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올해의 영화/음반 결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2019년 결산.

의미도 없는 결산인데 순위 같은 건 당연히 없습니다. 

가나다 순으로 정렬할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서. 

그저 먼저 생각난 순서입니다. 먼저 생각난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죠.  

 

 

 

 

<하이 라이프> – 클레르 드니

 

 

우주의 끝, 해왕성까지 가서 고작 아버지를 찾아낸 <애드 아스트라>보다는 어딘지도 모를 철저한 고립 속에서 서로 다른 우주를 공유하고 그것이 관계 맺으며 공존하는 삶을 ‘견뎌내는’ <아이 라이프>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냉장고처럼 생긴 우주선, 섹스는커녕 어떤 관계맺기조차 금지된 밀폐공간에서, 서로를 도구로만 인식하도록 강요하는 ‘질서’와 그 질서의 고통이 주는 ‘최후의 유혹’마저 견뎌내고 우리는 서로에게 충실하고 서로를 지켜주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어쩌면 ‘우주선’과 우주선의 주인‘, 그러니까 일종의 신이 아니라 그저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터부‘를 지켜내는 일이 아닐까. 몬테와 윌로가 건너간 사건 지평선 너머는 더 행복한 우주였으면 좋겠다. 

클레르 드니의 영화를 몰랐는데, 어쩌다 주워들은 이름과 이 영화로 그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의 영화들을 차근차근 찾아봐야지.

 

 

<벌새> - 김보라

 

모든 것은 모두에게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기억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어떻다고 말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응시’일 뿐이다. 확실한 실체라는 것은 어차피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바라볼 뿐이고 그 ‘봄’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벌새>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고작 중2짜리 여자애’의 우주가 가장 거대한 우주가 되는 서사라는 점이다. 외계생명의 침공에서 지구쯤은 구해줘야, 못해도 테러리스트들의 핵공격에서 인구 1천만의 도시쯤은 구해줘야 성립되는 줄 알았던 ‘영웅서사’가 (생각해보니 영웅의 ‘웅’자는 수컷 웅자구나) 가장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이야기에서 구현된다는 것. 단절과 죽음, 불안은 성수대교의 붕괴와 김일성의 죽음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들은 사실 다르지 않으며 서로 통하고 이어진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영지 선생님’을 떠올려 봤다. 그래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과 순간들이 있었다.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말해주던 선생님, 천천히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들, 책을 주고 영화를 보여주던 선배들. 좋아한다고 신뢰한다고 말해주던 후배들. 모두가 영지선생님이었을테다.   

 

  <엑시트> - 이상근

 

엑시트만 보면 행안부 재난안전관리본부의 안전지침을 모두 알 수 있다. 좀 웃긴 얘기지만, ‘따따따 따아 따아 따따따따’를 온갖 안전교육이 알려줘 봤자 용남과 의주가 간절하게 외치는 한컷의 힘을 이길 수 없다. 

두시간 동안 불쾌한 장면 하나 없이, 억지스럽거나 과잉된 감정 없이 재난을 ‘그럴싸하게 있을법한’ 재주로 극복해가는 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전개된다. 올 해의 오락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임윤아. 가장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의 화신. 미의 정언명령. 아이돌 출신 배우 중 가장 발군의 연기력과 관객동원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견의 여지가 없음.   

 

<암전> - 김진원

 

장르에 대한 애정, 어쩌면 영화나, 이야기. 어쨌든 창작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모두에게 도사리는 공포. 그런 것들이 싫지 않고 다소 뻔하고 흔한 괴담 스토리를 싫어하지 않아서. (난 초등학교 때 우리학교 지하창고에 유관순 누나가 한 발엔 양말을 한 발엔 버선을 신고 있는 걸 실제로 봤다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특히 특출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광기는 필수적인 요소다. 차라리 보편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삶의 모든 일이라는 것이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는 창작자이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일말의 광기는 필수다. 

장르영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억지스럽지않게 욕심내지 않고 영화를 만들면 아마 <암전>이 나오는 것 같다. 쓸데없는 공포의 효과를 넣지 않고, 과장스러운 괴기를 넣지 않아도 충분히 공포스럽다. 공포란 원래 높은 볼륨에서 오는 게 아니다.  

(서예지라는 배우는 참 흥미롭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선 어쩜 이렇게 잘하나 싶다가도 어떤 작품에선 또 너무 엉망진창이기도 해서. 작품을 타는 배우란 어떤 의미인가. 이 영화에선 대단히 잘해서 깜짝 놀란 쪽.) 

 

<어벤져스 앤드게임> - 마블

 

감독이름 보다. MCU의 일단락인 이 영화는 마블의 모든 사람들과 그 영화를 10년동안 지켜 본 우리가 만들어낸 영화다. 마블의 영화를 사랑해 온 모두에게 어벤져스가 전하는 가장 행복한 작별인사.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어벤져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사실 그동안 견지해온 공식입장이라면 헐크나 스파이더맨을 이야기해야겠지만 실은 아이언맨이 가장 좋아”라고 대답했다. 아이언맨, 3000만큼 사랑해.  

 

<어쩌다 룸메이트> - 소륜

 

현지 제목은 <초시공동거>. 2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싸구려 맨션에 살던 두 주인공의 집이 갑자기 한 공간으로 포개진다. 누가 문을 여는 지에 따라 바깥세상은 비 내리는 2018년이다가, 해가 쨍쨍한 1999년이 되기도 한다.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이 한 공간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사실 매우 허술한 플롯이고, 온갖 타임슬립 드라마들에서 한번씩은 봤던 설정들이지만, 매우매우 귀여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후 가장 흐뭇하게 본 타임글립 영화였다. 적당한 오글오글. 적당한 몽글몽글. 흔들리는 98년에서 니 아이폰 벨소리가 들려온 거야.  

 

<미성년> - 김윤석

 

일종의 ‘캐릭터 쇼’ 같다. 영화 전체의 짜임새 있는 플롯보다는 인물들의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힘. 그건 캐릭터 하나하나에게 영화가 쏟는 애정의 힘이 근원이겠다. 어느 캐릭터도 밉지 않다. 범인도 없다. (김윤석이 연기하는 아빠가 그나마 그에 가깝겠지만, 실은 이 영화 전체에서 아빠는 별로 중요한 역할이 아니다.) 영화 평이 대부분 ‘배우’의 연기를 상찬하는 내용으로 가득한데, 당연히 좋은 배우들 (염정아 언니야 늘 그랬듯 대단하지만 문득 새로운 발견은 김소진. 최근 몇 년간 드문드문 발견돼 화제가 된 ‘어리지 않은 여성배우’의 다음 차례는 이제 김소진의 차례일 듯)의 연기가 돋보이지만, 그보다는 그 배우들이 연기해낸 캐릭터 자체가 갖는 힘이기도 하겠다. 그를 표현하는데는 배우출신 감독의 좋은 연기 디렉팅도 있었을 것 같고. 

영화는 오롯이 여성 캐릭터에 집중하고 있다. 그건 그동안 마초 역할을 하면서 (실제로 여성혐오적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전력도 있는) 커리어를 만들어온 김윤석의 반성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의 영화라기 보다는 마초 남성의 노력 정도로 보이기도 한다. 무튼 재능많고 잘하는 ‘영화인’ 김윤석의 성공적인 장편 데뷔작. 

 

 

<가버나움> - 나딘 라바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하며 회개를 말씀하셨지만,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는 가버나움이 멸망할 것이라 예언했고 가버나움은 멸망했다. 

베이루트. 빈곤과 착취, 폭력이 버무려진 가버나움. 실은 거기 뿐일까. 가버나움이. 12살(로 추정되는) 자인의 삶은 어쩌면 예수의 삶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질 수 있는 것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려는 삶. 무거운 타인을 조악한 수레에 싣고 기꺼기 걸어가려는 삶. 그리고 마침내 그 벽에서 ‘자기가 태어난 이유’에 대해 묻는 과정.

예수의 삶은 성자의 삶이라기 보다는 인간적 삶의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12살로 추정되는 자인의 삶이라는 것이 실은 가버나움에 사는 우리가 복원해야 할 인간적 삶의 근원 아닐까. 이대로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가버나움도 멸망하는 것은 아닐까. 

 

<얼굴들> - 이강현

 

<얼굴들>은 가장 극적이지 않은 영화다. 극적이지 않으니 서사에는 개연성이 없고, 갈등의 고조와 절정이나 해소가 없고 원인과 결과도 없다. 아니다, 없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얼굴들에는 저마다의 서사와 개연성과 목소리와 절정과 분노와 슬픔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없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것. 여백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왜 다를 것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질문들의 중첩을 이야기라고만 여긴다면 <얼굴들>은 최악의 영화다. 다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들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의 통창 너머 길 건너에서 걸어가고 있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남자의 삶을 함부로 말하거나 구기지 않고 그 얼굴 자체를 보거나, 그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그 공간에 실은 무엇이든 있을 수 있음을 떠올린다면 <얼굴들>은 근래 나온 영화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극적인 영화일 수 있겠다.

<지구 최후의 밤> - 비간

 

올해 어떤 영화가 가장 좋았냐고 묻는 질문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는데, ‘영화’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 한다면 아마 <지구 최후의 밤>이 될 것 같다. 영화가 나타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특히 케이블카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남을 명장면.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이나 타르코프스키 같은 거장들에 대한 존경과 오마쥬가 가득하다. 동시에 2010년대를 살며 그들의 영화를 사랑하는 젊은 감독 (비간 감독은 무려 나보다 어리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영화다. 세련된 고풍스러움?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사를 쉽게 보여주지 않고, 영화 속 흐름은 종종 뒤틀리고 왜곡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환상적이며 몽환적이고 그래서 아름답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의 끝판 왕.

(그리고 탕웨이가 나온다. 무려 탕웨이. 아름다움의 끝판왕.)  

 

써놓고 보니, 올해 영화제에서 본 영화는 하나도 없고, 그래서 단편영화도 하나 없네. 내년엔 더 성실하게 영화를 봐야겠다는 다짐. 

음반 결산도 하려 했는데, 여기까지 쓰는 데만 2시간 걸렸다. 음반결산은 나중에 다시 해야지. 일단 리스트만 공개



++ 커밍순

 

천용성

아이유

갈란트

빌리 아일리시

애이브릴 라빈

이센스

태연

잠비나이

보울스

톰 요크