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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의 영화들은 갈수록 '이야기'에 천착하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시간이나 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일은 예사고(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날짜나 계절, 시간의 방향을 먼저 파악하려고 신경쓰게된다.) 어느 결에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어디까지가 꿈인지도 분간키 어렵다. 아무래도 이야기보다는 '캐릭터' 그 자체에 집중하게되는데, 특별한 대사나 콘티없이 캐릭터와 상황을 주고 영화를 완성하는 작업방식도 이를 구현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해원'에서도 그녀가 꾼 꿈이 어디까지인지, 그녀가 언급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의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은 집요하게 반복되는 구조 혹은 등장인물의 '일관성'에 있겠다. 해원은 유부남을 만나는 언니를 미쳤다고 표현하면서 정작 자신은 유부남을 사랑하거나.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며 이선균의속물근성을 비난하는 동시에 자신은 결혼상대로 적합한 미국교수에 호감을 표현한다. 말인즉슨, 해원은 누구의 딸도 아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원하지만 결국 누구의 딸로밖에 살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카메오 출연한 제인버킨과의 에피소드나 영화시작에 등장한 엄마와의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난다. 이 반복되는 구조의 에피소드들이 꿈인지 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해원이 결국 누구의 딸로 존재할 수밖엔 없다는 이야기를 구축하고 있는 것.


어느 드라마나 영화의 조연으로 눈에 익은 정은채는 홍상수가 새로 발견한 여배우가 되는 듯. 정유미나 송선미에 이은. 옥희의 영화즈음부터 등장한 이선균은 그동안 홍상수 영화에 등장한 모든 남자배우를 통틀어 가장 잘생겼지만 아무래도 홍상수 영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는 유준상인듯. 안느송 부를 때부터 알아봤다니.


덧1. 무엇보다 이번 영화를 보고서도 술을 마셨다. 영시 홍상수 영화는 술부르는 영화. 참이슬은 뭐하나 홍상수 섭외 안하고. 홍상수가 참이슬 광고만드면 매출량 급증을 장담합니다. 진심임.


덧2. 서촌일대, 그러니까 사직동 그 가게를 위시한 그 일대는 요즘의 내 워너비 플레이스. 사직동 그 가게 엄청 좋다니까... 주변의 맛집 리스트도 하나 둘 씩 쌓여가고 있슴니다..ㅎ






신세계


박훈정 감독이 각본을 썼던 부당거래나 악마를 보았다, 혹은 장편 데뷔작인 혈투는 모두 신선하고 새로운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이미 뻔한 내용을 어떻게 '재미있게'(재미있게는 치밀하다와도 다르다) 짜맞추느냐에 방점을 찍었던 작품들. 신세계는 노골적으로 무간도의 설정을 가져오고 저수지의 개, 흑사회, 심지어 대부까지 온갖 조폭영화의 재미있는 점들을 다 끌어다가 한국이라는 공간에 우겨넣는 영화다. 대부분 이런 경우엔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돼서 눈뜨고 못볼 두시간을 만들기가 십상이지만 차라리 이 노골적인 '참조'(표절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까지 가져오면)는 재미를 쌓아내는데 적절한 역할을 한다. 


감독은 감독이 재밌게 보고 자란 느와르 영화들을 켜켜이 쌓아내면서 '장르영화' 자체에 대한 오마쥬를 하고 싶었던 듯 보인다. 당연히 양복입고 간지나는 형들이 나와서 쌈박질하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신세계는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다. 황정민과 최민식의 좋은 연기는 이런 장르영화의 매력을 한껏 증폭시킨다. 그리고 나는 이런 느와르 매우 좋아한다. (내가 앉은자리에서 86년 영웅본색을 시작으로 2002년 무간도까지 발표된 홍콩느와르 전편을 3박4일간 훑은 경력도 있는 남자임.)


말한 것처럼 아이디어가 번뜩거리거나 기가막힌 액션씬, 입체적인 캐릭터가 돋보이는 영화는 아니다. (기껏해야 황정민이 연기한 정청이 가장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일 수 있는데 캐릭터를 십분 살려내는 서사구조도 아니고 이를 받쳐주는 주변인물도 없다) 치밀하고 긴박감 넘치는 새로운 느와르를 기대했다면 빵점짜리 영화, 진부하더라도 간지나는 느와르 영화를 기대했다면 90점 이상. 


근데 그냥 이 영화는 원래 진부하더라도 간지나는 영화.가 목표인 영화다.






스토커


박찬욱의 영화는 대체로 얄밉다. 이 똑똑한 영화광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미장센으로 가득차 있다. 거기다 늘상 고전영화들을 탐닉하며 얻어온 고풍스런 장치들이 영화 곳곳에. (예전에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박찬욱이 늘어놓은 고전영화 예찬이 아직도 귀에 웅웅거린다.) 이건 질시, 경외, 경탄 같은 감정들이 복합된 것일텐데 그래서 박찬욱의 영화들을 마냥 고운 눈으로 봐주기 싫어진다. 뭐라도 하나 흠집내고 싶어. 아마 맨날 전교 1등만하고 싸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데다 밴드부 보컬에 학생회장까지 하는 인기많은 선배가 사실은 게이라더라는 헛소문을 내는 마음 같은 것. 일까..ㅋ


스토커는 대단한 주제의식 같은 건 없다. 그보다는 숙녀가 되기 직전의 소녀. 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존재에 대한 탐구, 집착, 관찰. 근친상간이라는 관계설정과 살인으로 만들어진 상황설정까지. 성적욕구를 자극하는 모든 요소가 총망라한. 이 미친것같은 상황과 관계들은 그래서 더욱 환상적이다. 심지어 소녀 인디아를 연기한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엄청 예쁘다. 니콜 키드먼도 당연히 예쁘고 섹시하다. 모든 박찬욱 영화에서 그렇듯 배경이 되는 공간은 (박찬욱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색'이라는 생각도 한다 올드보이 벽지같은.) 몽환적이고 무섭다. 집이 이렇게까지 낮설고 두려운 곳이 되다니.


영화의 첫대사, 그러니까 구두는 삼촌에게 벨트는 아버지에게, 블라우스는 어머니에게 받았다는 대사는 소녀가 아직 완전히 독립적인 숙녀가 되지는 못했다는 뜻이겠지만, 그 소녀는 엽총을 들고 보안관을 쏴죽인다. 아마 이게 이 영화의 줄거리.겠지.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박찬욱의 연출, 여배우들의 자태, 각본가의 유명세. (각본은 석호필로 유명한 엔트워스 밀러가 썼다고). 올 해들어 본 가장 섹시한 영화지만, 노출씬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엉뚱한 마음품고 극장으로 달려갈 뭇 남성들에게 미리 밝혀둠미다.






가족의 나라


디어평양을 만든 양영희 감독의 첫 극영화다. 디어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봤다면 이 영화가 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겠고, 그래서 영화의 말미에 감독의 자전적 캐릭터인 리애에게 성호가 해주는 "넌 누구의 인생도 아닌 너의 인생을 살라" 는 말의 울림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전작 다큐들에서도 그런 것처럼 양영희 감독은 가족을 갈라놓은 북송사업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그보다는 이념같은 모호한 것들이 강요하는 것들에 반감을 표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영화에서 가장 적대적인 캐릭터인 '양 동지' 역시 자곧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거나 그 양 동지가 "그런 나라에 나도 당신 오빠도 살고 있다"는 대사를 토해내면서 시대를 향한 시선이 적대보다는 연민에 가까워진다.


다큐 영화를 찍어온 감독인 탓인지, 영화는 거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지고 호흡도 차분하다. 감정의 격변이나 클라이막스도 없다. 하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더 큰 감정의 파고를 불러일으킨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그건 감독의 의도 여부와 상관 없이 원래 그런 것인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이 사실은 가장 격렬한 말이다. 






굿바이 홈런


잘만들고 좋은 다큐는 아니다. 결국 생활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야구 못하는 고교야구 선수들의 적막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지도 못했고, "그런 건 난 몰라요" 꿈만 꾸는 마운드의 낭만만 파고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어정쩡한 포지션. 그게 참.


야구를 미친듯이 좋아하지도 않지만 안타를 치고싶고, 야구를 당장이라도 그만두고싶지만 이거 하길 잘했다고 말하는 그 열일곱살들. 남들보다 일찍 현실을 알아버린 피로함과 남들보다 더 큰 순수와 열정을 품고있는 열일곱의 앳된 얼굴들. 그 어정쩡한 처지의 아이들을 그대로 담고있는 것처럼.


사실, 이런 감수성이 고팠다. 질질짜고 찌질해도 괜찮을 감수성. 그래서 얘네가 안타치고 1루베이스를 밟을 때마다 울컥울컥.ㅋ






남자사용설명서


정말 시간과 문화상품권이 남지 않았으면 보지 않았을 제목이었지만 말이지.


제목을 보며 떠올렸던 걱정은 좀 쓸데없는 걱정(어떤 걱정인지는 제목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해보자)이었고 생각보다는 건강한 영화였다. 본격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었고 적당한 성과도 있다. 웃기다는 말이다. 영화속 이원종처럼 아방가르드하고 유치한 웃음을 웃음으로 만들거나 뒤틀줄 아는. 


온갖 처세와 '여성'에 대한 불쾌한 선입견이 판을치는 현실에 대한 뒤틀린 숟가락 얹기. 쯤일까. 


이시영은 단연 돋보이는. 이 언니 권투 시작할때부터 알아봤다니까. 한다면 하는 언니임. 다만, '흔녀'로 등장하기엔 너무 예쁘다는게 흠. 오정세는 정말 엄청 찌질해서 탑스타처럼 보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뭐 탑스타라고 찌질하지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뭐가 다르겠어. 박영규나 이원종이 좀 거슬렸지만, 뭐 그건 그런대로 넘어가고. 


그러나 역시 중요한건 제목짓기와 포스터 사진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천하장사 마돈나, 김씨표류기에 이은 '제목에 속았어' 시리즈 3탄. 쯤.. 남자사용설명서가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