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에 해당되는 글 1건

만추 - 이 대책없는 낭만에 대한


솔직함이나 진심. 같은 말들을 좋아한다.
사람이나, 사랑, 관계. 같은 말도 물론이다.
하지만 그런걸 사실 잘 믿지는 못한다.

감정이 움직이는 그대로. 를 꿈꾸지만 사실 난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감정. 을 더 믿는 편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걸 부정하는 멍청이는 아니다. 다만 아직. 이라는 거지.
그래서 이 대책없이 낭만적이고 우직하게 순박한 영화가 좋았다.
마음이 움직이고, 결국 다시 삶을 살아가는 순간들이 반짝거리던.




버스를 타고 시애틀로 향하던 애나의 눈은 무관심보단 어쩌면 두려움에 가깝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무관심을 어떤 의지도 욕망도 없음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모든게 두려운게 아닐까. 하는.
상처가 크면 딱지도 크니까.

이런 생각은 영화가 한참 지나고 그녀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할때 더 확실해졌다. 그녀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더 세상을, 사람을, 또 자신의 삶을 동여매고 있구나. 그 안에 박제시켜 놓았구나. 다시 죽지 않으려고 스스로 죽었구나. 하는 생각들.


시간이 지나며 애나와 훈이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이 달라지고, 조금씩 자기 밖으로 나오던 애나가 사랑스런 춤을 상상하고, 마침내 눈물을 쏟으며 소리지를 때. 서로가 서로를, 마음이 마음을, 만남이 관계를 또 삶을 변화시킬거라는 이 대책없는 낭만이 스크린에 나타난다. 

영화를 볼 땐 대사에 집중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대사보단 애나의 얼굴, 그러니까 표정에 무게가 실린다. 그녀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표정이 자기를 지켜줄거라는 듯이. 그러다 한번씩, 범퍼카에서 달리면서 훈의 말도 안되는 대답에 피식거리며, 유령관광온 관광객들에게 놀라며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관계(들)은 변한다.

영화는 대책없이 낭만적이다. 3일의 외출동안 만난 남자와의 관계(그게 사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가 죽어있던 그녀를 깨운다. (훈이 애나에게 굳이 시계를 주는 이유는 그녀에게 멈춘 시간을 건네주는 의미일까) 무튼 시간이든 마음이든 감정이든 죽어 멈춰 있던 그녀를 깨워 변화시키는건 관계, 사랑, 사람. 이라는 그런 낭만.

난 낭만을 동경하지만 동경은 이해의 반대말이니까. 갖고 싶지만 정체도 모르는 것.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모두의 자유. 관계와 감정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건 그대로 건강하고 성실한 삶.

다만 헛갈리지는 말자. 모든 관계가 이처럼 낭만적일리도 또 당신을 살게하지도 않을테니.
다만 보지 못했어도 희망을 버리지도 말자. 감정이 움직이는 순간을. 그 찰라의 소중함이란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아름답고 짜릿하니까.


덧,
탕웨이는 아름답다.
좋은 연기를 찾고 싶다고, 어쩌면 연기는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는 인터뷰를 봤더니 더 아름답다.

덧2,
안개가 자욱한 시애틀을 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왠지 뜬금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