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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곡성>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작년 여름, <곡성>을 보고나온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놨다. 일광(황정민 분)과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의 굿판이 겨냥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일광과 외지인은 한패인지, 무명(천우희 분)은 마을의 수호신인지. <곡성>은 해체된 플롯의 영화다. 매 시퀀스는 놀라울만치 정교하지만 정작 시퀀스 간의 인과(因果)가 없어 내러티브를 구성하지 못한다. 인과 대신 우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개연성대신 감독의 불친절한 생략이 이야기(의도적인) 구멍을 낸다. 이 구멍들은 영화 밖에서 다른 영화적 재미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구멍을 채우기 위한 해석을 내놓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각자의 근거를 들이밀었다. 영화는 이 논쟁들이 사그러질 때까지 계속된 셈이다. 감독은 이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비가 내리면 옷이 젖게 되듯 누군가의 불행도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행에 대해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이 영화가 애초에 납득과 이해, 설명의 범주 바깥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불가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 어디 한 번 이해해 보라고 관객들을 부추기는 영화다. 그 이해와 몰이해, 불가해와 억측, 추론과 합리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설과 언설의 중첩. <곡성>의 진짜 시작은 영화가 끝난 다음일지도 모른다. ‘현혹되지 말라는 무명의 말에 시험에 든 종구처럼 관객들은 <곡성>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시험에 들게 된다. 답도 없는 시험.

 

# 불가해, 비이성, 그래서 뭣이 중헌디?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곡성>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인용되는 누가복음 24장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는 대목이다. 예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부터 믿지 못하고 예수의 손목에 난 못자국을 확인하고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야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 예수는 보고서야 믿는 도마를 꾸짖으며 보지 않고도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도그마, 증명과 확인을 요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와 신앙을 뜻한다.

나홍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불행은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생겨나지 않으며 불가해한 영역, ‘그냥 그런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감독이 그 불가해의 세계를 위해 영화 곳곳에 구멍을 내 영화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적이고 치밀한 짜임새가 없는 이야기로 만든다. 그리고 종교를 끌어들인다. 그러니까 개연성을 찾지 말라, 세상은 원래 그렇게 이해가 애초에 불가능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종교적 도그마를 그 근거로 가져다 쓴 셈이다. ‘고작 보고 있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면서.

영화 속 모든 불행은 인물들이 의심을 시작하는 순간 찾아온다. 마치 도마가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은 순간. 종구가 외지인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딸이 아프기 시작하고, 외지인이 제거되었다고 믿을 때 딸은 낫는다. 일광으로부터 악마가 무명이었다는 설명을 들은 후부터 다시 딸이 아프기 시작하고 자신이 눈으로 본 것보다 귀로 전해들은 것에 확신을 가진 순간 파멸에 이른다. 성긴 플롯 사이 유려한 시퀀스의 함정을 걷어내면 이 영화는 의심하는 모든 인물에게 처벌을 가하는 이야기다. ‘믿지 아니하였으니 복은 없을 것이다.’

<곡성>은 인간을 불가해한 세계의 사생아 정도로 이해한다. 인간이 믿지 않고 의심하며 사유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곡성>에 나오는 이들은 (감독의 말대로라면 피해자들은) 이성을 갖춘 듯 착각하지만 실은 현혹 당했고, 아무 것도 모르고(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했다고 여겨서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한다. 누구를 향해 살을 날리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던 영화 속의 굿판을 빼내면 영화 속의 폭력은 비이성의 함정에 빠진 피해자들이 다시 가해자로 둔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속신앙, 기독교, 제노포비아, .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정보가 부족할 때 그 구멍을 채우는 것은 일종의 믿음이다. 누군가는 개인의 체험을 동원하고, 누군가는 철학적 명제를 빌려온다. 누구는 종교에 의탁하고 누구는 다른 개인에게 종속한다. 감독은 불가해의 세계를 던지고 그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여 구원을 받으라 종용한다.

 

# 시험, 인간을 믿는 일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거짓말이다. 세계는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믿음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자포자기는 위로가 아니라 기만이기 때문이다. <곡성>은 결국 인간을 파괴했다. ‘인간적인 것들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 무기다. 종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불행의 실체와 원인을 파악하려 의심할수록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져버린다. 서로가 서로의 불행의 씨앗이 됐다. 그곳에서 생각하고 의문을 던지는 인간의 행위는 불행의 씨앗이다. <곡성>에서 인간은 미약한 존재라기보다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보인다. 무력한 당신에게 무력한 내가 던지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나.

어쩌면 이 영화는 영화와 세계, 인간과 희망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영화가 무력한 인간을 응시하는 것에서 끝난다면, 무력한 인간이 섞여 살아가며 지향하는 다음 세계에 대한 제시가 없다면 영화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고 자기 운명을 바꿀 수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까닭은 뭘까. 우리는 그저 운좋게 줄을 잘 서서 구원을 기다리기만 해야 할까.

누가복음 1장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목소리, 그러니까 자연의 목소리에서 자기 존재의 역능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된다. 예수는 요한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사실 예수는 저세상이나 하늘나라를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알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 접할 수 있는 현실이라고 봤다.

세계는 물론 엉망진창이다. 감독의 말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인과도 없어 보인다. 여기서 벗어나는 일은 요원하다. 세계는 생각보다 더 더럽고 추악하다. 그러나 영화의 윤리적 태도란 그 파국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안간힘이 돼야한다. 삶의 태도란 그 안에서 한 줄의 희망을 찾아 삶을 바꿔나갈 때 빛을 발하게 된다. 예수도 부처도, 어쩔 수 없으니 체념하고 살라고 가르치진 않았다.

시험에 들지 말지어다. 시험은 어쩌면 맹목을 권유하거나, 초월자에 대한 거스를 수 없음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역능, 삶에 대한 아주 작은 희망, 그리고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믿을 수 있냐는 물음이다. 시험에 현혹되지 말자. 문제를 잘 읽으면 답이 보이는 법.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