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리뷰 - <모두를 위한 불평등 (Inequality For All) > '당신 눈 앞의 칼을 봐요'

<모두를 위한 불평등 (Inequality For All) > - 당신 앞의 칼을 봐요

 

 

미국에는 샌더스 열풍이 거세다. 출마 선언 당시 지지율 제로에 가깝던 샌더스가 대선이 남지 않은 시점에 거대 자본들의 후원을 받는 유력 후보 힐러리를 거의 따라잡더니 며칠 햄프셔 경선에선 기어이 힐러리를 앞질렀다.

 

기업들의 스폰인수퍼 받지 않는 샌더스는 일반 시민 지지자들의 후원금으로만 캠프를 운영한다. 지난 1월에만 2천만 달러를 모았다. 1인당 평균 기부액이 30달러가 안된다고 하니 수백만 명의 기부자가 샌더스를 대통령으로 지지한 셈이다. 특히 청년층을 중심으로 샌더스에 대한 지지가 도드라진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란 말이 사멸하다시피 미국사회에서 수십년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나이든 정치인에게 미국의 젊은이들은 열광하는가.

 

# 불평등신자유주의의 종말 선고

 

<모두를 위한 불평등>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가 버클리에서 강의를 영화화 다큐멘터리다당시 강의의 제목은부와 빈곤’. 라이시는 미국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대해 강조한다. 전후 생산 증대와 경기부양이 동시에 이뤄지던 시대를 지나1970년대 이후 미국사회는 소득 불균형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978 미국 남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4 8천달러였고 소득 상위 1% 계층의 평균 임금은 39 달러였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2010, 미국 남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3 3천달러로 줄어든데 비해 소득 상위 1% 소득은 배이상 증가해 110 달러에 이른다. 오늘 미국 최상위 부자 400명의 부는 미국 전체 인구 절반의 재산 총량보다 많다. 사회 전체 부의 99% 상위 1% 수퍼 부자들이 독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시대상이다.

 

미국 전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을 모았던 파워 복권의 당첨자는 당첨금을 받으면 일단 딸의 학자금 대출부터 상환하겠다고 말한다. 의료보험이 없이는 치솟는 병원비를 감당할 없는 미국 국민들은 아플자격 없다. 집이 없어 모텔이나 자동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매카시즘의 시대를 겪으며 사회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던 미국 사회가 샌더스에 열광하는 이런 불평등 사회에 기인한다. 2008 월가의 복잡한 금융공식을 무기로 이뤄진 국민 사기극이 탄로나며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월가 점령으로 이어졌고 월가 점령의 실패는 결국사회주의 기호를 호출했다.

 

사실 미국 뿐이 아니다. 영국에선 좌파인 코빈이  노동당의 당수로 당선됐다.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 모두 좌파다마치 우리 모두를 부유하게 것처럼 떠받들여지던 신자유주의의 파산선고. 미국 공화당의 지지율 1 후보 트럼프의 약진도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파탄을 원인으로 왼쪽에선 사회주의를 소환한 것처럼, 오른쪽에선 국가주의를 소환했을 따름. 일자리와 소득을 내놓으라는 요구는 똑같다.

 

생산수단의 공유 주장하지 않는 샌더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단지 미국 민주당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정도의 스펙트럼이지만,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포지셔닝하고 있는 것뿐이다.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이상 체제의 불만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증상이 바로 버니 샌더스와 파시스트 트럼프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

 

지난 인기를 끌었던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나 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 같은 경제학자들. (피케티와 크루그먼이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미국을 비롯한 1세계 정치권의 변화가 지적하고 있는 모든 결론은신자유주의의 종말이다.

 

# 한국

 

소득 불균형, 1% 나라, 부익부 빈익빈의 사슬. 한국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재벌들이 곳같에 수백조의 사내 유보금을 쌓아놓을 동안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은 해고당했고, 서울 도심에선 일가족이 가난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고공농성이 일상처럼 이어지고 도심 곳곳에 세지도 못할만큼 농성천막이 세워져 있지만 정부는 쉽게 해고하고 적게 돈을 주는 법안을 만들었다.

 

샌더스 열풍을 호출한 월가 점령 시위.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촛불 시위가 이뤄졌지만 결과는 상이했다. 촛불은 결국 부가 편중된 세상을 뒤집어엎자가 아니라 먹거리와 이명박이라는 소박한 한국 중산층의 순응적인 욕망으로 수렴됐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해고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냉정하게 발길을 돌리던 시위대, 컨테이너 산성 앞에서 예비군복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산성을 점령하고 넘어가려던 사람들을 점잖게 제지하던 모습, 중산층들의 순응주의는 촛불을 월가 점령과는 상이한 모습으로 조물했다. 결과 촛불은 실패했고,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점점 반동의 세월.

 

미국에서 부는 샌더스 열풍의 여파로 한국에서도한국의 샌더스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주자가착한 부자 흉내내고 있는 철새 정치인 아이러니가 아니다. 촛불에서 드러난 한국 민중들의 순응주의와 어긋난 겨냥의 발로

 

사실 샌더스와 시리자, 코빈 어떤 맥거핀에 불과하다. 극단에 달한 사회적 불평들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를 담지하는. 샌더스가 당선이 된다고 미국 사회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저 민중들이 분노했음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불평등 지수로는 어디 내놔도 뒤질 같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맥거핀의 출현조차 요원하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라이시는 문제를 방에 있는 마법의 총알은 없다 말한다. 정치인 뽑아서, 대통령 뽑아서 사회 문제가 방에 해결되진 않는 다는 것이다.그말인즉슨 대통령 때문에, 정치인들 , 정당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고작 그까짓 때문에 사회가 이렇게 어긋나고 있는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분노의 방향이다. 라이시는 다시 말한다. “정치는 저기 어디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경제를 만들고 경제에서 살아가고 지탱하는 것은 정치인이나 1% 부자들이 아니라 99% 당신, 그리고 나다.

  

# 그래도 역사는 변혁의 편입니다

 

시민권, 투표권, 환경보호법, 특히 환경보호법은 닉슨 정부 만들어졌어요 닉슨이 서명한 법이에요. 역사는 언제나 사회를 변혁하려는 이들의 편입니다.” – 영화

 

70년대 이후로 장장 30여년을 군림한 신자유주의에 균열이 발견되기 시작한 어쩌면 2011년의 월가 점령 시위였다. 더이상 이렇게 없다던 미국의 청년들이 몰려들었던 그날. 때쯤 한국에서도 촛불시위와 한미FTA 반대 시위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월가 점령운동도 촛불시위도 모두 실패했다. 한국에는 친기업 보수 정권이 들어섰고 노동자들은 계속해고되고 죽어갔다. 미국은 도시빈민이 급증했고 의료보험과 교육비의 부담은 계층간의 격차를 실감하게 했다.

 

그러나 실패를 토대로 변화들. 대공황 시기 이후로 미국 민중들이 처음 경제를 입에 올렸던 이후 5년이 지나 거대 자본의 후원을 받지 않는 사회주의자 대선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주된 공약은 일반 의료보험과 교육비 문제 해결이다. 불평들의 씨앗을 자르겠다는 이야기. 그가 당선이 되더라도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자기의 바람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촛불은 실패했지만노동운동이 거의 지리멸렬하게 끝난 지점에서 희망버스가 나왔다는 , 비록 실패했지만 한미FTA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컸다는 ,그건 한국 사회 주체 변화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여기에 바로 '희망' 있겠다. 매우 작고 미미하지만, 거기에 희망을 수밖에 없다. 과거엔 한진중공업의 85 크레인에서 2명의 노동자가 죽었지만 해고 문제를 해결 못했다. 그러나 김진숙은 살아서 크레인을 내려왔다. 대추리에 군인들을 보내 원주민들을 포박했지만 지금 제주 강정에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한다. 앞서서 정권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으로 모든 것을 수렴하려는 태도를 비판했지만 여기엔 이렇게 차이롸 주름이 존재한다. 들뢰즈는 영원회귀란 똑같은 사건이 영구적으로 재현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무수히 반복되는 전복과 봉합, 그렇게 봉합을 뜯어내며 새롭고 작은 균열을 켜켜이 쌓아가는 .

 

역사는 라이시의 말처럼 변혁의 편이다. 희망을 믿고 변주를 이해하는 . 다만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직시해야 것은 우리의 욕망, 그리고 오늘 우리가 서있는 곳의 얼굴이다.

 

다시 들뢰즈가 말하길"욕망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욕망은 자체로, 저도 모르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람으로써 혁명적이다. "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우리가 해야 일은 오직 하나다. 정치인에게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바라는 욕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 샌더스든 안철수든 상징따위야 그다음에 골라잡으면 일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에 가장 깊숙히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은 불평등의 경제다.

다큐리뷰 - 거미의 땅, 기억하는 방식과 망각하는 방식

기억하는 방식과 망각하는 방식 거미의 땅

 

 

사람은 게으르다. 게을러서 기억도 제멋대로다. 기억을 단순화 하면 편하다. 상처를 입힌 대상을 한 놈으로 압축하고, 원망하고 미워해야 할 대상도 그냥 한 놈으로 치는 거다. 그게 남의 일이라면 더 쉽다. 그냥 말하고 스스로 납득하고 필요한 만큼 잊으면 된다. “네가 아픈 건 오직 그 놈 때문이야.”

 

그러나 사실 모든 상처는 사고의 중첩이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기억과 사연과 사건이 제각각의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은 도무지 게을러서 이 중첩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아프거나 너무 귀찮거나 또는 너무 부끄럽다.

 

수없이 많은 사고와 사연이 엮여 만들어진 상처가 다시 또 엮이고 엮여 묶인 건 공간이다. 너무 아프거나 너무 귀찮거나 또는 너무 부끄러운 기억과 사연, 사람을 매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간 자체를 철거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니 그보다는 우리는 그렇게 하나하나씩 기억을 간소화하고 공간을 철거해왔다.

 

한 때 신문물과 외화벌이의 첨단에 있던 경기 북부지역의 기지촌들도 그렇다. 지금 그 공간 위엔 으리번쩍한 뉴타운이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잊었다.

 

# 개미처럼 일했고 거미처럼 사라졌다

 

바비엄마는 77세다. 30년이 넘게 파주 선유리에서 햄버거를 만들어 파는 선유분식을 운영 중이다. 그녀는 기지촌의 양공주로 일하던 20대에 26번의 낙태를 했다. 29살엔 결국 자궁을 드러냈다. 그 후유증으로 그녀의 건강은 온전치 못하다. 카메라는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배와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 넣는 장면을 잡아낸다.

 

그녀는 아들 바비를 낳고 다시 임신을 했다. 결혼을 약속했던 미군의 아이였다. 그러나 이 미군은 다른 남자의 아이인 바비를 미국에 데려갈 수 없다고 했고, 바비엄마는 다시 아이를 떼어낸다. 뱃속에서 7개월을 견디다 끄집어내진 아이는 종이상자 안에서 죽어간다. 바비엄마 박묘연과 바비는 죽어가는 아이의 곁을 지켰다. 이후 바비엄마는 기지촌 여성들의 대모로 살았다. 방송에 출연하고 기지촌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세상은 냉정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내 얘기엔 지어낸 것도 없고 숨기는 것도 없어. 누가 욕을 할지라도 이건 내 얘기니까. 우리는 개미처럼 일했고, 거미처럼 사라졌어

 

박인순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갔었다. 그곳에서 두 딸을 낳고 생활했으나 알코올과 약에 찌든 미국인 남편은 그녀를 폭행하고 성판매를 강요했다. 박인순은 두 딸을 남겨두고 다시 기지촌으로 돌아왔다. 정신병처럼 보이는 무()병을 얻은 그녀는 거리를 배회한다.

 

미술 심리치료를 받아 그림을 그리고 절에서 기도를 올리면서도 그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는다. 대부분 미군과 포주에 대한 저주다. 포주는 글을 모르는 그녀의 돈을 갈취했다. 영화는 법당의 불경 외는 소리 위에 그녀의 저주와 욕설을 덧씌운다. 그녀는 평화와 안식을 갈구하면서도 자기 안의 분노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다.

 

왜 때렸니, 왜 돈 안줬니, 이 망나니 미군아. 다 불태워 버릴 거야

 

안성자는 흑인 혼혈로 태어났다. 엄마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랐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기지촌의 양공주가 됐다. 그녀는 많은 기지촌을 전전했고 그렇게 옮겨 다닐수록 빚은 늘어갔다. 보건증이 없어 보건소에 감금되기도 했다. 결혼을 약속한 미군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미국으로 떠나 연락이 두절된 약혼자는 1년이 지나서야 편지로 파혼을 통보했다.

 

안성자는 KBS 인간극장 <애니의 사랑>편에 출연했지만 카메라는 그녀의 삶 전체가 아니라 흑인 혼혈로의 삶, 기지촌 양공주의 고달픈 과거만을 요구했다. 브라운관을 바라보는 세상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딱 그만큼의 이야기만.

 

# 그곳엔 유령이 산다 망각의 방식

 

박인순은 밤이면 이제 초라해진 뺏뻘 기지촌 거리를 헤맨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그녀는 골목을 걸으면서 벽에 낙서를 하거나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방에 돌아오면 불을 끄고 초를 켠다. 그리고 난해한 그림을 그린다. 가끔 괴성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기도 한다.

 

박인순을 괴롭히는 건 무병으로 인한 두통이다. 그녀는 기지촌에서 머무는 수많은 유령들을 보고 느낀다. 기지촌의 골목에는 유령이 산다. 슬프고 분노한 사람은 죽어서 작은 입자가 되고 그 수많은 작은 입자들은 실체가 되어 그 골목 여기저기를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그 골목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유령들이 실재하는 것이든, 고단한 삶을 살아온 박인순의 정신병이든 그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공간은 여전히 남아있고 박인순의 기억에 그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실재하고 있다. 그것을 유령으로 부르든, 정신병으로 부르든.

 

박인순과 바비엄마와 안성자의 상처는 모두 제각각이다. 마찬가지로 박인순이 보는 유령들의 상처와 분노 슬픔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그녀들의 (혹은 그들)의 기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우주가 얽혀 만들어낸 공간.

 

거미의 땅은 제목처럼 땅거미처럼 사라진 땅의 이야기다. 서울 경기 북부에 화려하던 기지촌 공간은 재개발과 뉴타운 정책으로 하나씩 지워졌고 잊히고 있다. 기지촌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주한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며 만들어졌다. 기지촌의 여성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양공주로 영입됐지만 그 배경에는 군사정권의 체계적인 관리와 포획’ (그건 포획이었다. 빈곤과 사회적 낙인, 배제, 망각은 당시의 정권이 그녀들을 대하던 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적어도 그녀들은 당시 사람취급을 받지는 못했다.)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을 애국자니 산업역군이니 하는 말로 포장하던 한국 정부는 90년대 이후 기지촌 운영에 대한 관여 일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기지촌 공간은 철거됐다.

 

공간의 말소는 기억도 말소했다. 세상은 뱃속에서 끄집어낸 아이의 죽어가던 모습과 보건소에 갇혀 엄마를 그리워하던 고통, 포주에게 화대마저 빼앗긴 억울함을 그냥 아픈 역사로 퉁쳤다. 그리고 그 위에 호화로운 아파트를 짓고 그 아파트 값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기지촌의 흔적은 그저 땅값, 집값을 떨어뜨리는 악재로만 남았다. 세상이 기지촌을 기억하는 방식은 필요한 만큼을 망각하기 위해서다.

 

주한미군, 외화벌이 같은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말소되고 잊힌 그녀들은 재개발, 뉴타운 같은 또 다른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다시 말소되고 또 잊힌다. 저마다의 사연과 상처를 가진 수많은 유령들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편하게 망각된다. 철거된 공간에는 망각된 유령들과 그 유령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골목을 떠도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여전히.

 

# 세라와 애니, 과거와 오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안성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의 후반부다.

 

안성자는 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성자는 세라와 애니라는 두 개의 자아를 가졌다. 세라는 기지촌 친구 애니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지만 애니는 편지에 답을 하지 않는다. 세라는 애니에게 자신의 고통을 보여줌으로서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편지를 받은 애니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기지촌으로 돌아가 세라의 흔적을 되짚어보며 그 시간들의 실체, 고통을 직면한다.

 

세라는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었고 위로받고 싶었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었던 안성자의 과거, 애니는 그 외로웠던 애니를 마침내 인정하고 껴안을 수 있는 안성자의 오늘이다. 그녀는 외면하고 싶었고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고 대답하고 인정하고 마침내 감싸 안는다.

 

특별한 설명 없이 전개된 이 분열증적 화면들은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무시하고 오히려 극영화의 연출로 전개되는 듯 보인다. 한참을 지켜보고 애니와 세라가 모두 안성자임을,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자기 안에서 화해를 이루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아 갈 때쯤 안성자는 폐허가 된 기지촌 보건소 건물에서 춤을 춘다.

 

과거와 현재, 애니와 세라를 오가던 안성자는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공간에서 가장 아름답게 춤을 추며 현재와 과거를 인정한다. 그건 화해나 용서, 치유 따위의 안일한 말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건 그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이다. 지나온 삶의 고통도 번민도 그 갈등마저도 자신이었음을 인정하는 몸짓. 화해도 용서도 치유도 그 다음이다. 망각하고 침잠시키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 마주하고 다투고 마침내 끌어안은 기억’.

 

# 그건 아직 우리의 몫이 아니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70년대 정권이 기지촌 운영에 어떻게 관여했는지, 그리고 지금 그 흔적을 어떻게 지워 가는지 밝혀지면서 사회적 공분이 일기도 했다. 금세 식어버리긴 했지만.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타결한 정부에 대한 거센 비난여론이 이어지고 있다. 기지촌 여성은 사실 주한미군에게 한국정부가 제공위안부와 같다. 그리고 그 기억을 지워버린.

 

망각은 쉽다. 그 고통을 단순화해 기억하기도 쉽다. 분노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 분노를 바탕으로 그들을 위해 싸우는 일은 더욱 쉽다. 정작 어려운 건 그 기억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그 기억에서 나의 치부를 마주하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저들과 싸우며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그들과, 혹은 나와 싸우는 것이 가장 어렵다.

 

용서와 화해를 섣불리 말해선 안 된다. 그건 우리의 몫이 아니다. 분노와 비난도 쉽게 말해선 안 된다. 그러기에 우린 너무 많은 것들을 망각하고 외면하고 있다.

 

 

※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떼 - 기록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떼

- 기록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흔히 다큐멘터리를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인 기록일까. 그보다 ‘객관’의 의미는 무엇일까, 차라리 ‘객관’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현상은 인식의 주체에 따라 다르게 보이며 그만큼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 코끼리의 다리와 귀를 각각 만진 맹인들의 우화는 어쩌면 현상의 인식과 실체적 진실의 결코 좁힐 수 없는 괴리를 나타내는 건 아닐까.



# 다이렉트 시네마


다이렉트 시네마는 미국의 프레드릭 와이즈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와이즈먼은 생생한 사건이 최대한 방해받지 않고 흘러가도록, 사건의 직접성을 포착할 수 있게 카메라 앞의 대상을 내버려두는 관찰자적 접근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카메라 앞의 모든 인공적인 요소들을 제거했다. 조명과 촬영장비, 스태프까지. 인위적인 모든 요소를 거부한 채 눈앞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기다리는 작업방식이다.

에릭 바누는 <다큐멘터리Documentary: A History the Non-Fiction Film>라는 저서에서 다이렉트 시네마에 대해


“다이렉트 시네마의 감독은 카메라를 상황 속에 던져놓고 위기의 순간이 오기를 바라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다이렉트 시네마를 옹호하는 예술가는 자신이 투명인간이 되길 꿈꾼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카메라가 접근할 수 있는 사건들 속에서 진실을 구축한다.” 고 설명한다.



프레드릭 와이즈먼, <티티컷 풍자극 Titicut Follies>, 1967



와이즈먼의 데뷔작인 ‘티티컷 풍자극’은 매사추세츠 주립병원의 간수와 치료사, 사회사업가 등이 재소자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84분간의 흑백 필름에 자세히 기록한다. 와이즈먼은 인터뷰와 내레이션, 자막 같은 ‘다큐멘터리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 채 병원의 인권유린과 권력을 비판한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주장이다.


다이렉트 시네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관찰자적 순수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카메라가 존재하는 한 대상은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꽁꽁 숨겨놓은 카메라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앵글 밖으로 나가버리는 야생의 맹수들을 보라. 몰래 카메라를 귀신같이 알아채는 눈치 빠른 연예인들도 사실 야생의 맹수와 같은 후각이 있겠다.)


영화는 편집의 과정을 거쳐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전해진다는 점에서 이미 순수한 관찰자의 시점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보다는 관찰 대상을 선정하고 관객에게 이를 소개하겠다는 생각부터 ‘객관’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대상의 선정이란 오롯이 감독의 ‘의중’과 ‘의도’아닌가.

다이렉트 시네마의 대표 작품 격인 ‘티티컷 풍자극’ 역시 매사추세츠 병원의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하겠다는 와이즈먼의 의중과 의도가 반영된다.


결국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영화의 맹아인 것. 다이렉트 시네마가 주장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은 어떤 불순물도 첨가되지 않은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 ‘주장’하는 ‘진실’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영화가 제작방식에서 ‘사실의 적시’만을 견지한다하더라도, 이미 ‘순수’와는 멀어진다. 사실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다큐멘터리에 애초에 순수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 시네마 베리떼


시네마 베리떼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민속지학자인 장 루슈에 의해 시작된 다큐멘터리 제작 이론이다. 그는 플레허티가 ‘북극의 나누크’를 찍으면서 에스키모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연출자와 등장 인물간 상호작용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실천했던 것처럼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자 곧 사람과의 관계를 기록하는 것임을 경험에 의해 인식한다.



로버트 J 플레허티,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 1922



시네마 베리떼는 주제와 연출자의 상호작용을 허용하고 심지어는 촉발시키기도 한다. 이 방법론은 카메라의 존재를 합법화시켰으며 감독에게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책임지는 촉매자의 역할을 부여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감독이 특정한 순간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대신 그 순간을 예상하고 자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시네마 베리떼 형식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장 루슈의 ‘어느 여름의 연대기’다. 영화는 감독인 장 루슈가 파리의 시민들에게 던지는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만으로 진행된다. 이 질문은 출연하는 시민들은 물론 감독인 루슈까지, 근원적 행복에 대해 자신을 점검하게 한다. 때로 감독은 촬영한 장면을 해당 인물에게 보여주면서 그 인물이 말했던 내용들을 수정하거나 더욱 깊이 생각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장 루슈, <어느 여름날의 연대기 Chronique d'un été Chronicle of a Summer>, 1961



시네마 베리떼 형식은 우리가 익숙하게 ‘다큐멘터리’로 인식하고 있는 작품들에도 차용된다. 소개했던 ‘웰랑 뜨레이’에서 감독의 가족들이 내적과 학살의 기억을 가진 캄보디아의 마을공동체에 녹아들어가던 모습, ‘할매꽃’에서 감독이 외할머니의 사연을 받아들여가는 과정, 그리고 어머니에게 ‘용서’를 묻던 모습이 모두 시네마 베리떼의 제작이론에 기반을 두었다 할 수 있겠다. (그들이 제작이론에 의거해 부러 그 같은 대화를 시작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취할 수밖에 없는 그 방식들을 루슈가 이론으로 정립한 것에 더 가깝겠다.)



#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떼


1930년대 이후로 다큐멘터리 제작방식은 격렬한 논쟁을 거치게 된다. 대상에 대한 서정적 관찰과 기록에 집중한 플래허티와 철저한 장인정신의 제작기술과 철저한 주관의식이 개입되는 지가 베르토프의 그것이다. 플래허티의 서정성도, 베르토프의 과장된 예술의식도 마뜩치 않았던 젊은 예술가들은 ‘프리 시네마 운동’이라는 새로운 문화 사조를 창출해낸다. 거기서 탄생하는 것이 시네마 베리떼와 다이렉트 시네마다. TV의 보급, 촬영과 음향장비의 발전 등의 변화에 맞춰 ‘기록’과 ‘현장성’에 방점을 찍은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와 대상과의 관계에 작가의 미학적 관점을 반영하도록 노력한 프랑스 중심의 시네마 베리떼로 분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서로 다른 극단에 있는 제작 기풍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제작이론의 뿌리가 사실은 같다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추구하던 것은 대상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결국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기반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예술이라는 정의가 확립돼 온 과정이다.



# 역사란 대화, 그리고 현실을 다듬는 망치


기록의 의미란 ‘사실의 축적’에 있다. 그리고 축적된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찾는 탐구의 과정이다. 진실이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으며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바라보는 사람의 세계관에 따라, 바라보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고 또 새롭게 기록된다. 그렇게 다르게 해석된 또 다른 기록들의 계속된 축적. 그것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진실, 그리고 ‘역사’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첫 장에서는 역사의 정의에 대해 배운다.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가 객관적 의미의 역사라면 후자는 기록한 역사가의 세계관에 의해 해석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가 우직하게 사실을 기록함으로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이렉트 시네마와 같은 것이라면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사관의 세계에 따라 사실의 이면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통해 진실을 탐구하려는 시네마 베리떼와도 같겠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진실의 의미를 사실의 나열로 좁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구도자적 끈기가 오히려 더 그 실체에 가깝다. 와이즈먼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벨파스트, 메인’은 뉴잉글랜드 지역의 지역공동체를 끈질기게 담아낸 그 구도의 산물이다.


시네마 베리떼는 진리에 닿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다. 제멋대로 사실을 왜곡하고 변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면의 진실을 캐내기 위한 노력이다. 감독들의 다양한 세계관과 의도는 왜곡과 편향이 아니다.


청와대 탱크 진격의 사실을 두고 쿠데타로 규정할지 혁명으로 규정할지는, 그 공과 과는 무엇인지 두고 다투는 건 현재의,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대의 몫이다. 그 치열한 쟁명과 토론의 축적이 빚어내는 것이 역사다. 역사란 단면이 아니고, 알량한 단편의 사실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진실의 무게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역사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행하는 것이다.


E. H 카의 말을 굳이 인용하자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여기에 브레히트의 한마디 조언을 덧붙이자면,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다듬는 망치다.” 지금도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은 현실을 다듬는 망치가 될 테다.




학교가 아이들을 키운다는 믿음 - 우리학교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공교육 12년간의 모든 노력이 투여될 단 하루에 수험생들은 물론 그 주변사람들도 애가 녹는 시기다. 


작년 이맘쯤에는 한 도시에서 십 수 명의 청소년들이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각각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아마 가정, 학교, 사회 어느 곳에도 전할 수 없었던 외로움이었을 테다.


국제중, 특목고, 자사고, 명문대.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서 학교의 역할은 ‘교육’보다는 ‘진학’에 방점을 찍고 있다. ‘높은 교육열’은 곧 ‘높은 사교육비’로 이어졌다. 한국은 GDP 대비 사교육비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교실에는 친구, 우정, 선생님, 꿈, 희망같은 말보다 ‘일타강사’, ‘쪽집게과외’, ‘합격비법’ 같은 말이 넘쳐난다. 최근 어느 사교육업체는 광고에서 “우정이란 그럴듯한 명분으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며 “친구는 네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는다”고 설교했다.


그러나 정말 말만 그럴듯한 우정이란 우리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일까. 그럼 학교란 우리에게.



# 글로배우지 않아도 아는 ‘함께 사는 법’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의 제목은 ‘혹가이도 조선 초중고급학교’(남한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훗카이도’가 올바른 표기지만 영화에서 문화어인 ‘혹가이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혹가이도로 통칭)의 구성원들이 조선학교를 ‘우리학교’라 부르는데서 왔다. 


조선학교는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이 조국의 말과 글, 조선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세운 학교다. 영화의 배경이 된 혹가이도 조선학교는 북해도 섬의 유일한 조선학교로 초중고등부가 모두 함께 생활하며 학교 아이들 중 일부는 12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내기도 한다.


사실 ‘우리학교’라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이다. 우리집, 우리학교, 우리엄마, 우리편. 한국어는 ‘나’라는 표현보다 ‘우리’란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한다. 영어의 소유격 ‘My’를 해석하면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로 번역된다. 그건 아마 내가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의 것에 더 가깝다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하는 경구들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 나 아닌 것들과 관계맺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노력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있다. 그래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은, 또 그 교육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학교의 본령은 분명히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데 있다.


영화 <우리학교> 속 ‘우리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그 교육과 학교의 본령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그 모습이 그토록 뭉클했던 이유는 그 본질에 충실한 학교의 모습에 그대로 비치는 지금 이곳의 학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혹가이도 우리학교의 아이들은 타국 땅에서 고국의 말과 글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학내 조선말 100% 사용’이라는 약속을 정한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오직 조선말만 사용하며 생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려서부터 조선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편입생들은 더 그렇다. 어린시절 내내 일본학교에 다니다 고등학생이 돼서야 조선학교로 편입한 ‘려실’은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일본어로 말하지 않으면 목표달성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자연히 아이들과는 계속 서먹해지고, 적응은 곱절로 힘들어지는 악순환. 그러나 반장 재훈은 “조선말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편입생들이 일본어를 쓰는 것은 약속을 깨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잘 쓰지도 못하는 조선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수이 조선말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물꼬를 터주는 일. 려실은 후에 그 날을 떠올리며 “울듯이 기뻤다”고 말했다. “말하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 나의 사정을 알아주었느냐”면서.


<우리학교>가 개봉한 2007년, 남한의 서점가에는 <배려>란 자기계발 서적이 불티난 듯 팔리고 있었다. 경쟁하는 삶이 아니라 배려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3, 40대 직장인들에게 이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모습을 보며 려실에게 일본어를 써도 괜찮다고 말해주던 재훈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 큰 어른이 돼서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책 한 권으로 배우겠다고 덤비는 모습이 어쩐지 ‘말하지 않아도 친구의 사정을 이해하는’ 열일곱 재훈의 진짜 배려 앞에 부끄러웠다.


나이가 들면 분명 알게되는 일들이 있다. 공존하는 삶,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결국엔 자신을 살아가게 해준다는 것. 어쩌면 요즘 힐링이니 위로니 격려니 하는 ‘말’과 ‘글’이 득세하는 것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 때문이겠다. 그러나 사실 이미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과 살 부대며, 다투고 화해해가며 배웠어야 할 ‘생활’들.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랴, 

마음껏 배워가는 이 행복넘치네”


-<우리학교> OST ‘우리를 보시라’ 中



# “어려움이 있을 땐 사양 없이 우리학교를 찾아오십시오”


군사부일체라고 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선생님들은 ‘담탱이’나 ‘꼰대’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양 극단의 어느 쪽이든 선생님이란 존재는 언제나 어렵고 멀다. 


그러나 ‘우리학교’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지근거리에 있다. 그들은 아이들과 말뚝박기를 하고 함께 케이크를 만들고 한 이불을 덮고 잔다. ‘우리학교’의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은 통제와 감시, 훈육의 대상 보다는 말벗이고 놀이동무고 사춘기를 겪고 있는 동생에 가깝다. 


그건 우리학교의 특성보다는 어쩌면 재일조선인 공동체의 유대감에 가까울 수도 있다. 무국적자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온갖 박해와 소외를 겪으며 살아온 이들이 다시 그런 삶을 이겨나가야 할 다음 세대의 동생들, 후배들에게 갖는 안타까움 섞인 사랑. 때문에 ‘우리학교’ 선생님들은 지식의 전승이나 진학지도가 아니라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는 법을 가르친다. 낮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 (하지만 사실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이든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 이방인이 아닌 사람이 있을까)


영화의 말미, 혹가이도 우리학교 21기들의 졸업식에서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학교생활의 추억을 낱낱이 이야기하며 눈물 짓는다. 그리고 그 추억의 한 켠에는 반드시 선생님들이 있다. 아이들의 고백은 선생님과 학교가 등장하는 거창하고 감동적인 미담이 아니다. 그저 함께 케익을 만들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땀을 흘린 작고 소소한 기억들. 강사나 교사, 꼰대, 담탱이가 아니라 ‘선생님’이 되는 일은 그렇게 아이들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 스며드는 것 부터였다. ‘우리학교’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선생님은 ‘먼저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다.


선생님들은 험난한 세상을 맞이할 아이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땐 사양 없이 우리학교를 찾아오라”고 말한다. 언제까지고 기댈 수 있는 선생님과 학교가 돼주겠다는, 외롭고 고단한 삶을 함께 견뎌주겠다는 소중한 다짐과 약속. 


# 이념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조총련, 재일조선인, 북한. 남한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낮설고 두려운, 또 어려운 이름들이다. ‘우리학교’의 교실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아이들은 ‘북조선’을 조국이라 부른다. 운동회엔 인공기가 걸리고, 표준어가 아니라 문화어를 배운다. ‘우리학교’의 사람들은 “고향은 남쪽이지만 조국은 북쪽”이라고 여긴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종북빨갱이’를 운운할지도 모르겠다.  


해방이후 남한도 북조선도 선택하지 않고 사라진 나라 ‘조선’의 국적을 선택했던 동포들을 남한정부가 어떻게 외면했는지, 일본정부가 얼마나 박해했는지를 논하면 그들이 조국을 북쪽이라 말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학교’의 아이들에게 남과 북, 북과 남은 실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대립하고 적대하는 관념의 대상이 아니다. 아이들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들보다 더욱 분단의 비극과 지난시절의 비극에 맞닿아 있다. 등굣길에 치마저고리가 찢어지고, 수없는 협박전화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 국적선택을 강요받으며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삶. ‘우리학교’의 아이들에게 분단이란 모호한 이념의 대립이나 첨예한 정치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일부다. 정작 색안경을 모로 끼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분단을 만들고 대립을 유지하는 어른들.        


조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은 일본 우익들의 입항반대시위를 만났을 때 성에가 낀 버스 유리창에 통일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는다. 그건 아마 ‘적대’가 아니라 ‘평화’를 바라는 마음. 오직 그것만이 이 무의미하고 지루한 싸움을 끝낼 길이라는 것을 체득한 아이들의 마음이겠다.


어린 품속에 그려본 사랑하는 조국은 하나였네

오랜 세월에 목이 다 말라도 마음은 서로 눈물로 적셨네

- <우리학교> OST ‘하나’ 中



# 학교가 아이들을 키운다는 믿음


어떤 삶과 어떤 교육이 옳은 것이라고 분명히 단정할 수 없다. ‘우리학교’의 모습만이 이상적이고 아름답다고 마냥 찬미할 수도 없다. 고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학벌과 경쟁의 승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작금의 교육현실에서 이상론만을 주절거리고 지금 딛고 있는 현실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꿈만을 강요하는 일이 얼마나 허무하고 의미 없는지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경쟁하고, 서로를 적대하고, 험난한 삶에 지칠 아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만큼은 쥐어주고 싶다. 내가 이기는 법보다 우리가 함께 하는 법을 먼저 떠올리고 선생님 눈을 피하기보다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시절,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믿고, 나만 잘 사는 일을 어리석다 여기는 시절. 삶에 그런 한 시절쯤 있어야 평생을 두고 곱씹으며 힘낼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학교. 어려움이 있을 땐 사양 없이 찾아 갈 수 있는 ‘우리학교’. 우리를 언제까지나 키워주고 마침내 최후에는 기대 쉴 수 있는 그런 학교에 대한 꿈.


# 덧붙여


지난번 소개했던 <그리고 싶은 것>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일본은 점차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북일관계는 해를 거듭하며 악화되고 국제정세도 급변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재일조선인들과 ‘우리학교’들은 전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재일동포들이 북쪽을 조국이라 여기게 된 이유는 남한정부의 무관심과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단언컨대, 기적은 종로에서 시작됐습니다 - 종로의 기적


지난 9월 7일,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에 줄줄 흐르는 땀을 식히려 청계천 모퉁이 나무그늘에 앉았다. 주말 오후의 청계천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커플들이 가득했다. 더워 죽겠는데 굳이 손을 꼭 잡고 붙어 앉은 그들에게 속으로는 저주를, 눈으로는 질시와 부러움을 쏘아내고 있을 때 눈에 띈 한 커플, 서로의 땀을 닦아주고 부채질을 해주면서도 간간히 입을 맞추고 떨어져 앉을 줄 모르던, 어느 레즈비언 커플이었다. 


그 날은 <소년, 소년을 만나다>, <친구사이>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와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가 국내에선 처음으로 동성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종로와 청계천 일대엔 레인보우 깃발과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플랜카드가 즐비했다. 동성애자들과 인권운동 활동가를 비롯해 천여 명의 사람들이 종로와 청계천 일대를 메웠다. 바야흐로 동성결혼 시대의 개막. 


행정당국이 이 세기의 커플(!)의 혼인신고를 받아줄 지 여부나, 이들의 결혼식에 그야말로 똥물을 뿌린 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차치하고 이들의 결혼이 한국 사회의 이성애 중심주의, 전근대적 가족주의에 작지 않은 균열을 낸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담배연기 자욱하고 으슥한 게이바(Bar), 가장 가까운 친지들에게도 정체를 숨겨야 하는 눈물, 세상으로부터의 소외. 이런 상징들이 그동안의 동성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밝은 대낮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 열린 이 결혼식은 그야말로 ‘기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기적’의 시작은 어쩌면 ‘종로’에서부터.


# 종로의 기적


종로는 이태원과 함께 서울의 게이 커뮤니티를 양분하고 있다. 지금도 종로에는 백 개가 넘는 게이바가 밀집해 있고 젊고 어린 ‘꽃띠’들 뿐 아니라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게이들도 아직 녹슬지 않은 ‘게이다’를 발동시키고 있다. ‘P살롱’으로 불리던 파고다 극장과 극장에서 만난 커플들이 슬그머니 모여들던 종로 인근의 다방들은 게이들의 욕망과 낭만, 실연과 희망이 반복되던 곳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게이설이 나도는 어느 시인은 파고다 극장에서 지퍼가 열린 채 복상사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종로가 게이들의 ‘낙원’인 것만은 아니다. 종로의 뒷골목에선 동성애자를 겨냥한 증오범죄가 종종 일어난다. 게이 커플을 향해 갑자기 달려들어 집단린치를 가하는. 종로는 아니지만 지난 해에는 남산 일대에서도 비슷한 증오범죄가 발생했었고, 마포구청이 LGBT라는 표현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현수막 게시를 불허하고 철거를 진행한 ‘사건’도 같은 범주에서 호모포비아(동성애 공포증, 내지는 혐오증)에 해당하는 일이다. 김조광수, 김승환 커플의 결혼식에서도 불청객이 난입해 오물을 투척하고 관계자를 폭행하는 일이 발생했다. 교회장로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 남자는 “인분과 된장을 섞은 것이 바로 동성애의 현실”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종로에서 한 블럭만 벗어나도 게이들이 받는 시선은 여전하다. 어느 유명 연예인은 동성애를 ‘나쁜교육’으로, 동성애자를 ‘불쌍한 영혼’으로 표현했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는 극 중에 동성애자가 등장한 이유로 수많은 비난 여론을 감수해야 했다. 여전한 호모포비아의 세상. 동성간의 사랑이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일, 결혼을 당연하게 하는 일은 종로 밖의 세상에선 여전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 가장 리얼한 게이이야기


이혁상 감독과 ‘연분홍치마’가 <종로의 기적>을 내놓기 전에도 LGBT 영화들은 있었다. 그러나 ‘맨얼굴’의 게이들이 자신의 ‘생활’을 노출시킨 작품은 <종로의 기적>이 처음이다. 그동안의 것들은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취급하거나 영화의 주변부로 소비하는데 그치기 일쑤였다.


<종로의 기적>의 가장 큰 미덕도 이 지점에 있다. 이혁상 감독은 그동안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했던 혹은 남들과의 다름에서 상처를 받은 이들의 고생담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로인해 ‘인간극장’류의 다큐멘터리가 타자의 고통을 전시하면서 대상을 착취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사실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완성하는 가장 손쉬우면서 안인한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덕은 <종로의 기적>에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관객들은 자신들과는 사뭇 다른 양식의 삶의 모습에서 (여기서의 ‘다름’은 성정체성의 다름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 자신을 설득시키는, 이성애자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노력을 의미한다.) 느끼는 괴리감에 감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삶이 여상스럽고 보편적일수록 그 농도를 더해간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리얼리티’다. 간혹 관객일반은 피가 튀고 살점이 뜯어지는 장면을 ‘리얼하다’고 표현한다. 또는 극한의 상황까지 내몰린 캐릭터의 불쌍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값싼 동정의 말과 함께 ‘리얼’이라는 수사를 덧붙인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판타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진짜 삶’에서 머리가 뜯겨나가고 팔목이 잘려나가는 상황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리얼리티’는 현실의 고단함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있다. 그리고 모두 그 강퍅하고 고단한 삶에서 자신의 희망을 발견하고 우직하게 기적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


(<종로의 기적>은 게이에 대한 판타지를 깨는데도 적잖이 일조한다. 많은 미드에서 게이는 잘생기고 돈도 많은데 이해심까지 갖춘 완벽한 남자로 그려진다. 심지어 주인공의 믿을 수 있는 절친. 그러나 <종로의 기적>의 게이들은 배나오고, 술 마시고, 가난하고, 소심하며 가끔 찌질하다. 대부분의 한국남자들이 그런 것처럼) 


# 다큐멘터리가 삶을 변화시키는 순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는 관찰자의 위치를 고수하며 대상과의 거리유지를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엄밀히 얘기하면 모든 대상은 카메라를 거치는 순간부터 객관적일 수 없다. 그보다 이미 카메라에 담길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어쩌면 세상에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사실 혹은 진실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그래서 다큐멘터리의 본질이니 다이렉트 시네마니 하는 다소 뜬구름 잡는 소리보단 창작자의 의중이 명확히 포착되는 다큐멘터리에 눈이 가는 건 당연한 순리다. <종로의 기적>에서도 감독은 카메라 안의 풍경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이혁상 감독도 “다큐멘터리의 환상과 신화에 얽매이지 않고 감독과 주인공들의 관계가 영화에좀 더 드러남으로 이성애 중심사회를 향한 성소수자들의 메시지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영화의 촬영 전과 후 등장인물들은 물론 감독의 삶도 확연히 달라진다.


이혁상 감독은 <종로의 기적>을 통해 커밍아웃했다. 처음에는 카메라 뒤에 숨어 대상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역할을 규정했던 감독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선언하는 순간, 스크린과 렌즈로 가로막혀 있던 벽은 허물어진다. 그리고 관객들은 관찰자가 아니라 ‘종로’ 한복판으로 스며들게 된다. 스스로 ‘영화감독’보다는 ‘활동가’라는 이름이 더 편하다는 감독의 말과도, 다큐는 결국 동화(同化)를 위한 작업일지 모른다는 의문과도 맞닿는 순간.


(감독은 <종로의 기적>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변화한 부분으로 HIV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꼽는다. HIV 인권운동을 하는 욜과 석주의 관계에서 HIV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의 일이라는 것을 인지했다고. 애초의 욜의 에피소드는 대기업에 다니는 게이가 겪어야 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은 결국 HIV문제에 대한 시선으로 마무리된다.)


# 하지만 단언컨대, 기적은 시작됐다


일부러 냉정히 말하면, <종로의 기적>은 흥행에 실패했다. 2006년 개봉한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영화 <후회하지 않아>가 4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연분홍치마’가 제작한 <두 개의 문>이 7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점을 감안하면 1만 명도 채 동원하지 못한 <종로의 기적>의 스코어는 다소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독립영화, 그것도 다큐멘터리의 스코어로는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다)


호모포비아는 여전하다. 결혼식장에서 똥물을 맞은 김조광수 대표는 “그래도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행복과는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함께 사는 당연한 일이 정말로 당연해지기까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어쩌면 그건 정말 기적같은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단언컨대’ 기적은 시작됐다. 꽃미남도 아니고 배도 나왔고, 소심하고 가끔은 찌질한 이 보통 남자들이 종로에서 일으킨 기적이 점점 세상을 전염시키길 기대한다. 그래서 사실 행복한 커플에게는 오직 질투와 절망의 저주만 퍼붓고 싶은 내 바람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결혼식 날,주위를 점령한 커플들에게 혹시 망나니 호모포비아로 보일까 염려하며 선량한 눈빛을 가장해 축하의 말만 전하느라 내심 무척 힘겨웠다. 




# 덧붙여, 연분홍치마


<종로의 기적>은 물론 <두 개의 문>같은 의미있는 활동을 계속하는 ‘연분홍치마’의 이름을 꼭 언급하고 싶다.


<종로의 기적>을 제작한 ‘연분홍치마’는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이다. 연분홍치마는 1년에 한 번 꼴로 성적소수문화를 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발표한다. 그동안 <3 X FTM>,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을 발표해 기록적인 관객동원과 동시에 올 해의 독립영화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연분홍치마’는 최근 제작한 <노라노>를 마치고 활동 1기를 정리하고 새로운 활동을 준비한다고 한다. 의미있는 주제를 가장 탁월하게 표현하는 ‘연분홍치마’가 앞으로도 지속해 성적소수문화환경에 기여하는 재밌고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


결국 우리가 그려야 하는 것 - 그리고 싶은 것


결국 우리가 그려야 하는 것


한국에서 일본은 여전히 금기다. 친일파, 일제의 잔재 같은 말들은 어디서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다. 선거판에서 친일파의 후손 운운하며 상대를 공박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그다지 낯선 풍경도 아니다. 그 영향인지 이 사회엔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증오도 곳곳에 도사린다. 후쿠시마에 재앙이 닥쳤을 때, 도움의 손길을 거부하거나 오히려 고소해하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다.


사실 그 증오심이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지난 세기 일본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군국주의의 깃발을 세우고 젊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가난한 촌부들의 식량을 빼앗았고, 나라 고유의 말과 글을 없앴고, 학대하고 착취했다. 그리고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 먼 과거의 일도 아니다. 고작 60여년.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당했던 일이다. 어찌 그걸 그대로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그러나. 전쟁과 증오, 폭력, 착취, 학대, 복수. 그걸 그대로 일본에 돌려준다고 하여 과연 아픔이 치유되고 상처가 아물고 다시는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는 것일까. 


# 그려야 하는 것


영화는 2007년에서 시작한다. 당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기점으로 전 일본에 우경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는 시기였다. 한중일의 그림책 작가들은 평화그림책만들기 프로젝트를 제안해 삼국에서 아시아의 평화를 주제로 한 그림책을 동시에 출판하기로 한다. 한국에서는 권윤덕 작가가 참여했고 권 작가는 13살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기로 했다. 전쟁과 폭력 속에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소녀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


위안부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성적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의 식민지 국가에서 징용된 일본군의 성노예를 지칭한다. 일본군은 위안부를 동원하기 위해 납치나 인신매매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위안부들은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하루에 수 십 차례 강간을 당했으며 갖은 폭력과 학대에 시달렸다.


90년대 중반까지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됐고, 군이 위안소 설치 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최근 일본사회의 급격한 우경화로 위안부 범죄 자체를 부정하거나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범죄사실을 축소 은폐하려는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영화에서 권윤덕 작가는 일본의 청소년들을 만나 그림책의 초안을 보여주며 일본이 저지른 전쟁 중 성폭력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답한다. 평화그림책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일본의 출판사 인사도 “평화로운 시기를 살아가는 일본의 아이들에게 전쟁의 기억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은폐. 실제로 일본사회는 위안부 범죄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없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개인적인 위로금을 지급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고 있다.  


잊혀지거나, 잊게하거나. 


이제 고작 60여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어느덧 생존한 피해자가 57명(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11일에도 피해자 이용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뿐이 남지 않았다.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그려야 하는 이야기들.

   

# 그들이 그리지 못하는 것


그러나 권윤덕 작가의 ‘꽃 할머니’는 여전히 일본에서 출판되지 않았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의 우익세력들, 그들이 득세하며 급격히 우경화되는 일본사회. 비단 그들이 아니라도 지난 시기 자국의 범죄를, 그것도 이렇듯 더럽고 잔인한 범죄를 들춰내서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림책의 일본 내 출판을 맡았던 ‘동심사’의 회장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하고 서대문 형무소를 견학, 참배하는 열의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권 작가에게 보내온 메시지는 끝내 “일본 사회 내에선 태평양 전쟁 이전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 더욱 빈틈없이 준비해 출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 일본의 정계는 심각하게 우경화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의 개정을 촉구하고, 어느 유력 정치인은 “위안부는 정당했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일본 내 우익집단들은 위안부 범죄에 대한 양심적 활동을 벌이는 시민단체들에 대한 테러도 자행하고 있다.


# 결국 우리도 그리지 못하는 것


그러나 이같은 일이 비단 일본에 국한돼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전쟁 중 성폭력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라이따이한’. 영화 속에서 권윤덕 작가는 어린 청소년들을 만나며 한국의 군인들도 70년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많은 민간인 여성들을 강간했던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의 어린 아이들도 일본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같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베트남의 민중들이 그 광경을 봤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살인과 폭력, 그 광기의 소용돌이에서 분출되는 욕구. 그 욕구의 해소를 위해 피해를 입은 여성들. 사실 위안부 문제는 (그 규모와 잔혹함에서 한국군과 일본군의 그것에 양적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질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가해국과 피해국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전쟁이라는 광기에 희생된 여성인권의 문제다. 기실 한국사회, 특히 정부도 라이따이한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조력에 대단히 인색하다. (이용과 조력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지 ‘않는’ 것들은 일본의 우경화와 우익세력이 아니라 범죄를 범죄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 때문이다. 그것이 서푼짜리 애국주의든, 전근대적 마초이즘이든.


종종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나 소설들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질곡과 수난의 역사를 견뎌온 가여운 피해자로만 포장하거나, 일본군의 잔인함과 군국주의를 성토하는 선동을 일삼는다. 혹은 일본군에게 ‘더럽혀진’ 여리고 약한 소녀의 이미지를 덧씌우거나.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모두 본질의 은폐를 호출한다.


영화에서도 한국의 또다른 남성 작가와 출판사 인사들은(남성이다) 권 작가의 그림책에 욱일승천기가 빠져있음을 지적하며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강조하려 한다. 그러나 권윤덕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일본군 가해자에 희생된 피해 소녀들이 아니였다.


# 그리고 싶은 것   


결국 그리고 싶은 것은 전쟁과 거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성범죄, 그를 종용하는 국가권력과 그를 부러 은폐하는 애국주의다. 일본의 위안부 범죄에서 방점이 찍혀야 할 곳은 ‘일본’이 아니라 ‘성범죄’인 것.


때문에 영화를 보는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은 일본의 우익세력이나 과거의 전범들이 아니다.(그들의 사과가 필요없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성범죄 보다 일본 그 자체에 분노하고 있던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사과해야 할 것도 한국정부가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무고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강간했던 자신들의 과거와 그에 희생된 인류 전체에 대한 사과가 우선이다.


그림(畵)의 어원은 그리움이다. 권윤덕 작가도 그녀의 그림책을 보고 자랄 아이들도 그리고 그녀와 그 아이들을 모두 지켜보는 이들도 무엇을 그리워해 무언가를 그린다. 그리운 것은 증오가 아니다. 때문에 그려야 할 것, 그리고 싶은 것도 증오나 복수가 아니다. 그려야 할 것은 오직 평화와 위로, 용서, 화해. 그리고 그것은 과거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기억하는데서 출발하며 직시하는 일이란 표면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일이다.


상처가 아픈 것은 낫기 위해서다. 벌을 받는 것은 다시는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의 거름이 되기 위함이다. 사과는 용서받기 위해 하는 것이고, 화해는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전쟁과 폭력, 학대가 없는 꽃 같은 세상. 꽃할머니가 마침내 그렸을 그 세상을 그리는 것은 남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 아버지의 이메일

 


우리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늘 ‘폭군’이었다. 사소하게는 TV 앞 리모컨 점유율이나 저녁식탁의 고기반찬 선점권부터 조금 더 심각하게는 어머니를 향한 폭력이나 무책임한 가정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매일 술을 마시던 아버지, 그 술상을 뒤엎던 아버지,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 결코 나를 이해하지 못하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이미지는 가부장, 남근주의 같은 말들로 규정됐다. 그렇게 아직 젊은 날을 살아가는 이들은 대부분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증오심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토대가 됐다.


그렇다고 이 시대의 아버지가 얼마나 가족들로부터 소외됐는지, 얼마나 외로운 인간인지를 무작정 두둔하자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적어도 이 시대 한국사회의 아버지는 정말로 그랬다. 다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도.


 


# 그녀의 아버지


홍재희 감독은 그녀의 아버지 홍성섭 씨로부터 43통의 이메일을 받는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1년간 보낸 편지들. 거기엔 1935년부터 이어진 70여 년간의 삶이 적혀있었다.


아버지는 ‘빨갱이들의 나라’가 지겨워 한국전쟁 직전 어린나이에 홀로 월남에 성공한다. 배움에 대한, 성공에 대한 열망이었다. 원대한 꿈과 영민함으로 사업에 성공을 목전에 두고 그는 한국전쟁을 맞이한다. “지긋지긋하던 인민군을 피해왔더니 다시 인민군 천지가 돼버린 것”이다.


이 전쟁과 가난, 이 지긋지긋한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아버지는 바다 건너의 땅에서 꿈을 찾았다. 월남전이 벌어진 베트남, 건설경기 붐이 불던 중동, 독일, 호주, 그리고 미국. 언제나 떠나고 싶어 했던 아버지에게 한국은, 그리고 한국의 가족은 거추장스런 짐이었다. 그리고 그 꿈이 좌절된 아버지에게 한국과 가족은 철저한 원망의 대상.


아버지는 좌절된 꿈이 남긴 상처를 가족에 대한 폭력으로 메우려 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가끔은 딸을 때렸다. 경제적으로 무능했으며 무책임했다. 가정경제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이었으며 똑똑한 두 딸은 대학을 가자마자 집에서 ‘탈출’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 큰 딸과 아버지가 그렇게나 싫어하던 운동권이 된 둘째 딸의 삶의 원동력은 어떤 부분에선 아버지에 대한 증오였다.



# 우리들의 아버지



그러나 영화가 조금씩 더 아버지의 지난 삶을 추적해 갈수록, (감독 그녀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은 그 방향성을 잃어간다. 어머니 집안의 내력이 밝혀지면서 부터, 차라리 너무 비극이어서 이제는 희극적이기까지 한 이 나라의 현대사가 이들의 가족사로 침투하면서.


어머니의 작은 오빠는 한국전쟁 직후에 행방불명 됐다. 그 작은 오빠를 찾으러 간 형제도 마찬가지로 행방불명됐다. 당시의 정부는 행방불명을 월북으로 의심했다. 서슬 퍼런 연좌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설상가상 어머니 집안의 오빠들은 전쟁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꿈을 좌절시킨 것은 그 연좌제였다. 높은 성적으로 해외파견 업무 시험을 통과해도 연좌제에 묶여 실패하거나 금세 국내로 소환돼야 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술상을 뒤엎으며 뇌까리던 “빨갱이 처갓집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는 외침은 사실이었던 거다.


지겹고 미웠던 인민군을 피해 넘었던 38선이었지만 전쟁은 다시 아버지의 꿈을 앗아갔고, 그 전쟁과 대립이 남긴 연좌제는 다시 아버지의 남은 모든 희망마저 빼앗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무엇 하나 딱히 잘못한 것도 없이 좌절해야했다. 남은 것은 짧은 해외파견동안 마련한 작은 집 한 채. 아버지는 그 집 한 채만을 부여잡은 채 집안으로 침잠했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에겐, 심지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이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남자에겐 ‘전가’의 대상이 필요하다. “너 때문이야”.


아버지에게는 “빨갱이 처갓집”이 원망의 대상이었다. 북에 남겨둔 가족들이 있으니 북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를 법도 하건만, 아버지에게 북한은 그저 ‘빨갱이들의 나라’였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빨갱이’의 의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부숴버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어쩌면 우리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내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늘 나를 앉혀놓고 무너진 당신의 꿈을 토로했다. 문인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는 ‘설국’이나 ‘에덴의 동쪽’같은 소설 이야기를 했다. 물론 이야기의 결론은 가난한 집의 장남, 가난한 집의 맏사위로서 꿈을 접어야 했던 기구한 팔자와 그렇게 포기하기엔 아까웠던 자신의 문재에 대한 자랑이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사실 아버지뿐일까, 꽤 유명한 만화가의 유망한 문하생이었던 어머니는 부지깽이를 들고 달려온 외할머니의 손에 붙잡혀 집으로 돌아가야 했었다) 대부분 그렇게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유로 좌절해야했고 포기해야했고, 또 체념해야했다. 그리고 적당히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어느 곳에 그 원망을 게워내고. 그리고 그 한과 원망으로 얼룩진 폭력은 대물림되고.


‘그건 오로지 이 지겹고 고단한 한국의 현대사 탓이었다’고 말한다면 이건 또 얼마나 무책임해 보이겠냐만. 사실이 그렇다. 그들은 그렇게 누구의 탓도 아닌 채 좌절하고 포기했다.


<감독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 웃음을 찾은 순간은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미국’을 찾았을 때다. 결혼한 큰 딸을 만나러 향한 미국. 평생을 방안에서 술만 마시던 아버지는 정원을 손질하고 손자를 안고 산책을 나섰다. 집안 곳곳을 청소했고 어머니와는 평생의 처음으로 다정하게 외출했다.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었던 건 분명 대한민국이었을 것이란 느낌이 드는 순간들.>


 


# 그리고 그녀와 우리의 아버지들


영화는 내내 질문한다. “우리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이해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아버지를 용서할 자격이 있겠냐는 질문이다. 감독은 카메라 너머에서 ‘홍성섭 가족’을 기록하는 홍재희 감독이면서 동시에 ‘홍성섭의 차녀 홍재희’로 그 프레임 안에 꿋꿋하게 서 있다.


그 과정은 감독 홍재희가 파헤친 가족과 아버지, 어머니의 알지 못했던 과거를 홍성섭의 차녀 홍재희가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들은 또 우리의 아버지와 가족들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아버지 홍성섭 씨는 죽기 직전까지 오래도록 살아온 집의 재개발 투쟁에 참여한다. 평생을 두고 그렇게나 혐오하던 ‘빨갱이 짓’에 가담하는 것. 어쩌면 아버지는 그 투쟁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해왔던 ‘빨갱이’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시금 떠올려본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빨갱이 둘째 딸’에게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우리의 아버지들과 (사실은 내 아버지와) 함께 이 영화를 다시보고 싶어졌다. 여전히 세상에 대한 증오와 체념을 동시에 간직하고 자신에게 또 자신의 가족들에게 모종의 폭력을 가하고 있는 우리의 아버지들과. 그리고 묻고 싶어진다.



“아버지, 제가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 사적 다큐멘터리의 미덕



감독의 아주 사적인 다큐멘터리였던 <아버지의 이메일>은 사적 다큐멘터리가 가져야 할 두 가지의 미덕을 모두 지닌다. 하나는 홍성섭의 차녀 홍재희가 그녀의 가족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편지.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아버지를 가진 우리들에게 보낸 교환일기장 같은.



“결국 우리의 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이만큼이나 아팠어.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나의 살던 고향은 춤추는 성미산 - 춤추는 숲


택시에 올라 목적지를 말하기 무섭게 기사 아저씨는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앞서 택시에 탔던 어느 모녀의 이야기였다. 말인즉슨, 엄마는 내내 어린 딸을 꾸중했는데 그 까닭이라는 것이 버스에서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했기 때문이란다. “제 밥그릇도 제대로 찾지 못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는 엄마의 걱정. 기사 아저씨는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지 무섭다”고 했다.


간간히 소식을 주고받는 중학생 조카는 얼마 전, 현장학습으로 어느 대기업의 사옥을 방문해 ‘멘토링 스쿨’에 참가했다 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직원들이 열네살의 중학생들에게 자신의 연봉과 학력을 과시하며 스스로 ‘멘토’라 칭한 그 강연회의 주제는 ‘꿈’이었다고. “어떤 어른이 될지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던 조카는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냐고 물었지만, 딱히 무어라 대답해주지 못했다.



# 다시 마을 - 인간적 삶의 복원


마포구에 위치한 성미산 마을은 ‘대안적 도시공동체’다. 초보 엄마, 아빠들은 “우리는 잊고 살았지만 아이들만은 부모세대와 달리 인간으로서 지키고 살아야 할 가치를 배우고 자랐으면”하는 마음으로 성미산 자락에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한해 두해가 지나는 동안 어느덧 마을에는 마을 밥집과, 카페, 학교까지 생겨났고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는 최초로 주민공천 후보까지 내는 등 성공한 도시공동체, 풀뿌리 민주주의 실험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도시공동체니 공동육아니 민주주의니 하는 다소 거창한 말보다 성미산은 그저 ‘동네’, ‘마을’이라는 소박한 말이 더 어울리겠다. 불과 2~30년 전만해도 당연했던 그 ‘동네’.


감독은 영화의 초입에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누비며 동네 풍경을 자랑한다.(그렇다, 그건 분명 자랑이다.) 사람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가는 길에, 학교를 다녀오다가, 골목어름에서 햇볕을 쬐다가 감독과 인사를 나눈다. 이웃사촌은커녕 옆집,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오늘날의 도시생활에서 인사하고 화답하고 미소 짓고 음식을 나눠먹는 마을의 풍경은 그리움과 어색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소통과 관계 맺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여기에 꼭 들어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인간이 인사와 화답으로 표현되는 관계 맺기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거든 대답하지 말고 얼른 집으로 돌아오라”고 가르쳐야 하는(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점을 또한 인정한다) 세상은 분명 병들어 가고 있다.


어느덧 부모세대가 된 이들, 그러니까 속칭 386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사랑이 풍부한 어른들에 의해 키워졌다. 그들에게는 할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이었다. 이모와 삼촌은 물론 동네 아주머니들과 형, 누나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사랑 많은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 사랑을 주는 법, 받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 힘이 아마 암울했던 시대, 그들이 목 놓아 세상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었을 것.


그러나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 무한경쟁의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 옆에 앉은 친구는 곧 너의 경쟁자임을 잊지 말라고 강요하는 유명학원의 광고 문구를 보며 자라야 하는 아이들은 어디서 사랑을 나누고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그래서 서로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이뤄지는곳, 마을은 그대로 인간적 삶의 복원을 향한 첫걸음이다. 시간과 관계의 축적. 단골손님과 동네 형들과 옆집 아줌마와의 인사, 다툼, 화해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마을 공동체. 그 관계의 중첩과 마을이 서로를 돌보고 안아주는 공동체를 만들 것이라는 희망.   

  


# 나무를 심는 사람 - “생명에는 주인이 없어요”


감독은 어느 날 성미산 마을의 열세살 승현이가 파헤쳐진 나무의 뿌리에 흙을 덮어주는 장면을 포착한다. 나무가 안쓰럽다는 듯 승현이는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고사리 손으로 흙과 나무뿌리를 어루만지고 있다.


어느 사학재단의 개발이익을 위해 성미산은 파헤쳐지고 있다. 아이들이 직접 심은 어린나무들도 수십 년간 마을을 지켜봤을 아름드리도 포클레인과 전기톱 앞에서 허물어진다. 거세게 저항하는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관청 공무원들과 시공사 직원들은 ‘사유지’임을 강조한다.


그러게. 제 소유인 땅에서 주인이 무얼 하든 누구도 상관할 수 없다. 어른들의 세계는 그렇다. 그러나 승현이는 “생명에는 주인이 없다”며 어른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한다. 


“이 작은 나무에도 온갖 개미들이며 벌레들, 진딧물이 있어요”


제 주변에 살아있는 것들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지혜. 아파트 평수를 넓히는 것을 생의 지상과제로 삼은 어른들에게는 없는 그 지혜가 산을 놀이터 삼아, 나무와 꽃을 친구삼아 살아온 아이들에게는 있다. 사람이 버젓이 앉아있는 땅을 중장비로 파헤치고, 높은 곳에 매달린 사람들을 밀쳐내고, 전기톱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어른들에게는 없는 지혜. 


여담이지만, 마을의 한 아이는 공사장 주변에 포도 씨를 뿌리면 공사가 멈출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포도가 자라나면 인부아저씨들이 포도를 따먹느라 공사를 안 할 것이라는 이야기. 중장비로 위협하고 완력과 악다구니로 저항해야 하는 어른들을 모두 일순간에 부끄럽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는 떡갈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곳이 그의 땅인지 나는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곳이 공유지이거나 아니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백 개의 도토리를 심었다 -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中


성미산을 놀이터삼아 자란 아이들은 땅과 나무를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자연보호’니 ‘녹색성장’같은 표어를 내걸며 땅을 파헤치고 나무를 자른다. 그건 사람도 자연도 그저 자신의 주변부, ‘환경’으로만 대하는 태도와 자신을 포함한 뭇 생명을 모두 자연의 일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의 차이다.  


# 다시, 나의 살던 고향은


마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영화의 흐뭇한 시선은 울고, 다치고, 슬퍼하는 이들의 흔들리는 시선으로 서서히 옮겨간다. (영화에는 감독의 촬영카메라 외에도 주민들이 핸드폰이나 캠코더로 직접 찍은 영상들이 적지 않게 들어있다. 그 영상들은 어둡고 흔들리는 주민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 산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안타까움, 너무나 두꺼운 현실이라는 벽에 고작 조약돌 하나 던진 것이라는 자조.


영화의 시선은 그렇게 사람들의 절망과 슬픔을 응시한다. 사람들은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실패했고, 지쳤고, 다쳤다. 그러나 절망에 대한 지긋한 응시에 따르는 것은 다시 모종의 희망이다. 그것은 마을사람들이 몸으로 부대끼며 포클레인을 막아 세우던 싸움에서 ‘냅둬유’라고 노래를 부르며 성미산과 그 산자락 사람들의 삶을 전달하는 방식의 저항으로 옮겨가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한 소절씩, 한 음정씩 짚어가며 인간적 삶에 대한, 뭇 생명들과 함께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그렇게 다른 세상과 더 나은 삶의 꿈을 조금씩 전염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영화와 성미산의 사람들이 다시 부여잡은 희망의 방식이다.


마을의 어른들은 성미산이 마을 아이들의 ‘고향’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마음 한켠에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 곳, 고향.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고향을 지키려 그토록 힘겹고 어려운 싸움에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싸웠다.


그 치열했던 싸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고향은 허물어질지 모른다. 젖은 흙을 헤집고 나온 지렁이, 제 손으로 한 삽씩 정성스레 심은 아까시 나무가 모두 콘크리트 덩어리 밑에 파묻힐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고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다. 아이들의 고향은 성미산이라는 공간 그 자체보다는 어쩌면 산의 품에서 자란 이만 가질 수 있는 너른 마음, 지고 또 져도 노래 부르고 웃으며 다시 희망을 움켜쥐는 삶에 대한 의지이며 그 마음을 지닌 이들과의 관계와 기억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말미, 마을 사람들은 공사 중에 뽑혀버린 성미산 장승을 다시 세운다. 그 앞에서 너그러운 마음과 산의 품을 기원하며 춤추고 노래한다. 그렇게 다시 처음이다. 비록 산의 한 뭉텅이가 잘려나가더라도 다시 살아갈 희망을 부여잡은 그 춤과 노래. 그리하여 시간이 또 지나 언젠가는 더 이상 성미산이 꽃피는 산골이 아니게 되더라도 


“나의 살던 고향은 춤추는 성미산”      





    

해방이후 가장 폼나는 언니들 - 왕자가 된 소녀들

해방 이후 가장 폼나는 언니들 이야기 - 왕자가 된 소녀들 


작년 이맘쯤 9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던 어느 드라마의 인기는 그 시절,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오빠들’의 기억을 소환했다. 이른바 팬질, 그러니까 일명 ‘빠순이’로 불리던 소녀들의 오빠를 향한 불타는 애정에 그녀들의 부모는 속을 끓여야 했다. 오빠들 집 앞에서 며칠이고 노숙하는 일은 기본이요, 오빠들의 공연을 보기위해 학교를 탈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자 교육부가 일선 학교에 조퇴금지령을 내리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요즘 것들’을 타박하던 그 부모들에게도 조용필 오빠나 나훈아 오빠를 쫓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조용필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조용필이 “기도하는~”하며 노래를 시작하면 절로 따르는 소녀들의 비명소리가 애초부터 노래의 일부분인줄 알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용필오빠를 따라다니던 소녀들의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속깨나 썩었을 테다. 


그러나 그녀들도 실은. 

     

# “팬레터는 전부 혈서야”


한국전쟁 직후 50년대, 여성국극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꽃 같은 외모의 도령이나 왕자는 물론, 텁석부리 장한이나 근엄한 왕까지 모든 배역을 여성들이 맡아 연기했던 여성국극의 인기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배우들에게 온갖 음식을 해 나르는 일은 기본이었고, 어느 누구는 국극 단체를 만들어 운영하겠다며 2억이 넘는 돈을 바람처럼 날려버렸다고도 한다. 배우들의 옆에 꼭 붙어 온갖 잔심부름과 수발을 해주는 팬들도 있었다. 특히 임춘앵이나 조금앵 같은 인기배우들의 인기는 엄청났는데, 팬들의 부탁으로 남장을 하고 가상 결혼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국극배우 조금앵 선생은 당시의 인기를 회상하며 “팬레터는 전부 혈서”였다고 말하니 그 열광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유로운 연애는커녕 여성들의 문 밖 출입조차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던 전통적 유교사회는 해방과 전쟁을 지나며 빠른 속도로 자유주의 풍조를 유입했다.(정비석의 ‘자유부인’같은 소설이 연재되고 논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당시의 시대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전통적 여성상과 서구의 자유로운 여성상이 교차하던 시절, 여성들만이 무대에 올라  남성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기존관념의 전복이었다. 거기다 위풍당당한 목소리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배우들의 자태가 그토록 멋졌음에야. 새로운 시대, 보다 나은 삶을 꿈꾸던 소녀들이 당당히 집을 나와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당당히 사람들의 열광을 얻어낸 국극 배우들에게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여자기 때문에”


절정이던 국극의 인기가 시들해진 것은 60년대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아이러니하게 ‘전통문화 보존사업’이 시작되며 국극의 인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판소리나 창극 같은 공연예술들이 ‘무형문화재’라는 이름을 얻으며 정부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으나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국극만은 제외됐다. 


심지어 국극은 “문화예술계에 씻을 수 없는 죄과를 지었다”거나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창극”이라는 비난을 받아야했다. 국극이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당시 국극 무대의 연출과 안무를 맡았던 이들은 점차 국극 무대에 발길을 끊었고 나중에는 자신이 국극을 만들었었다는 사실도 숨기곤 했다. 배우들은 요정에서 벌어지는 ‘기생파티’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하거나 하나 둘 무대를 떠나야했다. 국극 최고의 스타였던 임춘앵도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975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느덧 고희를 훌쩍 넘긴 국극배우들의 자조처럼 “여자기 때문에”받아야 했던 수모였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국극이 ‘사이비예술’로 치부되며 전통문화 보존사업에서 제외된 것도, 배우들이 결혼이나 임신, 출산의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국극이 “여자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화예술계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쳐 여전히 강성했던 남성중심의 사고체계는 남자를 배제한 무대에서 남자를 연기하면서 남자보다 인기있는 그녀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새로 들어선 권위주의 군사정부에선 더더욱. 여성국극은 어느새 “여자들만의 기괴하고 기형적인 사이비 예술”이 됐다. 


영화 속 국극배우들의 회고는 남성중심의 한국사회가 어떻게 여성들의 문화활동과 노력을 거세해 나갔는지 명백히 진술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배우’보다 ‘여배우’로 호칭되는 이들과 ‘남성들이 바라봐주는 대상으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으로 대변되는 문화예술계 여성들의 지위로 귀결됐다.

  

# 왕자로 사는 것, 소녀로 사는 것


영화의 제목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우들은 제목처럼 왕자가 됐지만 본질은 분명 소녀, 여성이었다. 그녀들은 무대 위에서 뽐내는 남성성과 여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에서 혼란을 겪기도 하고, 상대 배우나 팬들과의 묘한 감정에서도 혼란을 느낀다. (여성스타들과 여성팬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관계의 모습들은 어느 퀴어 영화나 드라마보다 흥미로운 모습이다. 영화 속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마음과 눈이 맞은 이들은 한국을 떠나 지금도 친구처럼 연인처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결혼이나 출산처럼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주어진 의무(?)에 굴복하기도 하고 이를 거부하거나 극복하거나 혹은 실패하는 과정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임신으로 무대를 떠나야했던 배우가 일흔이 훌쩍 넘어서야 뱉은 “결혼이 잘못이었다”는 회고는 여성으로서, 배우로서 순탄치 않은 삶을 그대로 견뎌온 그녀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나이 들어도 늙지 않는 언니들


영화에 등장하는 국극 배우들은 대부분 고희를 훌쩍 넘겼다. 무대 위에선 여전히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내고 역동적인 몸짓을 보이지만 무대 뒤에선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짚어가며 걷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최연소 배우는 67세의 인간문화재 이옥천 명창이다. 그녀는 여전히 선생님과 언니들에겐 막내다. 쇠락한 인기는 국극계의 고령화를 불러왔다. 현재 국극보존회를 중심으로 국극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그저 국극이 좋았던 그 ‘언니’들은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늙지 않았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우직한 목소리로 무대를 호령하는 조금앵 선생이나 지금도 다섯 개의 개인 팬클럽을 보유한 박미숙 선생은 그 때처럼 무대 위에서 노는 것이 좋다. 국극 배우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 사재 2억원을 바람처럼 날려버리고도 아깝지 않았던 왕년의 소녀팬들도 여전히 ‘언니들’곁에 머물고 있다. 


수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던 그 시절 같은 국극의 영화는 어쩌면 다시는 없을지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어느 동사무소의 조그만 경로잔치 같은 무대만이 국극에게 허용될 수도 있다.(실제로 영화에는 동사무소 경로잔치에서 조금앵 선생 같은 국극계 최고의 배우들과 인간문화재 이옥천 명창이 공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나이든 배우들이 모두 세상을 등지고 국극의 명맥이 끊어질 수도 있다. 


(대단히 안타깝다는 마음을 전제하면서)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떨까. 다만 이어졌으면 하는 것은 왕자를 기다리도록 강요된 지위와 역할을 과감히 걷어차 버리고 제 발로 왕자가 되어버린 그 언니들의 자유로움과 당당함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화려했던 지난 날을 호출하고 아쉬워하는 추억담이 아니다. 그 멋있던 국극하는 언니들이 영화를 통해 부른 것은 지난 날, 영광의 시절을 살던 자신들이 아니다. 이제 다시 자유로운 모습으로 자신들을 닮을 ‘왕자가 될 소녀들’. 


생명이 흐르는 강 - 모래가 흐르는 강



지율스님은 지난 2004년,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철 터널공사로부터 천성산의 꼬리치레 도롱뇽을 지키기 위해 모든 곡기를 끊었다. 지율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도 정부는 터널공사를 강행했다. 지율스님과 환경운동단체들이 낸 공사금지 가처분 소송도 대법원에 의해 최종 각하, 기각됐다.  


제주 강정마을에서는 매일같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폭 1.2Km의 한 덩어리 바위로 이뤄진 구럼비 바위에는 폭약이 설치되고 연산호군락지에는 콘크리트 덩어리가 쏟아진다. 강정 앞바다를 제 집으로 삼은 세계적 희귀어종 남방큰돌고래와 붉은발말똥게는 졸지에 집을 잃고 있다. 강정마을을 지키려는 평화활동가들은 몸으로 트럭을 막아 세우며 싸우고 있지만 해군기지 공사는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였다던 새만금 간척사업과 부안의 핵폐기장 건설사업, 밀양의 농지들을 관통하는 고압 송전탑 건설 사업들도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저마다 다른 형태를 띠고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시작됐지만 그 속내는 같다. (어떤 것들은 인간도 포함한) 생명의 희생을 딛고 선 것. 그리고 2008년, 22조원의 예산을 들인 지난정부 최대의 국책사업, ‘4대강 정비 사업’이 착공했다.


# 모래가 흐르지 않는 강


4대강사업 착공식 소식을 들은 지율스님은 산에서 내려와 낙동강으로 향했다. 스님은 물길을 따라 걸으며 공사현장과 변하는 강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스님은 그 순간을 “수해 예방, 수자원 확보, 경제 발전 등 정부의 화려한 구호와는 정반대로 내 눈이 보고 있는 것은 무너지고 파괴되는 섬뜩한 국토의 모습이었다”고 기억한다. 


2009년에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상류, 영주에 댐공사가 시작된다. 댐건설로 내성천의 원앙, 먹황새, 수달은 사라져간다. 스스로 흘러 강을 정화하고 수 Km의 백사장을 만들었던 모래들도 사라지고 있다. 소백산 줄기부터 흐르고 흘러 내성천까지 온 고운 모래는 영주댐에 가로막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반면 남산을 6개나 쌓을 수 있을 만큼의 모래를 파낸 낙동강에 엄청난 빈공간이 생기면서 빨라진 물살은 내성천의 모래를 기하급수적으로 쓸어가고 있다.  


내성천의 모래는 야생동물들의 삶터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흐르는 강물을 스스로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고운 모래 사이사이에 있는 미생물들은 번식하며 오염물질을 분해한다. 내성천이 모래를 받아들이고 품고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낙동강은 두께 22미터짜리 정수필터를 갖는 셈이다.


사라지는 것은 모래뿐이 아니다. 영주댐이 완공되면 내성천을 젖줄삼아 땅을 일구며 살아온 마을의 일상이 통째로 사라진다. 지율스님이 영주댐 수몰지구로 들어서자마자 만난 것은 한 평생을 같은 마을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감자밭이었다. 채 다 자라기도 전에 중장비에 헤집어져 드러난 감자. 어서 이주하라는 경고였다.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당산나무도 팔다리가 잘린 채 어딘가로 실려 갔다. 


지율스님의 눈길은 내성천변의 모래 한 알, 호미자국보다 커다란 바퀴자국이 더 많은 감자밭, 곧 사라질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얼굴, 60년간 땅을 일구며 살아온 노파의 주름살을 모두 담아낸다. 그것은 모두 강과 함께 살아온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며 역사다. 그리고 동시에 댐이 물길을 막으면 곧바로 사라져버릴 것들이다. 

 

# 강을 바라보는 우직하고 겸손한 시선


<모래가 흐르는 강>은 수려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스님이 직접 가정용 카메라로 찍은 영상은 대부분 투박하고 이야기는 정돈되지 않은 채 혼란스럽게 펼쳐진다. 고저가 없는 편집은 긴장감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흥행한 다른 다큐 영화들처럼 기발한 아이디어나 톡톡 튀는 내레이션도 없다. 그러나 <모래가 흐르는 강>은 어느 다큐멘터리보다 성실하며 그 성실함을 기반삼은 묵직한 설득력을 지닌다.


스님은 전화번호부 몇 개를 겹쳐놓은 두께의 환경영향평가서를 직접 검토해 환경영향평가가 얼마나 엉성하게 이뤄졌는지를 찾아내고 영주댐 건설과 4대강사업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4년여의 시간동안 꼼꼼하게 기록된 내성천의 모습이 다큐멘터리 최고의 미덕은 묵묵히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화는 4대강 사업이 누구의 잘못인지 드러내며 ‘범인’을 타박하지 않는다. (영화의 초입, 카메라는 공사장 바리케이드에 새겨진 특정기업의 로고를 꽤 오랜 시간 주목하지만 그 기업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대부분의 공사를 주도하며 한국사회 자본의 상징과도 같은 기업이다. 그 장면은 어느 기업에 대한 비판보다는 ‘자본’ 자체에 대한 응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스님은 차라리 강바닥을 헤집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는 이 사태는 사회전체의 동조 혹은 묵인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동조 혹은 묵인의 실체가 생명과 생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필부필부의 어리석음이든, 개발이익을 기대하는 이기심이든, 무기력함과 패배감에 잠식당한 체념이든.


만듦새가 투박한 만큼 영화와 스님의 ‘진심’은 더 우직하게 다가선다. 화면을 통해 보인 것은 화려하고 현란한 기교가 아니라 피사체를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이다. 대상의 실체를 완벽히 이해하고 분석하겠다는 야심이 아니라 그 단면을 진심으로 바라보겠다는 겸손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그대로 영화의 주제의식과도 맞닿는다. 화려하게 꾸며내고 만들어내는 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두어 스스로 생명을 잉태하는 아름다운 강. (영화 중반부, 정부의 대규모 식수사업을 알리는 뉴스와 벌목현장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은 다소 뜬금없지만 동시에 영화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마 카메라를 든 감독이 진리 앞에서 겸허해지는 스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 강은 흘러, 다시


제주 강정마을에서 구럼비 바위를 지키는 송강호 박사는 다큐영화 ‘잼 다큐 강정’에서 “인도네시아 바다에 있는데 형광등 하나가 떠내려 와 건져보니, 번개표 형광등이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대로 세계가 분절돼 있지 않다는 깨달음이다. 집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흘러 그대로 먼 바다의 파도가 되기도 하며 에베레스트 꼭대기에서 녹은 얼음물도 흐르고 흘러 어느 마을, 어느 집 화장실의 뒷물이 된다. 그렇게 세계는 이어져 있다.


지율스님이 마을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는 트럭에 헤집어진 감자를 다시금 밭에 심는다. 할머니는 스님에게 바람이 불면 꽃도 떨어지고 타는 불도 연기처럼 사라지듯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게 자연히 나고 사라지는 자연의 일부라고 말했다. 삼라만상은 결국 상호부조하고 사라지며 다시 순환하는 대자연의 일부라는 이야기, 생명을 심고 거두며 다시 돌려주는 땅에서 보낸 오랜 세월이 준 지혜.


불교경전인 법구경은 “자연을 이용하기를 꿀벌이 꽃가루를 채집하듯이 하라”고 가르친다. “꿀벌은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를 다치는 일이 없듯이 사람도 자연을 이용할 때 자연의 풍요로움이나 아름다움을 오염시켜서도 안 되며, 자연에게서 회복할 수 있는 자생력과 활력소를 빼앗아서도 안 된다”며. 그것은 인간은 결국 자연의 품에서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자연과 생태를 훼손하는 일이란 결국 제가 제 목을 죄는 어리석음이라는 가르침, 더 많은 꽃가루를 얻으려는 욕심으로 함부로 꽃을 대한 벌은 다시는 꽃가루를 얻을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내성천에 들어선 스님은 자신의 발을 바라본다. 흐르는 물과 모래는 천천히 스님의 발을 덮고 이내 스님의 발은 내성천 모래 속에 파묻힌다. 그것은 마치 인간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강과 모래의 품에서 그를 딛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4대강사업, 개발자본, 부실한 환경영향평가, 황폐해진 강변, 사라지는 마을. 1시간 30분 동안 보이는 것은 가슴 아픈 장면들에도 영화를 보고난 후 희망을 품은 것은 그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었다. 그래도 다시 우리의 발을 품어주는 맑은 물과 고운 모래. 


영화는 강에 기대 사는 ‘우리’가 다시 강을 찾아가는 일이 다시 강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강은 물리적 존재로서의 내성천과 낙동강을 향하는 발걸음 뿐 아니라 생명의 탯줄로서 존재하는 강을 깨닫고 느끼는 과정이기도 하겠다.


스님은 모래가 흐르는 강이 우리 곁에 있었음을 알았고, 그 모래가 흐르는 강은 다시 스스로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가 걸었던 아름다운 강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의 전염, 그것이 스님과 강이 지닌 희망의 씨앗이며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삶과 미래를 희망에 가까운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동력이고 근거가 될 테다. 



보통사람들의 삶으로 엮어가는 일상의 역사 - 웰랑, 뜨레이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왕의 이름을 외는 일이다. 이를테면 임진왜란은 선조 때, 삼국통일은 문무왕이. 하는 식이다. 역사책은 임진왜란 당시 남산 밑에 살던 개똥이네 집이 어떤 봉변을 당했는지, 삼국통일로 인해 의주 살던 말똥이가 어떤 경위로 당나라 사람이 돼버렸는지 같은 사연은 기록하지 않는다.

 

80년 5월의 광주나 70년대의 캄보디아 내전도 그렇게 기록됐다. 역사책은 전두환 신구부의 정치적 의도나 크메르 루즈와 친미 정권의 대립을 ‘기록’했다. 그러나 광주와 캄보디아의 ‘기억’은 어떻게 남았을까. 80년 광주의 주민들은 새로운 군부가 어떻게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의 요직을 차지해 갔는지 일일이 꿰뚫고 있지 않았지만 국가가 어떻게 사람들을 억압했고 그들은 이에 어떤 방식으로 저항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농부들은 크메르 루즈와 친미정권 사이의 국제적 역학관계를 정확히 분석하고 있지는 않아도 전쟁과 폭력이 새긴 상흔이 자신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다.

 

역사란 그렇다,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란 결국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일상이 켜켜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전쟁, 내란, 쿠데타, 학살, 기타 등등. 역사교과서의 굵은 글씨들은 그 일상의 축적이 낳은 효과이거나 혹은 성과일 뿐.

 

김태일 감독은 2010년, 다큐멘터리 ‘오월애’를 통해 80년에도, 지금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잡아냈다. 거창하고 위대한 역사로서의 광주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날들의 광주를 살갗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2년 후 감독은 다시 ‘살갗에 남은 기억’을 더듬으려 캄보디아로 향했다. <웰랑 뜨레이>

 

# 기록되지 않은, 그러나 실체에 가장 가까운

 

김태일 감독은 ‘오월애’를 시작으로 ‘세계 민중사 10부작’을 기획하고 있다. <웰랑 뜨레이>는 10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김태일 감독이 규정하는 민중사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민중’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만들어낸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역사가 의미하는 것이 시대가 움직여온 기록이라면 시대를 움직여온 ‘민중’이야말로 역사의 주체일 것이다. ‘민중’이나 ‘주체’라는 다소 거창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결국 할머니가 어린 손주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와 할아버지의 패인 주름에 간직된 사연들이 곧 역사라는 가장 근원적인 인식이다.

 

김태일 감독은 내전 이후 캄보디아 민중들의 삶을 담아내고자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캄보디아 프농족 뜨레이 가족을 찾는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캄보디아 내전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 듯 보인다. 그보다는 차라리 뜨레이 가족의 일상을 묵묵히 담아내거나 그들과 함께 하려는 감독 가족(이후부터는 김태일 가족의 아들 이름을 따 ‘상구네’로 통칭)의 고역을 담아내려 애쓴다.

 

카메라는 영화 내내 뜨레이 가족의 일상, 고된 노동을 따라간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상구네 가족도 뜨레이 가족의 고된 노동에 동참한다. 카메라는 (혹은 카메라를 들쳐 맨 상구네 가족은) 뜨레이 가족의 일상적 노동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힘겨운지, 그 힘겨운 노동에도 뜨레이 가족이 얼마나 궁핍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럼에도 이들이 어떻게 자연과 땅과 함께 살아가려 노력하는지를 목격하고 함께한다.

 

그러다보니 영화는 ‘내전 이후 캄보디아 민중의 삶을 재조명 한다’는 기획의도가 무색할 지경이다. (과장을 조금 포함해)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의 작법을 따르자면, 사전 취재를 통해 내전을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일상을 ‘적당히’ 촬영한 후, 내전을 회고하는 그들의 인터뷰를 감동적으로 ‘뽑아내’고 내전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그럴듯한’ 내레이션을 덧붙여 편집한다. 당시 사건의 자료영상 따위가 곁들여진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웰랑 뜨레이>는 이 일반적인 작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건 아마 ‘민중사’를 이해하는 감독의 인식 때문일 테다. ‘사건’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김태일 감독은 “민중의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이 ‘역사적 사건’과 뗄 수 없는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록에 담기지 않은 이들,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역사를 구성하고 싶은”의도다.

 

뜨레이 가족은 상구네가 처음 찾아왔을 때 상구네를 경계한다. 상구네가 예수교를 전도하러 온 선교사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뜨레이 가족은 내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일도 기꺼워하지 않는다. 자급자족이 점차 힘겨워지지만 벼농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은 결국 식민지 시절의 선교인들에게, 내전 당시의 양측 군인들에게, 독재정권의 권력에, 신자유주의 파고에 이들이 위축되고 배제돼온 역사를 증언하는 일들이다.

 

# 그들과 직면하기

 

<웰랑 뜨레이>가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들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상구네 가족의 적극성에 있다. 다수의 다큐들이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 장 루슈 이후 작가가 대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상황을 촉발하는 시네마베리테가 다큐의 제작방식으로 주창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은 다큐는 ‘관찰자’로서의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성’과 ‘순수성’을 담보하려 한다.

 

그러나 <웰랑 뜨레이>는 관찰자의 위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영화의 반절은 차라리 영화 스태프인 상구네 가족을 담고 있다. (<웰랑 뜨레이>의 촬영감독과 조연출은 김태일 감독의 부인인 주로미 감독, 촬영보조는 김 감독의 아들인 김상구 군이다. 김 감독은 “오래도록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있는 방식은 가족과 함께 ‘가내수공업’방식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외부인’이자 영화 스텝으로서 뜨레이 가족을 바라보는 상구네의 시선이면서 동시에 프농족 뜨레이 가족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상구네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된다. 이는 상황을 촉발하고 개입하긴 하나 여전히 관찰자의 지점에 머무르는 시네마베리테에서도 한 걸음 더 나가는 방식이다.

 

이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작업방식과 시선은 감독이 그려내고 싶었던 민중사, 즉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다 실체적으로 잡아낸다. 피상적이고 의례적인 말들을 카메라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직접 살갗을 맞댐으로 그들의 이야기 (He’s Story)를 몸에 직접 기억하는 일. 이를 통해 <웰랑 뜨레이>는 역사와 시대를 사건으로 분절시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역사와 이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의 실재하는 삶을 직면한다.

 

# “웰랑(안녕), 상구네”

 

캄보디아에 갔을 때 중학교 1학년이던 상구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됐다. 김태일 감독은 캄보디아에서 보낸 6개월(김태일, 주로미 감독은 8개월)이 아이들에게 변화를 주었다 말했다. 캄보디아를 다녀온 상구는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이 더욱 성숙해지고 자립심이 강해졌다고 한다.

 

영화 속 프농족은 가난하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삶에 자부심을 갖고 살며 노동의 가치를 존중한다. 땅을 사랑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긴다. 자본이 침식해 땅이 외지인에 팔려나가고 삶의 터전이 관광지로 변해가며 흉작이 이어져도 이들은 새로이 벼이삭을 심는다.

 

김태일 감독은 아이들에게 이런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경쟁과 승리만을 강요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이 알려주지 못하는 것들을 프농족과 함께한 일상에서, 그들의 역사와 노동에서 일깨워주고 싶었다고.

 

김태일 감독은 민중사 3부인 팔레스타인도 가족들과 함께 찾을 예정이다. (영화 속 중학생 상구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며 아버지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냈지만, 지금은 다행히 “다음 번 촬영도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세계사적 고통과 아픔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면 아이들이 앞으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갈지 더 잘 고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김태일 감독의 민중사 10부작은 앞으로도 계속 고통 받았고 소외됐고 희생당하면서 묵묵히 역사를 쌓아올린 민중들을 찾아 나선다. 역사책을 기록하는 높은 곳의 펜이 아니라 노동하고 울고 때론 웃으며 그럼에도 삶을 지속시키는 낮은 곳 사람들의 호미질에 주목할 것이다. 거기에는 점차 더욱 성숙해질 그의 아이들과 아내가 늘 함께 하며 감독 스스로도 10부작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들로 성장할 것이다.

 

완성까지 20년을 바라보고 있다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의 상구네 가족이 기대된다. 세계 곳곳 민중들의 삶을 지켜보고 관계 맺으며 성장할 아이들도, 그 아이들의 성장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더욱 성숙해질 감독 부부도. 그러니까 <웰랑 뜨레이>는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도 같다.

 

세계와, 역사와, 삶과 그러니까 결국 모든 살아가는 일과 나누는 이야기들의 시작인사.

“웰랑(안녕), 상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