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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 삶의 한쪽 귀퉁이에 남은 주름이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주름이나 흔적처럼 살다가 사라진다. 목이 메고 마음이 애잔해지는 것은 모두 늦여름 골목길에 떨어진 매미의 죽은 몸처럼 자연스럽게 생기는 여분의것에 불과한데, 지난 몇년간 나는 거기에 너무 마음을 쏟았다. 이젠 알겠다. 역사책의 갈피가 부족해 거기까지 기록하지않은 게 아니었다. 마음 둘 필요없는 주름이나 흔적이기 때문이다. (p51)

─ 그날 밤, 내 머릿속에는 뒷산에 꽃아두고 온 모종삽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비스듬하게 땅에 꽃혀 있을 모종삽. 그 모종삽처럼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하게 꽃아두고 온 것들. 원래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들. 그런 것들. (p80)

─ 그해 겨울, 나는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했다.(p131)

─ 인생이란 취하고 또 취해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여름난 같은 것. 꿈꾸다 깨어나면 또 여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곳.(p164)

─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나는구나. 다시 돌아갈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p242)


청춘이라니. 아. 이 손발이 오그라드는 제목이라니.
하지만 아. 청춘, 이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후덜거리는 낱말이라니.

청춘은 마치 흑백필름 같다며 우리 청춘의 이야기를 흑백으로 찍어버린 어느 영화 감독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실 그렇다. 청춘을 마치 신록과 5월과 강렬한 햇빛과 예쁘고 고운 기억들로 치장하는 이 있다면, 장담컨데 그는 청춘을 살아보지 않은 자일테다.

청춘은 무채색이고 괴롭고 또 외롭고 아무일 없이 무료하고 무기력하며 작은 일에 분노하고 기뻐하며 자신의 사랑만이 오직 세상에 유일한 사랑이라 여기는 오만하고 어리석고 여리고 가여운 시절이다.

하지만 살아가며 어느 한 순간이라도 오만하고 어리석고 여리고 가엽지 않은 순간이 있을까. 그래, 우리는 늘 청춘의 가운데를 살고 있다. 아니 삶은 곧 청춘일지도 모른다.


삐뚜루 보면야 암것도 아닌 얘기들이지만 김연수의 스무살 시절들에 적잖이 위로받는건 사실이다. 허겁지겁 밑줄까지 쳐가며 읽은 책을 덮고나니, 이렇게도 허망할수가. 남는게 없다.
그야말로 청춘의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