터널, 벗어나면 달릴 수 없는 이 철로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고작 2회밖에 안된 하이킥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극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전시했을 뿐 어떤 섣부른 위로나 해결이나 희망도 제시하지 않았다. 기대와 귀추가 주목될 수밖에 없다. 다만 사람들의 섣부른 호들갑이 이 정확한 드라마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백진희에게도.

2. 도가니

배트맨에 대한 논쟁을 벌인적이 있었다. 그는 영웅인가 아닌가. 사적 복수의 결과로 히어로가 되는 배트맨은 영웅일 수 없다. 거기다 그는 자신의 자본과 권력을 이용하는 철저한 자본주의형 히어로. 뭐 여러종류의 수퍼 히어로가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이대면 사실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별로 없다.

사람들은 영웅을 희구한다. 클리셰와 CG를 적절히 버무리고 감동적인 권선징악의 메시지만 넣으면 완성되는 것이 히어로물인데도 끊임없이 양산되는걸 보면 알 수 있다.

인호는 영웅일까. 사적인 복수와 분노도 아니고, 남다른 정의감을 가진 것도 아닌 이 평범한 남자가 이렇듯 모든걸 걸어 뛰어 들게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조금더 설득해주길 바랐지만 영화는 그다지.

그럼에도 넘치지 않으려는 공유의 연기도, 넘치는 공유의 외모도 충분히 좋았다능.
정유미는 돈버는 영화에는 안어울린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능.

조금 더 담담하게 더 시니컬하고 더 우울한 영화였다면 좋았을걸.

3. 푸른소금

신세경은 예쁘다. 진짜 엄청 예쁘다.

세상의 모든 계절 - 누구나 대화상대는 필요한 법이잖아요





# 누구나 대화상대가 필요한 법이잖아요

톰과 제리는 그 이름에서 풍기는 아우라와는 달리 매우 이상적이고 행복한 부부다. 톰은 인자한 지질학자고 제리는 상담치료사다. 그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며 요리를 하고 주말엔 농장을 돌보는 생활을 한다. 잘생기고 위트있는 변호사 아들이 있고, 경제적으로 넉넉하며, 학식이 풍부하고, 탄소배출량을 고민할만큼 정치적으로도 깨어있다. 그야말로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가정.

메리는 제리의 직장동료다. 제리가 일하는 병원의 비서직 사무원이고, 학식이 부족하고, 이혼했고, 부유하지 못하고, 외롭고, 알콜의존증도 조금 있고, 너무 수다스럽다. 메리가 금붕어 똥마냥 제리에게 붙어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제리는 자신의 환자를 대하듯이 메리를 받아준다. 늘 Yes라고 말해주고 귀를 기울여준다. 메리는 그들 곁에 있음으로 그들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도 알고있다. 그녀는 결코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의 얘기가 아릴정도로 와닿는다.
"누구나 대화상대가 필요한 법이잖아요"


# 우리는 모두 메리일지도


메리를 보면서 내가 메리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부끄럽고 슬펐다. 외롭고 얘기할데없어 어느 곳에도 들지 못하는. 사실은 이제 그만해야 하는걸 아는데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마치 눈치채지 못한것처럼 불청객이 되거나, 과도한 호의와 과잉된 적의로 주변을, 사실은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

하지만 그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사정. 우리는 모두 완벽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지만 어느 누구도 행복에 달하지 못하는 메리같은 삶을 산다. 늘 이상을 설정해놓고 그 언저리를 맴돌다 지치고 슬퍼하고 쓰러지고 울고 이내 체념하고 죽어버리는. 하지만 이상적인 공동체나 삶이 있을까.톰과 제리에겐 불행과 결핍이 없을까. 결국 희구도 행복도 모두 허상일지 모르겠다.




# 마지막 장면

메리는 또 행복한 가족의 즐거운 한 때를 '목격'한다. 그렇다. 그건 목격이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그녀와 그들사이에 존재한다. 그 벽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며 메리는 속으로 운다. 그건 체념일까 갈망일까. 애써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거나, 억지로 행복하게 만들어 위로하거나, 위악적으로 그녀를 괴롭히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한 마지막 장면은(10초정도의 시간동안 아무런 소리도 내지않고 그녀의 얼굴만을 응시한다.) 내가 본 영화중 최고의 마지막 장면이다.

파수꾼 - 그건 싸움잘하는거랑 아무 상관없어



1. 그건 추억이었을까?
2. 정말로 다치지 않았니. 나도 너도.
3. 그럼 그건 폭력이었을까?
4. 그렇다면 피해자는? 또 가해자는?
5. 얼버무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는,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아.

5. 이제훈 대박.

지붕뚫고 하이킥 - All You Need Is Love





처음 하이킥 시즌2가 방영된다는 기사를 어느 포털의 메인에서 접하고서 탐탁찮아 했습니다.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로 수년간 변변한 인기 시트콤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MBC의 진부한 상술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죠. 대개의 경우 흥행한 영화나 드라마의 속편은 별다른 미덕 없이, 전작의 후광에만 기대려다 결국 모두에게 외면 받곤 했으니까요. 나아가 그렇게 의미 없는 속편은 전작에 대한 좋은 기억까지도 바래게 만들어 버립니다. 대개의 경우 그러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대개의 경우를 중얼거리면서도 지붕킥 첫 주 방영분을 고스란히 봤습니다. 그것도 정좌하고선. 전작에 대한 변치 않은 애정 때문이었겠죠. 그리고 일주일치의 지붕킥을 몰아본 주말이 지난 월요일 저녁, 다시 TV앞에 앉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악! 이건 대개의 경우가 아니잖아.”

 

지붕킥이 재밌고 좋은 이유는 우리 사는 모습을 빼다 박은 듯 하기 때문이에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주는 박장대소 보단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는 동감과 여운의 미소가 있기 때문이죠.

 

## 해리와 미스터 순대. 그리고 우리

 

전 가여운 신애와 세경이 보다, 해리와 미스터 순대에게 더 많은 감정이입을 합니다. 온 집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갖은 구박과 핍박을 일삼는 해리는, 더 많이 가지려고만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만 하는 우리 사는 모습을 닮지 않았나요? 심지어 해리는 그 작은 몸으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먹어대는 고기 탓에 늘 변비에 시달립니다. 지나친 육식과 불균형한 섭생. 그 때문에 나타나는 질병과 또 질병들. 그러고 보면 그것도 또한 우리 얘기구요. 무엇보다 해리의 외로움에 더 큰 싱크로를 느낍니다. 해리는 부잣집의 사랑받는 막내딸이지만, 사실은 참 외로운 아이죠. 잘못을 혼내주는, 아니 바로잡아 주는 사람도 없고 딱히 이렇다 할 친구도 없습니다. 많은걸 갖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고작 사소한 인형놀이를 함께 하거나 빠진 이를 같이 신기해 해주거나 잘못되고 틀린 행동에 대해 바로잡아 줄 친구도 어른도 없어요. 해리 얘기냐고요? 아니 우리 얘깁니다. 사람도 많고 가진 것도 많지만 사실은 외로워 죽겠는 우리들 얘기요.

 

미스터 순대는 황혼의 로맨스를 이뤄가는 로맨틱 마초입니다. 황혼 로맨스의 상징인 멋들어진 콧수염도 기르고 있죠. 다리가 좀 짧긴 하지만 이 정도면 숀 코네리인들 부러울까요. 그러나 로맨틱 마초인 미스터 순대는 동시에 구시대적 가부장이기도 합니다. 체면과 권위, 자기과시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겠다고 가정의 생활비를 강제적으로 줄이고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기도 하죠. 며칠 전엔 심지어 자기를 욕보였다고 20년 넘게 성실히 일한 우리의 봉실장을 해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장의 권위, 사장의 권위를 운운합니다. 그에게 가정이나 직장이란 그렇게 장의 권위만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곳 인가 봅니다. 이 사람을 보면서도 저는 우리들 사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들을 전부 포함 할 수 있는 그 말이요. 바로 ‘소통의 부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소통이 뭔지 모르는 것 같은 또 다른 어느 ‘장’을 떠올리지 않아도 바로 우리부터 가족 간에, 친구 간에, 직장에서, 사회에서 너무 소통 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요?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는 않고 정작 내 얘기를 듣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있지 않은가요? 너무 비약입니까? 저 오바인가요?

 

## 세경이와 정음이. 그리고 우리

 

지붕킥의 인기를 책임지며 뭇 남성들은 물론 뭇 언니들의 마음 까지도 설레게 하는 미모의 그녀들은 극중에선 가장 약하고 힘없는 아이들로 나옵니다. 놀기 좋아하고 허영 많은 지방대생과, 집도 절도 없는 가난한 식모.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녀들은 세상이 말하는 루저일지도 모르죠. 그래선지 그녀들은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것도 있어 보입니다. 다른 이의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경이도, 학벌 얘기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음이두요.

외모도 영 별로고 뚱뚱한데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하고 심지어 영어도 잘 못하는 저는 그녀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해요. 세상의 기준대로라면 저 역시도 루저일테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그녀들에게 더 마음이 가고 어떨 땐 콧날이 시큰해져서는 괜스레 콧잔등만 긁어내리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여전히 세상은 돈 많고 명문대 나온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만 좋아하니까요. 에잉~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 메시지

 

지붕킥의 매력중 하나는 에피마다 한 번씩 등장하는 알듯 모를 듯 한 메시지들입니다. 자옥 아줌마와의 이벤트 비용을 메우려는 미스터 순대의 노력 편에서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한 세경이의 노력이 빛을 발했습니다. 세경이는 세제대신에 쌀뜨물로 설거지를 하고, 난방을 끄고, 변기에 벽돌을 넣고, 과소비하던 사과를 줄이고, 식단을 간소화 하죠. 식구들은 불편해 하면서도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웃음의 포인트는 가정은 나 몰라라 하며 또 자옥아줌마에게 밍크를 사주는 미스터 순대에게 있었지만 전 사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반성을 초큼 했습니다. 빈 방에도 불을 켜거나 난방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음식을 남기고 하던 생활들에 대해 말이죠.

지붕킥은 그렇게 어느 곳엔가 갖은 메시지들을 들여 놓습니다. 가족, 여성, 환경 같은 얼핏 재미없어 보이는 그런 얘기들을 매우 재미있는 소재로 만들어서요. 웃자고 만든 시트콤을 이렇게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제작진이란 말임미다.ㅋ




##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해요. 사랑하는 그들과 사랑하는 우리

 

전 지난 연말 MBC 연예대상에서 준세커플에게 베스트 커플상 투표를 했습니다. 예쁘잖아요. 걔들.ㅋ 제가 진짜 지붕킥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은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학벌차도 가난도 나이도 무엇도 상관없이 그들은 그래도 사랑을 해요. 우리처럼요.

 

늘 괴롭히고 괴롭힘 당하는 해리와 신애는 어느 새 알 수 없는 단짝이 됐고, 왠수 같던 지훈이와 정음이는 연애를 시작했어요. 까칠한 준혁이는 첫사랑을 앓고 있고 세경이는 가슴 아픈 외사랑을 합니다. 백수날건달 광수와 인나도, 보석 아저씨와 현경이 아줌마도 티격태격하면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죠. 미스터 순대와 자옥 아줌마도 황혼의 로맨스를 즐기구요.

 

우리도 그렇게 사랑을 합니다. 왠수 같은 아이를, 더 왠수 같은 남편을, 밉상인 친구를. 서럽고 아픈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하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어요. 서로 상처주고 서로 위로해주면서 세상이 준 상처를 서로 치유해주면서 그렇게요.

 

어쩌면 세경이와 신애는 쉽게 아빠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어요. 정음이와 지훈이는 서로의 차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헤어질 수도 있고, 미스터 순대는 가족의 반대를 못 이기고 언젠가 다시 가슴 아픈 이별을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래도 그들은 다시 또 사랑을 할 겁니다. 상처받고 넘어져도 다시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처럼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던가요??ㅎㅎ

 

 

 

 

 

 



Beatles - All You Need Is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